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의 열 번째 앨범 《Better》는 망설이지 않는다. 첫곡 <Better>는 단 네 박자 여유를 준 뒤 확신에 찬 보아의 목소리를 묵직하게 떨어뜨린다. 영국 가수 아와의 <Like I Do>를 샘플링한 기본 골조 위로, 보아와 함께 지금의 SM 기반을 만든 작곡가 유영진의 익숙한 노랫말과 멜로디가 펼쳐진다. 이 기조는 다음 곡 <Temptaions>로 이어지며 ‘데뷔 20년차, SM 이사의 무게란 이런 것인가?’라고 섣불리 결론내리려는 찰나, 세 번째 트랙 <Cloud>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여리게 불어온다. 보아가 직접 쓴 팝 R&B 트랙인 이 곡을 기점으로, 앨범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앨범은 꽉 찬 11곡의 직구를 던진다. 요령부리지 않는 성실함에 ‘이게 보아지’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디테일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본다. 그제야 보아의 보컬이 귀에 들어온다. 우리가 20년 동안 들어오며 이제는 다 알아 흥미 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 목소리 말이다. 보아는 《Better》 안의 그 어떤 곡에서도 같은 보컬을 들려주지 않는다. R&B, 재즈, 로-파이, 댄스팝, 발라드 등 장르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는 목소리는 이 앨범을 듣는 가장 큰 재미이자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고 싶지 않다는 보아의 굳은 다짐처럼 들려온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같은 일을 20년 동안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온라인에 공개 중인 보아의 리얼리티 콘텐츠 ‘Nobody Talks To BoA-모두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이제 (히트곡이 아니라) 작품을 남겨가는 거지.” 그 말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20년지기 동료 안무가 심재원과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보아라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2000년,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린 달라요, 갈 수 없는 세계는 없죠”(<ID; Peace B>)라고 노래하던 소녀가 이만큼이나 자랐다. 성장과 완성도, 멈추지 않는 열정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좋은 K팝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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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민 《Never Gonna Dance Again: Act 2-The 3rd Album》
성별도 데뷔 시기도 다르지만 보아와 태민은 보면 볼수록 묘하게 닮았다. 특히 이들이 2020년 각각 발표한 열 번째와 세 번째 정규 앨범을 듣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자연스레 확신으로 변한다. 춤도, 노래도, 무대를 향한 욕망도, 이들의 앨범과 무대는 인고의 노력과 의지가 깎고 다듬어 만들어낸 K팝의 한 정점이다. 장인정신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다.
엄정화 《The Cloud Dream of the Nine》
한국을 대표하는 댄스 가수 엄정화가 한국 대중음악계에 남긴 흔적은 90년대가 낳은 그의 숱한 히트곡뿐만이 아닌 메이저 신의 전자음악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접근이기도 하다. 그에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트로피를 안긴 《Prestige》도 훌륭하지만 3년 전 발표한 10집 《The Cloud Dream of the Nine》은 이대로 잊히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