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차인표의 '차인표', “오랜 부자유 속에서 나를 꺼내고 싶었다”
2021-01-12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영화계에서 더이상 잃을 게 없다.” <차인표>로 재도약의 출사표를 내민 배우 차인표의 심정은 이러했다. <타워>(2012), <감기>(2013) 이후 잠잠했던 그에게 <차인표>는 “지난 6년간 유일하게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다. 그사이 차인표는 대한민국에서 아는 사람은 너무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배우가 됐다. 밀레니얼 세대를 기점으로 확연히 갈라지는 그의 인지도는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1994)에서 검지를 흔들고 색소폰을 불던 백마 탄 왕자와, ‘분노의 양치질’ 밈 시리즈(드라마 <홍콩 익스프레스>에서 악역 연기에 도전한 차인표의 분노 연기가 SNS에서 개그 코드로 활용됐다)의 주인공이 표상하는 이미지만큼이나 격차가 크다.

재기를 위해 고심하던 배우 차인표가 급작스러운 붕괴 사고로 여자고등학교의 샤워실에 갇히는 이야기인 <차인표>에서 그는 나체 상태로 어둠 속에 누워서도 “반듯함, 강인함, 젠틀함”을 사수하기 위해 애쓴다. 청년기 이후로 줄곧 “애국 청년, 바른 생활 사나이”로 불렸던 전설의 TV 스타가 넷플릭스의 도마 위에 자신을 올려 잘근잘근 조각내는 이야기. <차인표>의 웃기고 측은한 영화적 장막 뒤편에서 만난 배우 차인표는 영화보다 훨씬 풍성하고 선명한 자기 통찰로 즐거움을 안겼다. 그와 나눈 ‘진정성’에 관한 유쾌하고 적나라한 대화를 전한다.

-2015년에 처음 작품을 제안받고 고사했다가 2019년에 다시 착수했다. 그사이 어떤 일이 있었나.

=2015년에 미국 스카이댄스 제작사에서 영화 <라이프>(2017)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몇달에 걸쳐 오디션을 보고 마지막에 감독과 화상 인터뷰까지 마쳤지만 결국 탈락했다. 그때 내 나이가 오십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흥분에 차 있었다. 공동제작이지만 저예산영화를 제작도 해보고, 다큐멘터리 <옹알스> 연출도 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년간 이도 저도 될 듯 말 듯 안되고 점점 내 자리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더라. 어느새 내 마음이 꼭 <차인표> 속 차인표 같아져 있었다.

-자기 자신이 영화의 소재 및 주제가 되는 상황에서 배우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 대한 우려는 없었는지 궁금하다.

=창작자가 자기만의 고집과 고통을 안고 준비했고, 심지어 몇년을 묵히고 기다린 프로젝트인데 나에 대한 영화라고 해서 내가 무언가 제안할 권리는 없다고 느꼈다. 아예 작품 자체를 하질 말든가, 할 거면 감독이 해석한 차인표대로 가려고 했다. 딱 하나! “이건 정말 아닌데요”라고 말한 게 있긴 한데, 원래 시나리오에는 차인표가 정치하고 싶어서 공천 받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설정이 있었다. (절박하게) 나는 정말이지, 정치할 마음은 없다. (일동 웃음) <차인표>에서 KBS 교양 프로그램 <아침마당>이 언급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아침마당>을 포함해 주요 방송 3사 아침 프로그램에서 전부 섭외가 들어오고 있다. 그러니 정치하는 설정이면 어떻게 됐겠나? 나머진 절대 안 건드렸다.

-<아침마당>은 나갈 건가?

=고민 중이다. 보여드릴 게 하도 없어서. 작가님은 최근에 가수 비, 박진영 출연분을 언급하며 섭외 요청을 하셨는데 글쎄. 그분들은 우리나라에서 춤도 손꼽히게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분들인데 난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손가락 흔드는 것 말고는 달리 ‘진정성’을 보여드릴 방법이 없으니…. (웃음)

-고된 연예계 생활을 하며 복잡해진 마음을 다스리려 등산 중 진흙탕에 빠지는 슬랩스틱 장면 이후의 전개가 의외였다. 샤워하러 들어간 고등학교 건물이 붕괴되면서 어둠 속에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갇혀 있는 구간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원래는 잔해 더미에 갇힌 상황에서 더 C급으로 막 나가는 코드들이 있었다. 아이들과 같이 보기 민망한 수준의 코미디인데 최종 편집본에서 빠졌더라. 나로서는 기왕에 찍고 어차피 망가진 거 더 끝까지 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하다. 그래도 뺀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를 지켜주고 싶은 마지막 선이 있었다거나. (웃음)

-코미디 장르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언제부터 생긴걸까.

=내 직업은 대중 연예인이고 대중이 나의 보스다. 이 일은 보스의 상황에 따라서 그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을 맞춰주는 게 아닐까.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들을 웃기고 싶고, 슬프고 어려울 때는 위로해주고 싶다. 그래서 최근 들어 코미디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함께 2시간이라도 웃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호불호가 많이 갈리네. (웃음) 웃는 대신에 주무셨다는 분들도 많고.

