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역가 오미주(신세경)와 배급사 대표 박매이(이봉련)네 욕실 문에는 샤워하다 살해당하는 <싸이코>의 유명한 장면이 걸려 있다. 낮은 온도의 유머 코드를 공유하는 둘간의 대화는 언제나 ‘척 하면 척’이다. 아니, 척 하면 척 노리스까지 갈 법한 이들은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던 ‘그 양반’이 진심으로 신기하다. 미주는 직업 특성상 총을 많이 접했다던 그 양반에게 “직업이 뭔데요. 뭐, ‘존 윅’이세요?” 물은 적이 있다. 육상 단거리 국가대표 기선겸(임시완)은 <존 윅>을 인터넷에 검색해서 ‘킬러구나’ 하는 사람이다. 살아온 배경, 관심사가 다른 이들이 엮이는 거야 드라마에선 예삿일이지만 JTBC <런 온>은 마음을 말로 전하는 어려움까지 섬세하게 짚는다.
찰떡처럼 말의 합이 맞는 상대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면 내가 모르는 화제로 눈을 빛내는 사람을 턱을 괴고 바라보는, 그런 시작도 있다. 접점이 없는 이들이 서로 호감을 느끼면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기억했다가 다시 인용하면서 둘 사이의 공통 맥락을 되살리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화법도 달라서 생뚱맞은 대화가 오가던 미주와 선겸도 그렇게 가까워졌다. 여기까지는 흔한 전개인데 <런 온>은 오해를 줄이려고 내 기분이 어땠는지 설명하다가 구차함을 맛보는 시기. 내가 전하는 말이 자꾸 어긋나서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까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들까지 간다.
드라마 9회. 선겸은 이전에 미주가 “나 좀 좋아해줘”라고 중얼거린 것을 기억했다가 “나 계속 그거 하고 있어요. 좋아해 달라면서요”라고 대답한다. 당신의 그 말을 받아서 다시 되돌려주는데, 이번에는 상처가 된다. 미주는 “부탁이 아니라 용기냈던 거”였다며 지치고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면 어떻게든 말이 엉키는 고비는 넘고 마음을 확인하게 되지만, 한쪽이 끊임없이 이해의 수고를 감당하는 관계로 굳어지기 쉽다. 그래서 상대를 포기하거나 나를 접어주지 않은 채로, 차분하게 서로의 뉘앙스를 짚어가는 미주와 선겸의 대화가 무척 소중하다.
VIEWPOINT
돈 봉투
돈이 적냐는 말에 “네 적습니다”로 답했던 SBS <파리의 연인>, 영혼이 바뀐 줄도 모르고 아들에게 돈 봉투를 주던 <시크릿 가든>, 불문에 부치던 돈 봉투의 액수를 ‘40만원’이라는 쪼잔한 금액으로 까발렸던 시트콤 <귀엽거나 미치거나> 등 한국 드라마엔 부잣집 부모가 돈 봉투를 건네는 장면도, 그 전복도 많았다. 돈 봉투가 가난한 사람의 순수한 사랑을 증명하는 시험으로 작동하는 것이 무척 비위가 상했는데 <런 온>은 주는 돈은 받고, 마음은 별개 문제로 분리하며 오해가 고일 여지를 남기지 않아 시험의 의미를 무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