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애비규환'은 어떻게 악역과 갈등 없이 이야기를 봉합했나
2020-11-24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수많은 ‘애비들’을 거친 모험의 종착지는

비교적 저예산인 독립영화에 (구)SM 아이돌이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면 감독이 덕후였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영화 중반, 배우가 싫어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오이를 김밥에서 빼주는 장면이 무심하게 나오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시간을 빼앗기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그럴싸하다고 다 그렇다는 법도 없고 맞다고 해서 별 의미는 없다. 어차피 우리에겐 당시 상황과 관련된 정보가 다 있지도 않다.

그래도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돌 활동 중에 생성된 팬덤에 속한 사람들이 영화감독을 시작해 이들을 캐스팅한다면 그 아이돌의 배우 경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그 아이돌이 얼마 전까지 배우들에게 아주 최선의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회사 소속이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익숙한 갈등과 소동을 벗어나

어디로건 빠질 수 있는 일반론은 멀리 치우고 최하나 감독의 <애비규환>과 주연배우 정수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수정이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 중 <애비규환>처럼 배우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 작품은 없다. 이전 출연작들은 정수정의 아이돌 이미지를 다소 기계적으로 소비했다. 아름답고, 부티나고, 얼음공주이고, 영어를 한다. 주로 한국 드라마에서 한국어로 대사를 읊는 배우의 영어 구사력(한국 사람들은 구사력 대신 버터 발음을 먼저 본다)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개성 중 하나로 여겨진다면 그 배우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쓰였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연기 스타일이 특별히 바뀐 건 아니다. 정수정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무뚝뚝하고 건방지고 차가운 표정이다. 누구에게든 지지 않고 톡톡 쏘아대는 말투도 여전하다. 단지 이 익숙한 모습과 습관이 고등학생 제자와 섹스를 하고 덜컥 임신해버린 대학생 캐릭터에 이식된다면 같은 스타일로 연기하는 같은 배우라고 해도 다른 식으로 보게 된다. 배우가 다르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 개성이 캐릭터에게 여분의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리고 그 개성의 상당 부분은 아이돌 시절부터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것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잘 쓰였을 뿐이다.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애비규환>은 임신한 대학생이 친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이혼한 뒤 재혼해서 주인공 토일(정수정)은 친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토일은 아버지와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 탐색은 더 까다롭다. 토일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는 탐정이다. 영화가 조금 더 진행되면 토일의 이야기에 세명 이상의 아버지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일이 대구로 내려가 찾는 친아버지 환규(이해영), 지금까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태효(최덕문), 그리고 지금 토일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아버지인 호훈(신재휘). 토일이 대구로 내려가 만난 수많은 아버지 용의자들도 빼먹을 수는 없다. 그리고 토일이 이 영화에서 겪는 사건의 대부분은 이들의 책임 또는 무책임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이 영화에 어떤 의미에서건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악의가 있는 사람들도 없고 악의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없다. 단지 다들 다양한 방식으로 어리석고 소통이 잘되지 않을 뿐이다. 무책임하게 보이는 행동도 다시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엇보다 토일과 호훈의 가족엔 한국 문화권 가부장제도의 익숙한 억압을 답습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는 한국 관객에게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다. 영화는 일부러 이런 억압 대부분을 제거하고 나머지 재료만으로 가족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탈출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것들을 매번 다루다간 끝없는 동어반복에 빠지게 될 테니까.

비루한 삶은 결국 비루한 예술을 만든다. 어떤 때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 무한반복되는 현실을 외면할 필요가 있다. 그건 멜로드라마의 관습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K-드라마에서라면 호훈의 부모는 토일에게 적대적이었을 것이고 이 갑작스러운 임신이 아들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들은 별다른 충격도 받지 않고 걱정도 없다. 코미디용으로 만들어진 괴짜 캐릭터여서이기도 하지만 굳이 익숙한 갈등과 소동을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험의 끝이 다다른 곳은

하지만 그 비루함을 다 털어내고 무시해도 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는 남는다. 생물학적 부모와 아이들이 있고 그 상태가 깨지거나 붕괴되지 않는 정상가족에 대한 집착. 그런 정상가족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 단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토일의 캐릭터 등에 업혀 끊임없이 불안하게 진동한다. 하나의 고민이 캐릭터를 일관성 있게 억압하는 일은 없다. 토일은 영화 내내 논리적으로 충동적이다. 아이를 낳으려는 결정,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그리 똑똑하지 않은 남자애와 결혼하려는 결정, 친아버지를 찾으려는 결정은 종종 서로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자체 논리를 갖고 있고 이들은 영화 내내 충돌하면서 화합 지점을 찾는다. 충돌은 대부분 대화의 형태를 취한다.

그 때문에 영화는 종종 연극처럼 보인다. 녹화된 연극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다. 대사의 비중이 크고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며 배우들은 긴 시간 동안 고정된 무대에 머문다는 뜻이다. 특히 후반의 배드민턴 장에서 벌어진 긴 소동을 보라. 여기서 영화적인 성격은 연극적인 성격과 경쾌한 조화를 이룬다. 배드민턴 장에서 벌어지는 소동의 무심한 듯 길게 이어지며 캐릭터를 오가는 롱테이크를 보라. 연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연극에서는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는 장면이다.

그 긴 장면을 통해 <애비규환>은 일반적인 한국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길을 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그 정리된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타협과 검증을 거친 뒤 최종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엔 상하 지위를 이용한 강요와 그에 맞서는 도전이 없다. 역시 한국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한국성을 고수하다가는 러닝타임이 끝날 때까지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테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한편이라도 더 만들어야 그 지겨운 한국성에 약간의 다양성이라도 심어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의 해피엔딩은 그 과정만큼 논리적이다. 이 논리성은 가족주의의 관습적인 결론이나 기계적인 냉소주의나 반발에 도달하지 않기에 더 생산적이다. 영화는 이 모든 ‘애비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공평하게 긍정한다면 이들의 절대적인 위치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완벽한 선택, 완벽한 가족에 대한 집착은 모두 사라지고 토일은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한 삶을 모험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그리고 수많은 ‘애비들’을 거친 모험은 자연스럽게 딸과 어머니의 관계에 멈추고 거기서 완성된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고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단지 그동안 아버지들의 그림자가 추리소설의 가짜 단서처럼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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