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멜로드라마에 관하여
2021-02-02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유령의 영화’를 만든다면, 유령의 역량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유령은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돌려주는가. 페촐트의 ‘유령’이 진부한 비평적 수사로 소화되기 전에 그 부분을 질문해보고 싶다.

토킹 픽처 혹은 영화의 훼손과 치유

<피닉스>

전후의 베를린을 무대로 삼은 <피닉스>에서 주인공인 유대인 넬리는 얼굴에 큰 화상 자국을 남기고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다. 영화 초반부에 그녀는 성형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원래 얼굴을 되찾는 대신 다른 얼굴을 가지게 된다(영화는 넬리가 찍힌 흑백사진을 어렴풋이 제시하지만 그녀의 원래 얼굴은 결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넬리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얼굴로 남편 조니를 만나는데, 그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를 아내와 닮은 낯선 이로 착각한다.

수용소에서 넬리가 죽었다고 생각한 조니는 그녀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눈앞에 나타난 넬리에게 자신의 아내 역할을 요구하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로부터 넬리는 ‘에스더’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넬리’가 되기 위해 그녀 자신의 필체, 제스처, 말투 그리고 기억에 잔존하는 수용소의 경험을 복기 한다. 모방이라고 하기에도, 과거에 대한 자각이라고 말하기도 석연치 않은 이중의 역할극이 한 사람의 몸으로 상연되는 것이다.

니나 호스의 놀라운 연기로 구현된 넬리 혹은 에스더라 불리는 이 인물의 복잡한 신체를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영화에 내재된 파열을 감지하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이 똑같은 글씨를 쓰고 같은 말과 몸동작을 전달하는데도 그녀를 바라보는 쪽에게 서로 다른 인물로 받아들여진다는 대담한 설정은, 그것이 페촐트의 세계를 맴도는 인물들 대부분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지적/지각적 차원의 오인이라는 특수한 현상과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춘다.

오인은 곳곳에서 현상되고 있다. 가령 <볼프스부르크>에서 로라는 자기 아들을 차에 치여 죽게 한 뺑소니 운전사 필립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와 만나게 된다. <유령>의 프랑스와즈는 우연히 마주친 어린 소녀 니나의 얼굴과 상처를 목격하고 그녀를 어린 시절 유괴당한 죽은 딸로 오해한다. <트랜짓>의 마리는 신분을 위장한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보고 그를 자신의 남편 바이델이라 착각한다. 여기에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환각적인 소리에 반응하는 <옐라>와 <운디네>의 두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페촐트가 집요하게 구축한 인물 유형은 눈과 귀가 일으키는 오작동에 붙들린 주체들을 가리킨다.

오인된 지각

누군가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바라본다. 페촐트의 영화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극히 단순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액션과 리액션이 벌어지는 최초의 자리. 시선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매혹은 오인과 함께 생겨난다. 페촐트가 구상한 픽션의 주체가 겪는 신체적 오작동은 이런 눈에 비치는 현실의 표면에 불안정한 진동을 일으킨다. 눈앞에 보이는 상대는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고,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내가 멈춰 선 자리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하나의 몸과 둘로 나뉘는 얼굴, 사라지는 감각과 부유하는 목소리. 이와 같은 착란적인 지각으로 인해 페촐트 영화의 인물들은 <피닉스>의 넬리가 그러하듯 쉬이 통합되지 않는 복수의 형상으로 분기한다. 페촐트의 연인들이 자꾸만 어긋나는 사랑에 고통받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의 이름과 신체로 붙잡히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스펜스 효과를 위한 장치가 아니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발견되는 시각신호와 청각신호의 분리 내지 불일치가 주로 역사적 분기점 혹은 트라우마의 시기와 연관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주지하다시피 <열망>을 기점으로 페촐트가 다루는 영화적 대상은 역사의 무덤으로부터 걸어나온 존재들이다. 연출자가 ‘억압된 시대의 사랑’ 3부작이라 언급한 세편의 시대극은 정확한 시간대를 표시하지는 않지만 명백히 통일 전의 베를린(<바바라>)과 2차 세계대전 시기(<피닉스> <트랜짓>)의 집단적 외상을 불러들이고 있다. 페촐트는 이를 역사에 가려진 시간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고드는 영화의 고고학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페촐트의 영화적 지대를 배회하는, 과거가 없는 것처럼 불현듯 현실로 침입한 이름 없는 자들을 역사적 유령 또는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은 익숙한 용법이다. 혹은 그의 영화가 유령들의 신체와 더없이 구식으로 보이는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전복적으로 결합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도모한다는 의견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비평의 언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상은 눈앞에 나타난 역사의 유령적 존재 자체도 아니고, 유령을 부르는 역사적 조건도 아니다. 중요한 지점은 그의 영화를 ‘유령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망각을 동반한 과거의 유령이 현재와 접합하는 그 매개의 형식에 주목하는 것이다.

