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스른 낯선 전화, 이후 밝혀지는 충격적인 살인사건의 진실. 이충현 감독의 <콜>은 시간을 다루는 장르적인 특징과 시대상이 조화를 이루는 스릴러 영화다. 서로 다른 시공간이 오직 전화로만 연결된다는 <콜>의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서스펜스를 느끼게 만드는 장르적 제약조건으로 활용된다. 플롯의 전개와 긴장감 넘치는 카메라 앵글, 속도감 넘치는 편집을 통해 인물의 감정과 관객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영화인 것. 여기 한 가지 요소가 빠졌다. 바로 미술이다. <콜>의 인물들, 현재 시점의 서연(박신혜)과 20년 전 인물인 영숙(전종서)은 같은 '집'에 머물고 있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과 시대상이 미술을 통해 확실한 구분점을 지녀야 했다. 이 영화의 미술을 책임진 배정윤 미술감독은 <국가부도의 날>부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콜>에 이르기까지 최근 1990년대 배경의 영화 미술을 책임져왔다. <국가 부도의 날>의 철저한 증권가 배경 고증 장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사무실 속 CRT 모니터와 서류 뭉치 등 공간과 다양한 소품 배치 등이 모두 배정윤 미술감독의 손끝에서 탄생한 디테일이다. 그는 또 아트디렉터로서 봉준호 감독, 이하준 미술감독과 함께 <옥자>에 참여해 산을 깎아 미자의 집을 만들고 슈퍼돼지 실험실도 만들어낸 바 있다. <콜>을 볼 때 시대를 잘 잘 몰랐던, 알고 보면 더 흥미진진한 장르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영화 속 숨은 장치에 대해 배정윤 미술감독이 친절한 해설서를 보내왔다.
영숙의 집 지하실 입구는 왜 2층에서 시작되나
과거의 인물이자 무시무시한 살인마 영숙은 극중 신엄마(이엘)와의 어떤 갈등 때문에 지하실에 갇히게 되는데 이 공간의 구조가 독특하다. 보통의 지하실 입구는 1층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구조가 상식적이지만 이 영화의 집은 지하실 입구가 2층에 위치해 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의 형태에 대해서는 사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직선으로 쭉 뻗은 깊이감에서 오는 압도감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충현 감독이 시나리오에서 의도했던 공간 구조는 다락방이었다고 한다. "1층 부엌에서부터 미로 같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숨겨진 다락같은 공간. 그런데 실제로 시공하는 문제와 로케이션과 연결감 때문에” 지금의 지하실 설정으로 바꿨다. 집 구조를 복잡하게 보이게 하고 싶었던 의도도 있었다고. 영화 속 계단과 지하실을 떠올리면 유명한 한국영화가 꽤 많고 또 최근에는 <기생충>이 있었지만 <콜> 제작진은 영화를 준비할때까지만 해도 기생충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배정윤 미술감독에 따르면, 애초 의도는 다락방이었기 때문에, “가장 많이 참고했던 영화는 <유전>이었다”고.
서태지 팬클럽의 협조로 완성된 1990년대 고증
<콜>이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의 시대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재미있게 활용한 요소는 바로 ‘서태지’라는 문화 아이콘이다. 극중 서태지와 관련된 수많은 이미지, 소품이 등장하는데 서태지 팬클럽으로부터 “그때 당시의 잡지나 포스터를 빌려서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촬영했다고” 한다. 미술팀원 중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 시절과 ‘컴백홈’ 시절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대도 있었다고. 영숙의 다이어리도 시대상을 잘 구현한 소품 중 하나다. 1990년대 당시에는 플라스틱 커버로 된 다이어리가 유행이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을 오려 붙여서 표지로 만들기도 했다.”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배정윤 미술감독의 답변에 백퍼센트 공감할 것이다.
영숙이 먹던 페리카나 치킨, 시나리오에서는 0000였다?
원래 <콜>의 시나리오에서는 영숙이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으면서 입 주변에 케찹을 묻히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영숙이 먹는 음식에서도 감독님은 뭔가 특징을 보여주고 싶어하셨다. 라이스 버거처럼 관객이 특정한 시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먹거리를 설정했었다. 그래서 작업 초반에는 과거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롯데리아 매장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제작진 중에 누군가 페리카나 치킨 아이디어를 냈다. 온국민이 다 아는 상징적인 노래를 갖고 있는 브랜드이지 않나. 정확하게 고증에 맞는 연도는 아니지만, 상징적인 면에서 감독님이 맘에 들어 하셨다.” 당시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치킨집과 옷가게도 제작진이 직접 찾아냈다고 한다. 옷가게의 간판은 실제 촬영한 곳의 간판과 동일한 것은 아니고 영화의 느낌에 맞춰서 후반작업 때 CG로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