-<차인표>에서 차인표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진정성이다. 우문이지만 묻겠다. 차인표에게 진정성이란 뭔가.

=말과 행동, 표현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일치하는 것? 물론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진정성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우스꽝스러워진 인물형이 <차인표>에 나온다. 마냥 코미디는 아니다.

=1993년에 데뷔해서 갑자기 벼락 스타가 된 게 1994년의 일이다. 백마 탄 왕자, 애국 청년,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 수식어가 쭉 따라다니면서 언젠가부터 ‘시청자들이 내게 이런 이미지를 부여했으니 그것에 충실한 게 나의 의무다’라고 훈련하며 살았다. 몸짱 이미지가 부여된 뒤에는 동네 목욕탕을 갈 때도 아저씨들이 “쟤 몸짱인 줄 알았는데 왜 저래?” 하며 실망할까 봐 몸에 신경 썼고, 바른 생활 사나이라는 이미지가 있으니 실제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역 선택을 할 때, 더 넓게는 삶을 살아갈 때 알게 모르게 다 적용됐다.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충실하려던 노력이 결국 나를 갇혀 있게 만든 것이다.

-상대의 기대를 깨지 않고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성격은 성장 환경의 영향인가.

=역지사지를 자주 생각한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과 똑같이 상대방을 대접하라는 기독교 가치와도 비슷하다. 나는 사실 배우를 하기엔 상대방을 너무 신경 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이 불편한 걸 잘 못 견딘다. 적당히 자기 자신에 집중하고 무심해야 매력적이고 이목도 끌 수 있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그대 그리고 나> <왕초> 같은 작품들로 쉼 없이 TV 스타로 활동한 1990년대를 배우 생활에서 어떤 의미로 기억하나.

=폭주 기관차 같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유명해져서 매일 촬영하다가 잠깐 연애하고 군대갔다가 결혼하고 홍보영화 한 30편 찍고 제대했더니, 또 이미 다른 사람들이 유명해져 있고… 그렇게 시간이 휙휙 지나갔다. 벼락 스타가 됐지만 이후엔 늘 부침이 있는 행보를 걸어왔다. 제대 이후 <별은 내 가슴에>에 출연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그대 그리고 나> <왕초>가 잘되어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때 영화를 꽤 찍었는데 대부분 성적이 안 좋았다. 40대 중반엔 4~5년 정도 컴패션 봉사 활동에 집중하면서 일을 쉬기도했다. 이런 식으로 롤러코스터 타기를 반복하다가 나이가 드니까 최근 몇년간은 정체기가 제대로 심화된 채 지냈다.

-붕괴된 건물 잔해를 뚫고 나오는 <차인표>의 설정에 감회가 남달랐겠다.

=그 상황이 정서적으로 굉장히 와닿았다. 변화가 없는 것은 지루하고 지루하면 사람들은 떠난다. 사람들은 다 다른 데로 가버렸는데, 나는 영화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차인표처럼 이제는 내가 빠져나오고 싶어도 더이상 그 틀을 부술 수 없는 지경이 된 거다. 그럴 땐 영화처럼 외부에서 포클레인으로 강력하게 뚫어줘야 한다. <차인표>처럼 나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영화가 있고, 그게 투자까지 받아서 나에게로 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기회인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나를 오랜 부자유 속에서 꺼내보고 싶었다. 희화화라든가 흥행 여부 같은 건 신경 안 썼다.

-진정성, 열정 같은 단어가 퇴색하고 조롱받는 분위기를 지나 어느새 해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의 성실함이 호감을 사는 것처럼. <차인표>는 그런 흐름과 더불어 대중문화의 복고 트렌드와 연결돼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요즘 다시 (진정성의 가치가)돌아오고 있다. (웃음) 아무리 재밌고 좋아도 신뢰가 깨지면 대중은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이 결국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고,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유노윤호씨처럼 조금 웃기더라도 진정성 있는 사람들은 결국 드러난다. 가수 비의 <깡>은 또 어떤가. (일동 웃음) 솔직히 웃기다. 근데 얼마나 열심히 하나. 뼈가 부러져라 춤을 추니까 사람들이 몇년이 지나 다시 반응한다.

-오늘 대체로 자조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자부심에 대해서도 들려주기 바란다.

=1993년에 데뷔해 군대 다녀온 딱 2년 빼고 26년 동안 내내 광고 모델을 했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흥행작도 없고 어디 나오지도 않는 배우를 기억해주고 광고 모델로 쓰는 회사가 있다니! 신기하고 고맙다. 내가 고민하는 나의 경직성이 곧 변하지 않는 안정성으로 작용하는 경우겠지. 제일 사건이 안 터질 것 같은 연예인을 고르는 걸지도 모르고. (웃음)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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