손상된 신체

<트랜짓>

역사적 유령이 수행하는 매개의 형식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들의 신체를 더듬어보아야 한다. 고장난 몸, 부자연스러운 몸, 지각의 회로에 혼선을 일으키는 몸. 페촐트는 바로 이런 신체들이 훼손당하는 손상의 순간을 스크린에 가져온다. <바바라>에서 자살을 기도한 소년의 신체와 도망치던 도중 철조망에 긁혀 상처를 입는 소녀의 신체, <피닉스>에서 넬리의 얼굴에 얼룩진 흉터와 팔뚝에 새겨진 수감번호, 그리고 깨진 수족관 조각이 여인의 몸에 박히는 <운디네>의 상처가 이런 예시다.

그들은 연약한 피부가 찢기고 고통을 겪는 순간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살갗이 찢어지고 환부를 드러내는 상처의 형상은 그 아래 숨겨진 역사적 진실을 대면케 하는 폭로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날카롭게 벤 피부의 틈 사이로 공유되지 않은 고통과 기억을 환기시킨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베트남전쟁에 사용된 네이팜탄의 화력에 항의하기 위해 자신의 팔목에 담뱃불을 지지는 하룬 파로키의 제스처가 그러하듯, 환부의 이미지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증언과 증거품으로 전달되지 않는 감각, 말소된 표상에 접근한다.

페촐트가 (수용소와 감시사회의 억압을 포함한) 20세기의 유령들을 불러내는 것 또한 이런 벌어진 환부의 미세한 틈을 통해서다. 상처 입은 피부의 틈새에 카메라 렌즈를 가져다대는 문제는 페촐트의 말을 빌리면 과거를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일, 뒤섞이고 오인된 기억일지라도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그런 익명의 기억을 불러들이는 작업에 속한다. 이것이 하나의 신체에 들러붙은 두개의 정체성(<피닉스>의 넬리/에스더, <트랜짓>의 게오르그/바이델), 하나의 장소를 구성하는 겹쳐진 시간(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트랜짓>의 마르세유)을 정당화한다. 사라진 연인은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소실된 과거는 그러나 현재에 펼쳐져 있다. 억압된 과거의 형상과 목소리들이 모두 틈입함에 따라 영화의 신체는 흔들리고 진동한다. 기차에서 바라본 흔들리는 풍경으로, 바스락거리는 커튼의 움직임으로, 고요히 요동치는 호수의 표면으로, 동요하는 연인들의 감정으로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피닉스>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대신 자살을 선택한 유대인 친구의 편지를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지. 하지만 나아갈 곳도 없어. 나는 삶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 느껴.” 과거나 미래로 건너갈 수 없는 유폐된 자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그런 존재들을 관측함으로써 익숙한 죽음으로부터 낯선 삶으로 투신하는 영화적 시도를 감행한다.

그래서일까, 페촐트의 영화는 손상된 영화의 신체를 재생하려는 의지 혹은 영화의 치유라는 난해한 주제에 직면한 것처럼 보인다. <옐라>에서 교통사고로 호수에 추락한 이후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사는 옐라의 모습이 그려진다든지, <바바라>와 <피닉스>에서처럼 수술과 치료를 시도해야 하는 상태가 제시되고 더 나아가 그의 영화 전반에 작동하지 않는 기계나 악기 등을 고치는 행위가 반복해서 묘사되는 것은 이런 전제로부터 형성된 은유적 장치들이다.

말하자면 두번의 삶을 제안하는 것이다. 신작 <운디네>는 그런 치유에의 의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처럼 보인다(<트랜짓>의 결말에서 익사한 마리를 연기한 파울라 베어가 ‘물의 정령’인 운디네로 되돌아오는 이 영화는 시도 자체로 치유와 맞닿아 있는 걸까?). 이전까지 페촐트의 멜로드라마가 연인들의 결별과 불완전한 재회를 그려냈다면, <운디네>의 연인들은 비극적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불안을 동반한 채로 다시 마주치는 것도 아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관계가 부서지고, 상실을 대면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이는 삶을 중단시키는 대신 삶의 다른 가능성을 추동하는 계기로 주어진다.

‘토킹 픽처’로서의 <운디네>

<운디네>

<운디네>는 사랑을 그리는 영화다. 하지만 또한 사랑을 나누는 이들의 의심과 비밀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연인들의 결별을 두 차례 반복하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신화와 역사에 새겨진 나쁜 반복의 궤적을 마주한다. 베를린의 역사학자인 운디네는 바람을 피운 연인 요하네스에게 헤어짐을 통보받는다. 그를 다시 찾으러 간 카페에서 운디네는 산업잠수사 크리스토프를 마주친다. 기묘하게도 그 순간에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와 지면을 흔드는 진동이 들려오고, 수족관이 부서져 두 사람을 물로 적신다. 크리스토프는 조심스럽게 운디네의 몸에 박힌 파편을 빼낸다. 이 돌연한 접촉이 두 사람을 연인으로 결합시킨다.

