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소리도 없이'의 선택 없는 결과에 대하여
2020-10-27
글 : 이용철 (영화평론가)
모든 달걀이 닭이 되지는 못한다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의정 감독이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의도적으로 인용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다리를 저는 창복(유재명)과 어수룩하고 무기력한 태인(유아인)을 보자마자 이청준이 내가 태어날 무렵에 쓴 소설을 떠올렸다. 이청준이 은유적으로 쓴 제목을 그들은 육체에 그대로 뒤집어쓴 채로 스크린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청준의 인물이 지식인으로서 과거의 정신적 상처를 고도의 지적인 행위를 빌려 드러내고 치유하려고 애쓰는 것과 비교해, 과거의 역사를 육체 위로 새겨둔 창복과 태인은 현실의 굴레 아래 사는 노동자다. 홍의정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데뷔작에서 눈길을 준 대상은 수십 년 전, 혹은 현재의 지식인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매일 매일 살려고 버티는 하층민이다.

창복과 태인은 범죄자이면서 노동자다. <소리도 없이>에서 범죄는 분업화돼 실행된다. 머리를 짜 기획하는 자가 있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가 있으며, 성과의 평가에 따라 누군가를 처치하는 자도 있다. 직업인으로서 그들은 여러 단계를 하나로 싸잡아 범죄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창복과 태인은 끝 단계에 끼어들어 현장 채비와 뒤처리를 맡는다. 머리를 망치로 때리거나 목에 칼을 긋는 일은 하지 않지만, 피를 닦고 시신을 땅에 묻어야 한다. 창복이 자기 일을 성실한 노동으로 단장하고자 끌어들이는 건 종교다. 시신을 다룰 때는 동양식 전통을 흉내내고, 죽은 자와 자신의 미화를 모색할 때는 서양 종교에 고개를 숙인다. 실제 구원은 별개의 문제다. 기도 한번으로 죄의식을 희석할 수 있으니 이보다 아름답고 좋은 방책은 없다. 이건 그가 고안해낸 특효가 아니라 한국의 종교기관이 효험을 홍보해 거둔 결실이다.

창복은 오랫동안 범죄 조직의 밥을 먹은 듯하고, 태인은 창복이 어쩌다 돌봐주게 된 인물 같다. 평소 그들은 시골 시장을 돌며 달걀을 판다. 그게 위장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창복이 범죄보다 노동에 더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끼니로 끓인 라면에 태인이 달걀 3개를 넣으려고 하자 창복이 1개를 슬며시 달걀판에 원위치시키는 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얼핏 유사 가족처럼 보이지만 창복은 일과 사생활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일을 마치면 창복은 언제나 태인을 외딴 시골집 입구에 내려주고 떠난다. 거기엔 할머니가 앉아 무언가를 파는데, 태인은 창복의 말을 듣고 그녀에게 달걀 5개를 준 다음 집으로 자전거를 몬다. <병신과 머저리>에서 형제 사이에 끼어든 결혼과 가족의 이슈는 태인에게 먼 세상 이야기다.

태인은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에 나오는 범죄자가 아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고독한 킬러의 삶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짐승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집에서 피로에 지쳐 자는 그는 그냥 야만의 존재다. 창복과 태인처럼, 앞서 개봉한 <담보>의 두 남자도 웬 소녀와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맺는다. 유괴 아닌 유괴로 소녀를 키운 두석(성동일)은 갑자기 헌신적인 삶으로 뛰어드는데, 우여곡절 끝에 그의 삶을 보상해주는 한마디는 ‘아빠’다. 성장한 아이가 마침내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그가 흘리는 감동의 눈물 속에 모든 갈등은 녹아버린다. <소리도 없이>는 그게 거짓 같다고 말한다.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는 창복이 어떤 가족을 꾸리는지 나는 모르며, 태인과 초희(문승아)라는 소녀 사이의 행복한 관계는 언감생심이다.

