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실연의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새로운 상대가 생겼다는 연인 요하네스(야코프 마첸츠)에게 “날 떠나면 널 죽여야 해”라고 응수한다. 살기 어린 말을 내뱉으면서도 운디네의 얼굴은 당연한 운명을 따르는 양 차분하다. 요하네스와의 이별 후 박물관 관광 가이드로 일하던 운디네는 우연히 만난 산업잠수사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와 금세 사랑에 빠진다. 운디네는 크리스토프를 따라 물속을 유영하고,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에게 도시 개발의 역사를 배우면서 박물관과 호수를 오가는 신비로운 만남이 교차된다.
이들의 교류는 티없이 순정적이고 아름다운 동시에 어딘가 비현실적인 기운을 풍긴다. 그런 위태로움은 길을 걷던 두 사람이 요하네스 커플과 마주치고 운디네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장면을 통해 결정적으로 심화된다. 이윽고 운디네가 크리스토프와 닮은 잠수부 조각상을 떨어트려 조각상의 다리 한쪽이 부러지면서 비극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운디네는 베를린에 사는 역사학자인 동시에 19세기 동화의 예언에 뿌리내린 신화적 존재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운디네’는 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으로,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작가 프리드리히 데 라 모테푸케가 이를 구체화했다. 죽음을 담보로 운디네와 영원을 약속했던 남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변해버리는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운디네는 실연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힘든 운명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운디네 설화의 정념은 그대로 가져오되 운디네의 강력한 힘과 주체적인 면모를 부각해 현대적인 뉘앙스를 새롭게 유도했다.
<트랜짓>과 마찬가지로 <운디네>는 사실적인 화면 위로 리얼리티를 유유히 흐트러뜨리는 방식을 취한다. <트랜짓>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학살을 동시대 난민 문제로 치환해 시공을 모호하게 만든 것처럼, 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는 <운디네>에서 운디네는 여전히 신화적 힘을 갖고 있다. 운디네가 제 나름대로 요하네스에게 복수하고 크리스토프를 구원하는 과정은 일견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수부인 크리스토프가 물속에서 만나는 거대한 메기와 같이 운디네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강력한 마술성을 지니는 반면, 그녀의 말과 관심은 재개발로 몸살을 앓는 적나라한 현실의 풍경을 가리킨다.
크리스토프를 만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고 교외 바깥으로 달려나가는 운디네의 모습이 도시에서 박탈당한 제자리를 찾아가는 정령의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1989년까지 동서간 장벽이 존재하는 도시였던 베를린은 이제 거침없는 재개발 속에서 조금씩 옛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내가 속한 나라> <옐라> <바바라> <피닉스> 등을 통해 꾸준히 역사적 조각을 질료 삼았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운디네>의 사랑 이야기 속에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는 도시의 숙명과 소음을 절실한 심정으로 담아냈다.
영화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마술적 리듬을 형성해나가며 끝내 관객을 사로잡는다. 일상적 묘사와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사랑, 불안, 기만, 분노, 상실감과 같은 심연의 감정을 건져올리는데, 이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파열의 반복이다. 거대한 수조가 깨어지는 사고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삶은 이후 작은 사물들의 붕괴가 연쇄 작용을 이루며 불길한 예감을 남긴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깨어지는 건 사물만이 아니다. 잔잔한 표면 아래 깊고 웅장한 심연을 지닌 호수처럼 페촐트의 <운디네>는 뛰어난 상징과 유려한 리듬, 그리고 오랜 여운으로 기억된다. 망명지를 배회하며 생존의 위협 속에서 헤어져야 했던 <트랜짓>의 두 남녀가 역사의 반복 끝에 <운디네>에서 재회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트랜짓>은 물론 페촐트 감독의 전작과 함께 볼 때 더욱 풍부한 연상을 낳는 작품이다.
CHECK POINT
베를린의 주역들
<옐라> <바바라> <트랜짓> <운디네> 등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단골 손님인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바바라>로 은곰상(감독상)과 저널리스트 특별상을, <운디네>로 국제평론가상을 받았고 배우 파울라 베어는 <운디네>로 생애 첫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예고했다.
올해의 커플
연인의 사랑이 역사가 되고, 역사의 흐름이 곧 연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배우 파울라 베어와 프란츠 로고스키는 페촐트 감독의 두 영화, <트랜짓>과 <운디네>를 통해 비극적인 운명에 휩쓸리는 두 남녀를 연달아 연기하며 잊지 못할 애틋한 눈빛을 각인시켰다.
바흐의 선율
별도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없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 BWV 974를 줄기차게 반복하는 <운디네>는 그 느릿하고 쓸쓸한 선율에 힘입어 현실의 중력을 얼마간 느슨히 풀어헤치고 설화의 세계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