인상적인 도입부를 거론하고 싶다. 한적한 야외 카페에 운디네가 앉아 있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요하네스가 테이블 반대편 숏에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이별을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있다.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여자는 눈물을 흘린다. 필립 가렐의 <질투>의 첫 장면을 연상시키는 시작으로, 한 여자의 얼굴에서 감정적 위기와 관계를 중단하는 신호가 드러난다. 이러한 위기와 중단으로부터 운디네의 움직임이 촉발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별을 말하는 요하네스의 방식이다. 직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는 평소의 말투와 다른 미묘한 차이를 거론한다. 평소에는 “오늘 보자”는 식으로 말하지만, 오늘은 “할 말이 있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는 이런 사소한 차이가 이별의 전조임을 이미 알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오늘 보자’와 ‘할 말이 있어’라는 말 사이에 유효한 의미론적인 차이가 드러난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영화는 스크린에 비가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의 활동이 목소리로 육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운디네>에서 말과 음성을 포함한 소리의 활동은 특별한 문제로 각인된다. 운디네의 귀에 들리는 환청 같은 목소리, 도시를 불길하게 감싸는 사운드 효과를 떠올리기 쉽지만 페촐트가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텍스트를 발화하는 운디네의 음성이다. 예컨대 그녀가 크리스토프에게 키스하려고 할때, 크리스토프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에 운디네에게 베를린 건축물의 역사에 관한 강의 내용을 들려달라고 말한다. 키스가 목소리로, 내밀한 에로스의 표현이 공식적인 텍스트로 대체되는 이상한 요청이다.

하지만 음성을 낭독하는 형식에서 페촐트는 기묘한 정감을 추출한다. <피닉스>의 결말에서 넬리의 노래를 듣고 비로소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는 조니의 깨달음, <트랜짓>의 영화 전체를 서술하는 카페 주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혹은 게오르그가 고장난 라디오를 고치며 죽은 동료의 가족을 앞에 두고 부르는 노랫말의 유대감이 그러하듯이, 이 순간에도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에게 베를린의 건축물에 대해 낭독해주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도시의 표면에 덧입힌다. 이런 장면들에서 페촐트의 영화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오인에 대항하는 발화의 투명한 성질,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토킹 픽처’로서의 역량을 수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도입부에서 운디네는 카페에 앉아 있는 요하네스를 바라보면서 멀어진다. 곧이어 박물관의 계단 창문을 통해 멀리서 다시 한번 그 자리에 있는 요하네스를 지켜본다. <운디네>에서는 많은 장면이 반복되는데, 대표적으로 이러한 시선의 반복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페촐트의 영화에서 이러한 시선의 반복은 혼란스러운 비전을 일으킨다. 운디네가 박물관에서 강의하며 도시 건축물 조감도를 바라보는 순간에, 그 위로 요하네스가 앉은 카페의 광경이 부감숏으로 오버랩되는 식이다. 단단하고 고정된 도시의 건축물조차 물처럼 흐르는 것. 페촐트는 육안으로 판별되지 않는 시간의 작용을 시각화하기 위해 흘러내리는 인간의 육체를 그려낸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처럼, 건축물에 새겨진 중첩된 기억을, 재건된 도시 모더니티를 무너트리는 시간의 장력을 흐르는 물의 질감으로 표상한다.

따라서 예견된 파국을 앞두고 치유를 위한 두 번째 삶을 도모하는 것은 도시를 이루는 이러한 시각적 기호들이 아니라 소리의 박동이다. 크리스토프가 호수에 빠진 운디네를 살려내면서 부르는 <Stayin’ Alive>의 리듬, 서로를 끌어안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곁으로 요하네스가 스쳐 지나갈 때 운디네의 심장 박동이 멈췄음을 깨닫는 크리스토프의 감각, 그리고 뇌사 상태에 빠진 시점의 크리스토프에게서 걸려온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통화의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다. 이 순간에 그들은 상대방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정신분석학의 ‘토킹 큐어’처럼 상담자의 얼굴을 외면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그들의 제스처는 사랑의 파괴로 향하는 대신 반복된 사랑의 실패에서 벗어나는 경로를 안내한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비극적인 이별과 죽음의 반복이 아니라, 특별한 교환의 순간을 마주한다. 운디네는 자살을 택하고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를 죽음으로부터 되살린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종결이 아니다. 2년이 흐른 뒤, 크리스토프는 새벽녘에 운디네의 호수로 다가간다(데이 포 나이트로 촬영된 이 시퀀스에서 페촐트는 고전적인 독일영화의 테크니컬러 양식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블루톤으로 화면을 연출한다).

수면 아래서 운디네는 크리스토프의 손을 잡고, 그에게 조각상을 되돌려준다. 일방적인 사랑에의 열망이 아니라 상호적인 화합과 교환의 시도다. 사랑이 “오늘 보자”라는 명령형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끝이 일방적인 파괴로 귀결된다면, <운디네>는 통상적인 사랑의 형식을 거부하고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모색하는 길을 택한다. 재결합에 실패한 연인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부드러운 결말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