[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모더니즘적 성찰과 장르적 실천 사이 '오발탄'
2020-10-05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한국의 모던 시네마가 탄생하다
영호(최무룡)는 미리(김혜정)의 주선으로 영화배우가 될 것을 제안받는다.

<오발탄> 제작 대한영화주식회사 / 감독 유현목 / 상영시간 107분 / 제작연도 1961년

<오발탄>은 1960년 4월 혁명 직후 제작에 들어갔다. 김성춘 조명기사와 김학성 촬영기사 그리고 유현목 감독이 의기투합한 공동 제작이었고, 스탭과 배우들 역시 앞뒤 재지 않고 무보수로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자본이 아닌 영화인이 중심이 되어 그동안 만들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로 모인 것이었다. 이때 일간지 기사들은 이러한 제작 경향을 동인제 제작이라 부르며 관심을 표했다. 영화의 원작은 1959년 10월 <현대문학>에 발표한 이범선의 동명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유현목은 생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로 만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절박감”을 품었고, 4·19로 정권이 몰락하자마자 제작에 착수한다. 각색은 당시 능력 있는 조감독으로 인정받던 이종기가 맡았다.

자본 논리가 우선인 상업영화 제작 현장을 떠올리면 <오발탄>의 제작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촬영이 쾌조를 보인다는 초반 기사에도 불구하고 제작비 문제로 일정이 늘어졌고, 1년 가까이 지난 1961년 4월 중순에야 관객과 만나게 된다. 후반작업 중에 또 시사실에서 영화를 먼저 접한 이들로부터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 나았다는 소문이 흘러나왔지만, 영화의 진정한 운명은 개봉 이후에 결정되었다. 영화라는 텍스트가 감독만의 것으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오발탄>은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영화임에 틀림없다.

개봉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당국은 아무래도 절망적인 묘사가 가시지 않은 영화의 심의에 다시 착수했고, 같은 달 진행된 베를린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을 위한 관제 심사위원회에서는 <오발탄> 대신 <마부>(감독 강대진, 1961)를 최종 선택했다. 영화 외적인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후 한국의 암담한 현실을 드러낸 이 영화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 자료”가 될 수 있어 상영을 금지해야 한다고 문교부에 통보했다. 5·16 쿠데타 이후 영화는 7월의 공식적인 재검열 과정을 거쳐 무기한 상영 보류 판정을 받게 된다. 이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선전하고 반미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영화라는 얘기까지 포함됐다.

검열이 규정한 리얼리즘 텍스트

제작사 대표 김성춘이 혁명공약을 자막으로 삽입하는 등 수정한 버전으로 재심의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던 영화가 해금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발 영향력이었다. 당시 서류 내용을 보면 국내 문화예술계의 지지 여론에 더해 미국 USC에서 영화를 가르치던 리처드 다이어 매캔이 이 영화의 우수성에 대해 편지를 보낸 것과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초청이 결정되었다는 것이 해제 결정의 근거가 되었다. 지난한 검열 끝에 1963년 8월 복권된 <오발탄>은 일제강점기의 <아리랑>(1926)과 함께 한국영화사의 대표작이자 리얼리즘 영화의 정전으로 기록된다.‘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자. 영화는 원작 소설의 실향민 가족을 중심으로 전후 사회의 실업난과 해방촌의 빈곤한 풍경을 묘사한다. 이처럼 사회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비참한 현실을 주제로 삼았다고 해서 리얼리즘 영화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논의에서 빠진 것은 바로 어떻게 묘사하느냐의 문제이다. 1950년대 유현목은 할리우드영화의 장르 문법과 독일 표현주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같은 유럽의 예술영화 양식을 동시에 모색하고 있었다. 그의 초기 필모그래피를 힌트 삼아 스타일적 방법론의 차원을 검토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오발탄>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세계영화사의 여러 스타일적 경향이 혼종되어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영화 <오발탄>은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영화적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영화적이라는 표현은 여러 차원을 포함하는데, 이 영화가 원작과 달리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영화에 대한 영화를 모색하는 것, 그 과정에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그렇다. 실향민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가장 송철호의 이야기가 원작에서 온 것이라면, 영화는 상이군인 출신인 동생 영호의 이야기에 영화적으로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그 세계를 넓힌다. 주로 동생 영호에 할당되는 영화의 덧붙인 이야기가 장르적으로 운반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혹하다

