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이사를 했다. 전날까지 정신없이 바빴던 기억이 난다. 한창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새집에 밥솥 좀 갖다 놔.”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원래 그렇게 하는 거라고. 새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밥솥을 가져다놓는 거라고. 그래야 앞으로 그 집에서 잘 살게 된다고. 나는 현세적인 인간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미신을 무시하지 못하는 편이다. 잘 살 수 있게 해주는 주문이라는데, 나를 보호해준다는데, 굳이 적극적으로 거부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동시에 나는 게으른 사람이기도 해서, 그걸 일일이 다 지키고 살지는 못한다. 나는 엄마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후, 결국 새집에 밥솥을 갖다두지 않았다. 이사 전날 잠자리에 들며 ‘햇반이라도 갖다둘걸 그랬나’ 하고 아주 살짝 후회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이사 후, 또 정신없이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팥떡이 들어 있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랬다. 원래는 팥죽을 먹어야 하는데, 내게 팥죽을 만들 시간이 있을 리가 없고, 사먹으라고 해도 잊어버릴 게 뻔하니 대신 팥떡을 보낸다고. 나는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이틀간 아침으로 팥떡을 먹었다. 엄마의 바람대로, 그리고 전통의 의식을 지키며, 집에 깃든 귀신들이 멀리멀리 물러나 내 인생을 훼방놓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한 가지 고백하자면 우리 식구들은 성당에 다닌다. 나름대로, 신실하다. 특히 엄마는 아주 성실하고 굳건한 신도이다. 내 생각에 하느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엄마만큼은 구원하실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사 온 동네를 두고 ‘기운이 좋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엄마의 그런 면모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주 놀려먹지만 사실 나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일단 이사를 하면 초등학생 때부터 방에 두었던 성모마리아상을 둘 가장 좋은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라는 것은, 그러니까 집 안 혹은 방 안을 모두 굽어볼 수 있을 만한 자리다. 성모마리아는 바로 그 자리에 서서, 내가 팥떡을 먹고, 문지방을 절대 밟지 않고, 인터넷으로 별자리 운세와 12간지 운세를 검색하는 걸 지켜본다. 나는 이런 미신에 대한 소소한 믿음과 간헐적인 기도의 힘으로 집에 보호막을 친다. 사는 내내 별일 없기를, 누구의 원한 근처에도 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원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나도 모르는 사이 원한을 품은 존재를 우연히 마주쳤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게 과연 내 힘과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일까? 영화 <주온>을 보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가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그렇다. 무력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무섭다. 동시에 피곤하다. 정말로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상당히 피로한데, 주온에 붙들린 이들이 다 죽거나 실종되기 때문이다. 단 한명도 빠짐없이.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도 못한다. 그저 두려워하고,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다가 끝내 붙들린다.
그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진다. 귀신은 귀신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그들은 귀신이 되고, 또 귀신이 되고, 귀신이 된다. 어마어마한 원한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기력하다. 반대로 원한이 가득한 그 영혼, 주온은 매우 끈질기고 지독하다. 사람들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그들의 뒤를 쫓는다. 주온은 집요하다는 면에서 <엑소시스트>의 악마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주온이 조금 더 기괴하게 느껴진다. 적어도 악마에게서는 어떤 목표가 느껴진다. 소녀의 몸을 차지하고, 신의 가호를 받는 이들을 해치겠다는 욕망. 복수심, 증오, 악의 순수한 본성. 어떤 강렬한 감정이 느껴진다. 주온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원한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주온을 물리치는 장면, 어떤 행동이 등장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장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수를 뿌리고, 기도를 하고, 팥죽을 먹고, 문지방을 아무리 피해 다녀봤자, 그들의 원한을 잠재울 수는 없는 거니까. 애초, 피할 수 없는 거니까.
돌이켜보면 이런 이야기들은 늘 도처에 있었다. 대체로 미신은 그런 악령들과 인간들이 마주치지 못하게 하거나, 원한을 사지 않는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 일종의 안내문 같다고 할까. 귀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거나, 반대로 쫓아내거나, 숨어 있게 하거나. 그리고 만일, 정말로 원혼을 만난다면 그것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장화홍련전>이 그렇지 않은가. 어린 시절 나는 장화와 홍련을 만난 사또들, 그러니까 공포에 질려 죽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장화와 홍련의 원한에만 심하게 감정이입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 나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섬뜩한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건 자신들의 원한을 풀어줄 때까지 무고한 사람들을 계속 죽이고 죽이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사또들이 살던 집을 상상하면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원혼이 떠다니고 있을까.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죽은 사람들. 그들의 비명을 떠올리면, 귀신 이야기라는 것이 사실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집이 지금도 있다면 어떨까. 누구도 제정신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장화홍련전>은 지금 내 상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주 유명한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가. 심장이 튼튼한 사또가 부임했으니까. 그는 사건을 해결하고 장화와 홍련의 원한을 풀어준다. 그래서 더이상 누구도 죽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는 죽어나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도 장화, 홍련과 함께 사라졌을까?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억울함을 뒤로하고 그 집을 떠나는 게 가능했을까?
<주온>의 주인공은 결국 떠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다. 주온이 다가올 때마다, 끌려갈 때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싫어!”라고 외쳤던 사람들. 원하지 않는 고통, 공포, 증오와 억울함. 겹겹이 쌓인 그 마음은 집 안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원한만 남았기 때문에, 풀어줄 방법도 없다. 특별히 뭔가를 갈망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집에 찾아온 사람들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이 집에 들어왔으니, 나와 눈이 마주쳤으니, 너도 우리의 일부가 되라고. 원한의 끝없는 전염. 아무래도 오늘은 팥죽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