선택했다는 착각

유아인이 그간 맡은 인물은 대개 가족 관계가 좋지 않다. <좋지 아니한가> 외에 모든 영화가 그러하다. 카바레와 장터를 돌며 탭댄스를 추는 꼽추 아버지와 지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가 곁에 있어주는 <완득이>와 <깡철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근래 나온 세편의 영화, <버닝> <#살아있다> <소리도 없이>에서 유아인의 인물은 집에 문득 남겨진다. 아버지에 해당하는 인물이 갑자기 현실 너머로 떠나자, 그냥저냥 현실을 통과해온 세 유아인들은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다. 그들 중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살아온 태인이 제일 곤란을 겪는다. 그동안 창복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던 태인은 창복의 부재로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초희를 범죄 집단에서 빼내는 태인의 행동은 얼핏 그의 첫번째 선택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반응에 가깝다. 초희는 야만의 존재를 인간쪽으로 조금씩 훈련시킨다. 태인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초희는 범죄 집단으로 다시 넘겨질때조차 화를 내지 않는다. 거꾸로, 태인이 되찾으러 왔을 때 소녀는 화를 내는 것으로 벌을 내린다. 즉, 창복이 사라진 후 태인이 초희에게 하는 행동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초희의 결정과 선택이 부른 변화로 보아야 한다. 극중 가장 황홀한 신에서 둘의 관계는 명확해진다. 탈출을 감행한 초희는 결국 태인과 맞닥뜨린다. 둥근 달빛 아래 둘이 마주 선 장면은 <사냥꾼의 밤>(1955)이라는 동화와 <일출>(1927)이라는 리얼리즘 드라마 사이에서 <소리도 없이>가 갈등하며 흔들리는, 진실로 아름다운 시간을 빚는다. 나는 행여 태인이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 가슴 뭉클한 뜻을 품어보지만, 홍의정은 그런 감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태인은 초희가 끄는 대로 다가갈 뿐이다.

초희가 옷걸이에 걸어둔 슈트를 보자 태인은 또다시 선택의 착각에 빠진다. 이 장면은, <사냥꾼의 밤>에서 성직자의 옷을 걸친 범죄자 해리(로버트 미첨)가 벌이는 행동과 오버랩된다. 그는 하느님께 말을 걸고 아이를 구하기라도 하는 양 의젓하게 나선다. 해리처럼 빼입은 태인은 초희의 손을 잡고 보통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이 초희와의 관계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여전히 착각하는 중이다. <소리도 없이>의 잔혹함은 태인의 행동이 그의 선택과 무관함을 뚜렷이 드러내는데 있다. 마법에 걸린 듯 초희를 현실로 데려온 그는 모든 선택이 초희의 몫이었음을 목격한다(보면서도 알지는 못한다). 소녀는 아버지가 3대 독자인 동생을 먼저 구한 뒤 유괴범에게 자기 몫으로 줄 돈을 깎았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 똑똑하고 복도 많은 초희는 야박하나 멀쩡한 아버지와, 괴물의 순진한 표정을 짓고 선 아버지의 대용품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병신과 머저리>의 형제는 작가에게 병신과 머저리로 보일지 몰라도 각각 의사와 화가로 번듯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형은 근래 의료사고로 상처를 받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형제는 각기 소설의 결말에 참여해 과거에 해석을 가하고 변용(變容)마저 꿈꾼다. 현실도 모자라 픽션까지 구축(構築)하는 형제와 반대로, 실제 병신과 머저리인 창복과 태인에겐 허구의 세계인 영화 속에서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성실한 노동자를 기도했던 창복은 영문도 모른 채 죽고(그의 머리 뒤로 ‘편안히 하늘로’란 문구가 보인다), 창복의 말을 따르던 태인은 난데없는 봉변 앞에 도망친다. 태인은 재킷을 벗어던진다. 유아인의 데뷔작 제목처럼 그가 그런 옷을 입을 내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달걀이 닭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닭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달걀이 증명한다. 닭은 꿈의 결과일까, 선택의 결과일까. <소리도 없이>는 꿈도 선택도 가져보지 못한 어떤 남자(들)의 이야기다. 기실 그(들)가 닮은 인물은, <병신과 머저리>의 형이 그토록 지우려고 싸우는 밑바닥 존재 관모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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