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원 감독의 작품은 늘 인간 본성에 깊이 파고들면서도 인간관계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순간에 집중한다. ‘이승원 감독스럽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세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을 앞둔 세 자매가 각자 처한 상황의 온도를 서서히 높여 끓고야 마는 이야기다. 첫째 희숙(김선영)은 건강 문제로, 둘째 미연(문소리)은 남편 문제로, 셋째 미옥(장윤주)은 재능 문제로 괴롭고 고단하다. 그런데도 기쁜 척하며 아버지의 생일까지 챙겨야 한다.
<세자매>는 가족이란 이유로 묻고 넘어갔던 상처를 헤집으며 쉽사리 느낄 수 없었던 영화적 경험으로 관객을 이끈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승원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소통과 거짓말>), 전주국제영화제 CGV아트하우스 창작지원상, 홍콩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해피뻐스데이>)을 수상하며 데뷔 때부터 영화계의 관심을 받아온 인물이다. <세자매>의 극장 개봉 하루 전, 이승원 감독과 마주 앉아 <세자매>에 대해, 그리고 이승원 감독만의 작업 방식에 대해 물었다.
-세 자매 모두 개성과 저마다의 드라마가 강하다. 영화의 로그라인(한 문장으로 요약된 줄거리.-편집자)은 셋 중 누구로부터 시작하나.
=기본적으로 둘째 미연의 시선으로 영화가 흘러가도록 썼다. 어떻게 보면 미연은 직접적으로 어떤 걸 경험했다기보다 곁에서 많은 걸 지켜본 캐릭터다. 그러면서도 셋째 미옥을 엄마처럼 돌봐야 하는 인물인데, 미연처럼 무언가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인물이 갖는 무게감이 클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 미연의 시선으로 영화가 전개되면 어떨까 싶었다.
-대사의 말맛과 디테일이 돋보인다. 미연이 미옥과 칼국수를 먹으면서 첫째 희숙을 흉볼 때 희숙을 마치 사촌언니나 동네 아는 언니를 칭하듯 “그 언니”라고 하더라.
=대사를 쓸 때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칼국수 신을 쓸 때도 대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미리 정해두고도 어떤 말로 표현할 것인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영화에서 빠졌는데, 미연이 희숙을 만났을 때 미옥을 욕하는 장면도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식구들 앞에서는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흉보는 상대를 심하게 욕하기보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고 걱정된다’는 식이다. 어쩌면 이는 미연이 유일하게 식구들 앞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편한 정서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란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내게는 의미 있어서 평소에 잘 관찰하려고 한다.
-세 배우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문소리 선배님과 잘 알게 됐을 때 시나리오를 꼭 보여드리겠다고 하자 긍정적인 답을 주셨다. 김선영 배우는 늘 함께할 수 있으니까 당대 제일 인정받는 배우들하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연기의 끝을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메릴 스트립이나 줄리언 무어 같은 배우가 등장해 끌고 나가는 여성영화를 두 배우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세 자매 중 막내 역은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자가 잘 안되고 일정이 연기되는 과정 속에서 미옥 역의 배우를 결정짓기 어려웠다. 오히려 신선하고 새롭게 받아들여질 만한 배우가 연기를 해보면 어떻겠냐며 김상수 프로듀서가 장윤주 배우를 추천했고 김선영, 문소리 배우도 너무 좋아했다. 두 배우가 장윤주 배우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설득하는 과정도 있었다.
-작품마다 이승원 감독만의 색채가 느껴진다. 그래서 작업 스타일이 궁금하다. 콘티 위주의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감독도 있고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모은 아이디어를 영화에 적용시키는 감독도 있는데 이승원 감독은 어떤 스타일인가.
=대사 하나만 뱉어도 그 캐릭터가 드러나도록 대사에 신경 써서 시나리오를 쓴다. 배우가 인물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러프하게 쓰는 감독도 있는 반면 나는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걸 디테일하게 준비한다. 시나리오를 쓰는 시간도 짧다. 쓰기 전에 생각은 많이 하지만, 써야겠다 싶은 순간부터는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달 내로 쓴다. 보통 작가들은 2고, 3고, 4고를 쓸 생각으로 계속 작업을 반복하는데, 나는 그 작업을 힘들어해서 초고를 최대한 준비하고 2고, 3고에서는 세부적인 것만 살짝 바꾸면 될 정도로 완성해놓는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인물이 와닿고 좋게 느껴질 수 있는데, 배우가 대사를 입 밖으로 내면 오히려 표현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나리오에 모든 걸 꽉 짜놓고 현장에서는 그 배우에 맞도록 모든 걸 열어두고 언제든 바꿀 수 있게 한다.
-<세자매>는 마음속에 남은 가족과 있었던 이상한 순간들을 소환시키는 영화다. 잊고 사는 순간과 장면을 어떻게 잡아내나.
=남들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김선영 배우와 가장 통하는 부분도 그것이다. 가족만 갖는 기묘한 형식이 있는데 김선영 배우와 나만 인지하고 웃게 되는 상황이 있다. 가령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인 식사 자리에서 뜬금없이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했을 때, 그 자체를 나쁘다고 판단하기보다 그런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포착하고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아내이자 <세자매>의 주연인 김선영 배우와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했다.
=첫 단편영화 <모순>으로 만나 16년 정도 함께 작업했다. 같이 극단을 운영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다. 내가 생각하는 김선영 배우는 굉장히 논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데 그에 못지않게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로 두는 사람이다. 이때 나오는 연기는 파괴력이 있다.
-이승원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가 궁금하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당시 봤던 수많은 작품들을 좋아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나 <백 투 더 퓨처> 시리즈(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피라미드의 공포>(감독 배리 레빈슨), <태양의 제국>(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꿈 같은 영화들이 유년 시절의 내게 주는 힘이 대단했다. 우리 가족은 화목한 가정의 길로 가지 않았고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다. 당시 느꼈던 고통을 이 영화들이 상쇄시켜줬다. 너무 재밌고 신나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는데, 그의 문법까지 쓰게 되더라. 이야기 전체는 단선적인데 시퀀스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스타일이다. 요 근래 봤던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남은 작품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숀 베이커 감독의 알 수 없는 감동이 좋다.
-차기작은 연극인가 영화인가.
=1년에 한번씩 정기공연을 해야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상황이 여의치 않다.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