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근본적인 모멸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임신한 엄마의 배를 누군가 허락 없이 만지던 때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엄마의 결혼식에서 엄마의 아버지가 아빠에게 엄마를 ‘넘겨줄’ 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할머니 집에 찾아가면 엄마와 큰엄마들이 허리가 부러지게 일하고는 작은 상에서 따로 밥을 먹을 때도 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래들 사이에 어떤 여자애가 ‘걸레’라는 소문이 돌고, 옆 학교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카메라가 발견되고, 내 친구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길에서 할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내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성추행을 당했을 때도 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도, 언니도, 나도, 나의 친구도, 나의 친구의 친구도, 삶의 어떤 순간에는 분명 인간조차도 되지 못했다.
인류학자 김현경의 말처럼 사회 속에서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인간이 타고난 본질적 특성이 아니라 서로의 수행과 연기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면, 대체 나의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의 인간다움이란 순간순간 사라지는, 그런 부실한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와 나의 언니와 나의 엄마와 나의 친구와 나의 친구의 친구들은 인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우리는 대단한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자신의 몸이 불시에 다른 생명체에게 침탈당할 수 있다는 공포는 ‘임신 가능한 여성’이라는 한 집단만이 실감하는 공포라서, 영화도 소설도 드라마도 종종 남성에게 임신을 시킨다. 영화 <에이리언>이 나온게 대체 언제인가. 낙태를 반대하는 남성 대법원장의 몸에 수술로 태아를 착상시키는 스탠리 포틴저의 소설 <제4의 절차>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이 1995년이다. 그러고도 24년이 지난 2019년, 드라마 <블랙리스트> 시즌7에서는 동일한 발상의 에피소드가 또 등장한다. 이 이야기를 언제까지 해야 할까?
태아를 너무 사랑해서- 여성에게 의료적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여성에게 전과를 붙이고 싶은 사람들은 미혼모와 아동학대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을까. 아이를 낳고 경력이 단절되는 여성의 삶을 뭐라고 생각할까. 낙태죄로 기소된 여성들의 대부분이 태아의 부가 고발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태아의 부는 같은 죄를 짓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슨 생각을 할까. 이 모든 것이 여성을 협박하고 벌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사람 취급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모멸감은 하루하루 선명하게 새겨진다. 법안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땐 이런 말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봐라 내가 애를 낳나 술 사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