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부터 EBS 의학 다큐멘터리 <명의>를 집필 중이며 <노무현입니다> <김군> <언더그라운드> 등의 다큐멘터리에 참여한 양희 작가가 영상이 아닌 책의 작가로 돌아왔다. <도쿄의 서쪽으로 가라> <아이가 말했다 잘 왔다 아프리카>를 펴내며 이국의 풍경을 글로 풀어낸 그가 이번에는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전하는 이들, 즉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얘기”를 붙든 동료들의 속내를 찬찬히 듣고 옮겼다.
감병석 프로듀서, 강유가람 감독, 박영이 감독, 김형남 편집감독, 안재민 촬영감독, 이승민 평론가, 조계영 필앤플랜 대표, 주희 엣나인필름 이사, 변성찬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 위원장과 최민아 사무국장까지 총 10명의 속엣말이 양희 작가의 문장으로 전해진다. 영상에 매여 있는 글쓰기에서 잠시 벗어나 책을 쓸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그에게 <다큐하는 마음>을 완성한 마음을 물었다.
-<다큐하는 마음>은 어떻게 집필하게 되었나.
=<출판하는 마음> <문학하는 마음> 독자였다. ‘어라, 이거 시리즈네?’ 하며 책을 보는데, 다큐하는 마음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단숨에 원고지 50매 정도로 서문을 쓰고 목차도 만들었다. 이후 <출판하는 마음>의 인터뷰이였던 김민정 시인에게 김태형 제철소 대표의 연락처를 받아서 이 기획을 전달했는데, 처음엔 김태형 대표의 반응이 나와는 온도 차이가 좀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9월에 처음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고, 만나기 전에 김 대표에게 내가 쓴 서문과 목차를 보냈다. 그걸 봤는지 갑자기 대표의 문자에서 다정함이 느껴지는 거다. (웃음) 그가 솔직히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혼자 만드는 건 줄 알았고 직업군도 감독, 촬영감독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가 보낸 글을 보고서야 다큐멘터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그날로 계약을 했고, 1년여 만에 책이 나왔다.
-다큐멘터리를 둘러싼 9개의 포지션에 있는 10명을 인터뷰이로 추렸다. 선정 원칙이 궁금하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다양한 이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각자의 이슈를 분명히 가진 분들 위주로 골랐다. 박영이 감독은 재일 조선인 이야기와 연결고리가 있고, 강유가람 감독은 오랫동안 페미니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분이다. 주희 엣나인필름 이사는 <다이빙벨> <자백> <공범자들> 등 르포 다큐멘터리를 배급했는데,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영화를 용기 있게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칠곡 가시나들> 을 홍보한 조계영 대표를 통해서는 영화계의 불공정에 대해 말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글을 읽어보니 한 사람을 서너번씩 만나는 등 인터뷰가 단발성이 아니었던 것 같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 2, 3월은 거의 사람을 못 만났고, 5월에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이들 중에는 몇년간 다양한 영화제나 행사 때 만나서 지나가는 얘기만 나눈 사이가 많은데, 한 사람 한 사람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깊이 있게 알아가고 싶었다. 두세번씩 만나며 그 사람에게 맞는 단어를 골라 쓰려고 했다.
-인터뷰이들에게 던진 공통 질문이 있었나.
=모두에게 다큐멘터리를 왜 하는지, 다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서로 다른 시점에 만나 물었는데 신기하게도 거의 다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좋다는 답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자신은 바뀌기 어려운 사람인데 다큐멘터리를 하다보면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간다는 답도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제작기간이 길고 오랫동안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감독이나 작가가 변한다.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고 설득도 할 수 없다.
-오랜 과거까지 이야기 시점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터뷰이들 각자의 개성과 역사가 드러난다.
=현재 이야기를 한참 묻다가 이 길은 어떻게 접어들었는지,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묻다보니 시점이 점점 뒤로 가더라. “그전에는 뭐 했는데? 그럼 그전에는?” 이런식으로. 그러면서 조계영 대표가 아버지의 스티커 사진 가게에서 3년이나 일했고, 이승민 평론가가 캐나다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터뷰이들이 자신도 잊고 있었던 첫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더라.
-그렇게 해서 종합한 ‘다큐하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서문의 첫 문장을 다시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랑은 증명을 통해서만 구체화되고 힘을 얻는다. 내가 소수자의 삶, 환경 문제 같은 세상 이슈에 관심이 있을 때 그게 내 마음속에만 있으면 안된다. 다큐멘터리를 보든 텀블러를 쓰든 구체적인 행동으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큐하는 사람들은 그걸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증명한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인물들은 감독과 부모 자식 관계도 아닌데 자신의 삶을 다 보여주지 않나. 감독들이 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고, 함께해줄 수 있다고 계속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이 책으로 그 마음을 증명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책에는 미국 거주 경험이나 <노무현입니다> 작업기, 방송 다큐멘터리 작업기 등 양희 작가의 인생 그리고 다큐멘터리 이력도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다른 사람의 인터뷰지만 인터뷰어 본인이 이야기를 녹여내는 것도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 주인공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렇다. 내 나름대로 주인공을 다시 해석하고, 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었다. 조금은 다른 형식의 인터뷰집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인터뷰이의 애장품 소개로 매 인터뷰를 열고 그의 인생 다큐멘터리 두편을 소개하며 꼭지를 마쳤다. 이 또한 앞선 시리즈와는 다른 선택이었다.
=아끼는 물건으로 본인을 표현했으면 좋겠어서 애장품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했는데 다들 일과 관련된 물건을 가져왔더라. 그분들을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의도로 부탁드린 건데, 역시 다들 진짜 영화 일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다. (웃음) 그리고 ‘이 작품 한번 보면 다큐멘터리가 좋아질걸?’ 하는 마음으로 각자 영화 두편씩 골라달라고 했다. 이 또한 다큐멘터리계 지망생을 포함한 독자들에게 팁을 준다는 생각으로 마련한 코너다.
-양희 작가라면 어떤 애장품, 추천작을 골랐을까.
=필사노트를 고르고 싶다. 학생 때부터 좋아하는 글귀를 옮겨 적었다. <다큐하는 마음>에도 노트에 적어둔 다양한 문구들을 넣었다. 책, 전시, 영화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자극을 넣고 싶어서 인용을 많이 했는데, 반 이상을 덜어낸 게 지금의 결과물이다. (웃음) 인생 다큐멘터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늘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작품을 얘기하는 편이다. <나의 문어 선생님>과 <밥정>이 무척 좋았다.
-책을 완성해 출간한 소감이 듣고 싶다.
=마치 다큐멘터리 한편이 개봉한 느낌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처럼 소박하게, 진심을 담아서 만들었다. 그래서 아련하기도 하다. 마음 쓸 줄 아는 눈 밝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다큐하는 마음이 세상에 필요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그리고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더 많이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