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잔칫날' 아버지가 죽은 날, 팔순 잔치에 초대받았다
2020-12-01
글 : 김소미

병실의 어둠 속에서 깨어난 아버지가 잠든 아들의 한쪽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들의 얼굴엔 마저 지우지 못한 하얀 분칠이 남아 있다. 광대 분장을 하고 하루 종일 행사를 뛰던 직업 MC 경만(하준)은 이제 막 아버지의 병상 곁에서 미뤄둔 잠을 청한 참이다. 낮이 되자 경만의 귀여운 동생 경미(소주연)까지 나타나 활기를 돋운다. 아프고 가난하지만 세 식구의 돈독한 사랑에는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풍경에 불안이 스밀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버린다. 급하게 장례비를 마련해야 할 처지에 빚을 갚으라는 고약한 친척까지 등장하면서 남매는 궁지에 몰린다.

경만은 고심 끝에 장례식장에 경미를 남겨두고 당일치기 지방 행사를 떠나기로 한다. 효심이 지극한 의뢰인 일식(정인기)이 팔순의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경만에게 잔칫날의 마이크를 덥석 맡긴 날. 울어야 하는데 웃겨야 하는 오빠의 애처로움만큼이나 홀로 장례식장에 남아 무력하게 동분서주하는 동생의 서러움도 커져만 간다. 김록경 감독의 <잔칫날>은 두 경조사의 풍경을 묵묵히 대조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이별과 장례, 그리고 우애를 품어나간다.

영화 속 남매의 모습은 조금 비현실적인 데가 있다. 성인이 된 남매가 줄곧 살갑게 정을 나누고, 종종 심약해 보일 만큼 선한 얼굴로 일관해서다. 착한 사람을 시험에 빠트리고 서로를 구원하게 만드는 영화의 고행길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고결한 구석을 들춰내기 위함 같다. 한국 문화의 지리멸렬한 세부를 재현하는 현실 묘사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잔칫날>은 얼핏 우화적인 수난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고전적인 구도임이 분명하나 가까이서 보면 그 안을 채우는 디테일들이 뾰족하고 풍성해 감정을 오롯이 자극한다는 점 또한 이 영화가 이뤄낸 어려운 성취일 것이다. 이를테면 조문객 접대상에 편육을 놓을지 말지, 금액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같은 선택을 영화는 장면마다 잔인하게 새겨넣는다. 애도 이전에 충격 상태에 가까운 경미에게 상조 직원과 문상객의 면면은 하나같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직원들은 결제를 독촉하고 경만의 친구들은 술판을 펼쳐둔 판국에 말 많은 고모들은 눈물 한 방울 머금지 않고 프로페셔널한 곡소리를 감행해 경미의 혼을 빼놓는다. 오빠가 부재하는데도 결코 상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미의 현실을 묘사하는 장면들 역시 여성 관객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낼 법하다. 민감한 사람들이 감지하는 세상의 악의 없는 무례함이 장례식의 경우에는 어떻게 펼쳐지는지, <잔칫날>은 한편의 일목요연한 매뉴얼처럼 유효한 디테일을 줄줄이 꿰어낸다.

시골 잔칫날에 벌어진 뜻밖의 사고로 오해와 소동이 벌어지는 후반부에선 감정적 위기와 갈등이 안정적으로 고점을 향해 나아간다. 리듬 자체에는 큰 흠결이 없지만 찢어진 경만, 경미 남매를 교차하는 편집이 지속되면서 조금은 기계적인 클라이맥스를 형성한 모양새다. 드라마의 절정보다는 오히려 엉망이 된 상황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마지막 결말부가 더 인상적이다. 악역처럼 보였던 중년 캐릭터들의 반성까지 포용하는 결말이 신뢰를 더한다. 성숙한 대화와 성찰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들의 화학작용이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드물었던 풍경은 아닌지 흥미로운 연상 작용마저 불러낸다. 소시민의 삶을 묘사하는 드라마로서, 통속 안에서도 이상을 제시하는 좋은 예시 중 하나로 남을 대목이다. 장례식의 고비를 넘긴 두 남매가 앞으로는 그나마 부양의 힘겨움으로부터 벗어나리란 묘한 안도감을 품게 만드는 <잔칫날>은 이 퀴퀴한 슬픔을 정직하고 꿋꿋하게 정면 돌파한 또 하나의 동시대 청춘 스케치로 기억될 듯하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영화제 컨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임에도 작품상, 배우상(하준), 관객상, 배급지원상까지 총 4관왕의 영예를 안으며 저력을 과시했다.

CHECK POINT

배우들의 터닝 포인트

하준, 소주연의 쇼케이스로서 <잔칫날>은 두 배우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하다. 여리고 묵묵한 성격이 닮은 두 남매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두 배우의 눈빛은 대사보다 훨씬 많은 감정을 섬세히 전달한다. 아버지의 입관 준비를 지켜보는 후반부의 한 장면이 특히 절절하다.

남다른 디테일

일상사의 핍진성을 길어내는 감각도 탁월하지만, 김록경 감독은 종종 연출 대신 현실을 빌려오는 현명함도 발휘한다.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던 식장을 촬영 장소로 섭외했고, 삼천포에서 열리는 팔순 잔치에는 실제 마을 어르신을 초대해 허구라면 나올 수 없는 리얼리티를 창출해냈다.

주목할 이름, 김록경

<파수꾼> <황해> 등 이름난 영화들에서 단역 생활을 하며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한 김록경 감독은 <잔칫날>을 통해 세심한 스토리텔러의 재능과 연기 연출력을 모두 입증했다. 그는 올해 8월 개봉해 비평적 찬사를 받은 오정석 감독의 <여름날>에서 주연배우로도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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