먼저 익숙한 방식으로 <오발탄>의 줄거리를 떠올려보자. 계리사 사무소 서기인 철호(김진규)는 병중인 노모(노재신), 만삭의 아내(문정숙)와 어린 딸, 남동생 영호(최무룡)와 민호, 여동생 명숙(서애자)과 함께 해방촌의 판잣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치통이 심하지만 치과에 갈 여유도 없고 어린 딸에게는 신발 한 켤레도 사주지 못할 만큼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양공주로 밤거리에 나섰다가 경찰에 잡힌 명숙, 은행 강도를 하다 잡힌 영호 때문에 차례로 경찰서에 불려가게 된다. 아내마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자 그는 길거리를 방황하다 여러 치과에 들러 사랑니를 하나씩 뺀다. 고통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철호는 택시에 올라 해방촌 집으로 갈지 대학병원으로 갈지 중부경찰서로 갈지 갈팡질팡하다 노모처럼 “가자”라는 소리만 내뱉는다.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경식(윤일봉)과 영호 등 상이군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퇴역 군인인 영호 무리는 모두 실업자 신세를 면하지 못해 밤마다 술집을 전전한다. 영호는 야전병원에서 만났던 설희와 우연히 다시 마주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화배우가 된 애인 미리(김혜정)가 그를 새로운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을 주선하지만 실제 관통당한 상처가 필요한 상이군인 역이라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은행 강도를 계획하던 그는 설희가 죽자 그녀가 가지고 있던 권총을 들고 실행에 옮긴다.

영화 <오발탄>은 형 철호와 동생 영호라는 두 인물로 흥미로운 구도를 만들어낸다. 유현목은 영호를 철호의 또 다른 자아처럼 묘사한다. 영화는 매 순간 힘들게 살아내는 철호의 숏에 은행털이를 계획하는 영호의 숏을 무심히 붙이며 둘을 이어준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철호와 영호는 단 세번만 마주친다. 먼저 철호가 퇴근하는 길에 술에 취한 영호와 마주친 장면이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영호의 소리에 철호는 대꾸도 없이 집으로 들어간다. 그는 마치 자아의 목소리를 외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영호가 은행 강도를 결심한 직후다. 조카의 신발을 사온 영호와 뒤따라 집으로 들어온 철호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영호는 살기 위해서는 양심과 윤리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쏟아내고 철호는 “영호야, 그렇게나 살자면 이 형도 잘살 수 있었단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영호의 세계가 철호에게는 좀처럼 내딛을 수 없는 곳임은 둘의 세 번째 만남에서 확인된다. 경찰서에서 영호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돌아선 그는 영호의 질문과 자신의 대답을 되새길 뿐이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해 그저 걷고 있는 철호의 모습은 한국의 모던 시네마가 이 영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이는 분명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전거 도둑>(감독 비토리오 데시카,1948)이 유현목의 것으로 흡수된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거부한 영호의 동선은 영화/현실에서 멜로드라마 혹은 필름누아르 같은 장르영화의 궤적에서 맴돈다.

<오발탄>이 1960년대 한국영화가 모더니즘의 길을 탐색할 때 근본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만희의 <휴일>(1968)이 그렇다. 영호가 훔친 돈 가방을 들고 공사 중인 건물을 지나 명동성당이 원경으로 보이는 골목길에서 점을 볼 때, 철호가 죽은 아내를 병원에 두고 명동 거리를 헤매며 치과를 들락날락하는 장면에서 <휴일>의 무기력한 청년 허욱(신성일)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모던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