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사프디 형제의 '헤븐 노우즈 왓'이 결핍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
2020-10-20
글 : 조현나
나는 소망한다 나를 파괴하는 것을

<헤븐 노우즈 왓>은 할리(아리엘 홈스)와 일리야(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서로를 보듬고 입을 맞추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그 위에 할리의 울음소리를 얹으며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어지는 신에서 일리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할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할리는 그런 일리야 곁을 맴돌며 용서를 구한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벌써 죽었겠다!” 자신이 죽으면 용서하겠냐는 할리의 말을 무기 삼아 일리야는 결국 할리가 손목을 긋게 만든다. 여기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영화가 처음 보여준 둘의 애틋함은 환상이었나? 할리는 왜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사랑을 증명하려 하나? 손목을 치료하고 나온 할리는 옷을 꿰매야 한다는 일리야의 말에 아둔한 손짓으로 바늘에 실을 꿰려 애쓴다. 저렇게까지 헌신하는 이유가 뭘까.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답을 이야기하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관객은 의문을 품은 채 할리를 따라가게 된다.

질주보다 방랑에 가까운

사프디 형제의 2014년작 <헤븐 노우즈 왓>은 최근작 <굿타임>과 <언컷 젬스>에서 드러난 연출 방식이 곧이 적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굿타임>과 <언컷 젬스>는 인물의 목적을 처음부터 명확히 제시하는 데 반해 <헤븐 노우즈 왓>은 목적에 대한 언급 자체를 최대한 유보하기 때문이다. <굿타임>과 <언컷 젬스>의 경우 함께 돈을 훔치다 붙잡힌 닉(베니 사프디)을 코니(로버트 패틴슨)가 빼내려 하고, 하워드(애덤 샌들러)는 보석을 경매에 올려 도박 빚을 갚으려 한다는 사실이 영화 초반부터 드러난다. 때문에 코니와 하워드가 초조함이 서린 얼굴로 전력 질주하는 것, 때로 무리수를 두는 상황까지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를 벗어나려는 인물의 전투적인 움직임, 옥죄어오는 일련의 사건들, 그로 인해 야기되는 극도의 긴장감. <헤븐 노우즈 왓>은 이러한 흐름을 교묘히 비껴간다. 기본적으로 할리와 일리야는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이 아니다. 거리를 전전하는 마약 중독자인 두 사람은 오직 약에 취하고 약에 취하기 위해 구걸을 하는 시간들로 삶을 채운다. 영화 초반의 사건을 제외하곤 둘은 특별히 압박적인 상황에 놓이지 않고 그렇기에 뭔가에 전투적으로 임하는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일리야에 대한 할리의 맹목적인 사랑, 반복되는 헌신적인 행동들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일리야와 할리의 만남은 어쩌다 마주치는 우연에 가깝다. 그 상황이 익숙한 듯 할리는 손목을 치료하고 병원을 나선 후에도 곧장 일리야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빈자리를 마약으로 채운다. 카메라는 약에 취한 할리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하는데, 갈 곳을 잃은 시선을 두고 할리가 심적으로 길을 잃었음을 재차 확인시켜주는 듯하다. 거리의 방랑자인 할리는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안주할 곳이 없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일리야는 안정감을 주는 대상이 아니고, 할리는 약에 취해 멈춰선 때를 제외하곤 돈과 약을 찾아 거리를 배회한다. 사프디 형제는 이번 작품에서 이례적으로 핸드헬드 카메라 대신 카메라를 멀리 고정시키고 촬영했는데 할리의 움직임이 워낙 잦아 그 변화가 확연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코니와 하워드가 그러했듯 사프디 형제가 그리는 인물들은 대체로 끝없이 움직이고 질주한다. 할리의 움직임은 질주보다 배회 혹은 방랑에 가깝지만, 그의 정서적인 방황까지 고려해보면 주체의 움직임이라는 특성이 오히려 강화된 인물로 보인다.

약에 취하고 깨기를 반복하듯

할리가 재밌어 보인다며 오토바이에 오르자 마이크(버디 듀레스)는 “그러다 목숨을 잃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말린다. 이후에도 마이크는 여러 차례 할리를 만류한다. “그 자식 옆에 있다가 인생 망칠 거야? 네 삶은 안중에도 없어?”그러자 할리는 답한다. “이미 망쳤어.” “사랑하는데 어쩌라고.” 할리가 과다 복용으로 죽을 뻔한 일리야를 구한 후 다시 가까워진 두 사람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날 준비를 한다. 할리의 시선은 다시 오롯이 일리야를 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레이션. “사랑하는 일리야, 넌 내가 모르던 세상을 알게 해줬어. 내 어두운 면조차도. 네가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다 네 덕분이야.” 할리의 목적은 현재 상황을 벗어나는 것도 대단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리야와 함께하면 된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손목을 그었듯 자기 파괴를 감행해서라도 그를 붙잡아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올곧게 실패한다. 할리가 병원으로 향할 때에도 그리고 플로리다행 버스에 오른 뒤에도 일리야는 결국 동행을 거부한 채 사라진다. 더불어 일리야는 할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는다. 재회한 후 이들의 대화신이 등장하긴 하지만 할리의 내레이션 배경으로 소비돼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결국 프레임 내에서 일리야는 할리의 사랑에도, 시선에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다. 할리가 일리야와 나눈 사랑은 실제일까. 혹여 약에 취한 할리의 환상이었던 건 아닐까. 할리는 일리야와 함께한 순간만이 제대로 살 수 있는 때라 여기는데, 그와 함께한 시간은 약에 취한 시간처럼 짧고 그가 없는 시간은 거리 위를 배회하듯 길다. 그 허함과 결핍은 결국 중독으로 귀결된다. 결과적으로 마약과 일리야가 할리에게 작용되는 방식은 같다. 자신을 망가트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할리는 그 순간의 쾌락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헤븐 노우즈 왓>은 실제 거리의 방랑자인 아리엘 홈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사프디 형제는 어느 날 손목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아리엘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이후 그의 “광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작업의 발단이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들이 아리엘 홈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바로 그 지점, 그 사건에서 영화 역시 출발한다.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보면 사프디 형제는 어떤 결핍, 혹은 욕망을 원료로 움직이는 대상에게 관심을 갖는 듯 보인다. 코니와 하워드, 할리 모두 넓은 의미로 이 대상에 포함된다. 때로 이들의 행동은 무모하고 할리의 경우처럼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감독은 어떤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과연 이들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대상에게 집중한다. 집요한 욕망과 그것을 들이파는 집요한 방식. 그곳에서 사프디 형제의 영화가 시작된다.

<굿타임>과 <언컷 젬스>는 모두 인물들이 실패하는 결말로 끝난다. 특히 닉은 처음 자신이 등장한 상담소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워드 역시 자신의 보석상에서 살해당하는 것으로 서사가 마무리된다. 할리도 사랑에 실패한 채 자신의 시작점으로 돌아오지만 할리는 자의적으로 이곳에 돌아왔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일리야라는 세계는 무너졌지만, 할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 채 출발점에 선 것이다. 따분한 표정으로 마이크의 이야기를 듣는 할리는 언제라도 다시 일어나 거리를 배회할 것만 같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새로운 대상을 찾아 당장이라도 떠날 것만 같다. 마치 약에 취하고 깨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