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승리호' 조성희 감독 - <승리호>는 ‘좋은 사람’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행기다
2021-02-19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조성희 감독이 말하는 <승리호>, 첫 구상부터 배우들이 추가한 설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조성희 감독은 <늑대소년>의 철수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10년 전 처음 봤을 때와 똑같다.” <승리호> 온라인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배우 송중기가 조성희 감독에 대해 한 말은 그의 10여년간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남매의 집> <짐승의 끝>처럼 계보나 좌표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독창적 디스토피아를 그렸던 그가 <늑대소년> 같은 멜로영화를 만들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런데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 이후 확실히 그의 고유 인자는 재정의됐다.

조성희 감독의 마음속엔 변하지 않는 소년이 있다. <남매의 집>에서 괴한들로부터 여동생 순이를 지키지 못했던 오빠 철수는, 아직 세상과 소통하는 법은 모르지만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순정을 간직한 ‘늑대소년’의 이름으로 반복되고, 이곳의 순이(박보영)는 말랑한 순정 만화 속 소녀가 된다. <탐정 홍길동>은 추리력은 비상하나 과거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미성숙한 성인 남자가 어린 자매와 동행하며 성장하게 되는 이야기다.

2월 5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우주 SF 영화 <승리호>의 주인공들은 전작보다 훨씬 성숙한 어른들이지만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로 다툰다. 공교롭게도 장르적으로는 어린 시절 봤던 영화들, 예컨대 <인디아나 존스> <백 투 더 퓨처> <스타워즈> 시리즈나 <구니스> 같은 1980, 9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것은, <승리호>가 전작들보다 한발 더 나아가 공생과 화합 등 그들보다 더 어린 세대가 가진 희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승리호>는 소년 만화의 순진한 정의감처럼 비칠 수 있는 목소리에 기어코 보는 이를 흠뻑 젖게 만든다.

-10년 전 이미 <승리호>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걸로 안다.

=10년 동안 준비한 건 아니고,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그때 처음 시나리오를 썼던 거다. 몇 가지 설정을 제외하면 스토리부터 등장인물까지 전부 바뀌었다. 그때는 통통배 같은 우주선 안에 있는 50~60대 노동자 이야기였다. 지금과는 설정이 정반대라 가난한 사람들이 우주에 살고 있었다. 큰 우주선을 타고 다니며 우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이 어떤 거대 음모에 맞서 지구를 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꽃님이(박예린)라는 아이를 만난다라는 큰 줄기는 그때도 있었다. 태호(송중기)가 딸 순이(오지율)를 잃는 것도 지금과 똑같은데, 초창기 버전에선 죽은 딸을 환상 속에서 만나고 끝난다. 4년 전쯤 다시 시나리오를 꺼내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방향으로 완성했다.

-원래 괴물이나 로봇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취향은 여러 번 밝히지 않았나. 일찍부터 SF에 대한 꿈이 있었던 건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나 감독들이 SF에 대한 기본적인 로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SF 영화를 반드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승리호>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상업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만약 업계 분위기를 알았다면 어차피 안 되는 걸 어떻게 쓰냐며 포기했을 텐데, 그땐 아무 것도 몰라서 SF 장르를 쓸 수 있었다.

-규모가 큰 우주 영화가 아닐 뿐이지 <남매의 집> <짐승의 끝> 같은 초기작들도 SF 아니었나.

=영화감독마다 조금씩 관심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나 같은 경우 범죄물이나 깊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드라마는 잘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니 옛날부터 판타지가 가미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했던 작품에 동시대 한국 풍경이 나온 적이 없다.

=(윤)성현이랑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현대 배경은 어떻게 꾸밀 수가 없다. 미술을 강하게 할 수가 없으니 그대로 찍어야 하는데 그대로 찍기도 만만치 않다. 창작자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 도시가 촬영하기 굉장히 까다롭다. 그래서 계속 다른 시공간을 찾게 된다.

-그렇게 구축한 세계에 현실감은 없지만 캐릭터들은 또 친근하고.

=이것도 성현이랑 예전에 많이 했던 얘긴데, 이창동 감독님 <시> 같은 영화에 200m 크기의 괴수가 나타난다고 상상하면 너무 충격적이고 재밌지 않나. 그렇게 안 어울리는 이미지들이 충돌하는 데서 오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옛날에 찍은 단편도 반지하방 창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빛이 지나가는데 그게 UFO였다든지 하는 얘기였고, <승리호>는 우주선 안에서 찌개 끓이고 김치 먹고 고스톱을 친다. <탐정 홍길동>도 1980년대 한국 배경인데 페도라에 트렌치코트 입고 권총 쏘는 건 1950년대 미국영화에 나오는 이미지였지.

-그렇게 발굴한 우주 배경의 <승리호>의 이야기가 지금 형태의 스토리가 나오기까지 리서치 과정이 궁금하다. 아주 엄격하게 과학적 고증을 하지는 않았던데, 관객의 몰입을 해치지 않는 적정선을 찾는 고민도 있었겠다.

=“저게 말이 돼?”라는 반응은 피하기 위해 우주 구조물들의 건조 방식, 소재, 로켓의 단가, 우주선의 연료, 우주인의 생활 방식 등 우주에 대해 자료 조사를 굉장히 많이 했다. 과학적인 내용은 물론 심리적인 부분도 많이 찾아봤는데, 원양어선도 참고하며 선원들이 동료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봤다. <우주 다큐: 우주비행사가 숨기고 싶은 인간에 대한 모든 실험> <나는 회사 생활의 모든 것을 참치 어선에서 배웠다> <트럭 드라이버: 북미 대륙의 한국인 트럭커, 헝그리 울프의 휴먼 스토리> <스페이스 미션> <위험한 생각들> <불가능은 없다> 같은 책들을 참고했다. 그런데 조사한 내용을 전부 영화에 반영할 수는 없다. <승리호>는 <그래비티>처럼 사실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그냥 넘어가고 어떤 것은 실제 조사한 내용을 녹여냈다. 가령 우주선 안에서 걸어 다니는 그림이 말이 되게 하기 위해 인공 중력과 같은 장치가 필요했고, 진공 상태에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건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넣은 거다. 사실 <승리호>에서 우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방식은 굉장히 비효율적인데 오히려 좀더 과장해서 연출했다. 2092년에 종이돈을 사용한다는 설정도 현실적이진 않지만 극적인 묘사를 위해 그냥 넣었다.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신나는 영화로

-<승리호>의 선원들이 가족처럼 묘사되는 것은 실제 원양어선 이야기를 참고한 것인가.

=집에서 나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우주 비행사 선발 과정에서 오랜 기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하는데, 유대도 쌓이지만 그만큼 감정의 골도 깊어진다. 가족이 칫솔을 쓰고 나서 제대로 안 꽂아놓으면 짜증나는 것처럼 사소한 일로 갈등하고, 결코 웃는 얼굴로만 지낼 수 없다. 그런데 가스가 샌다든지 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정말 일사불란하게 팀워크를 발휘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대형 트럭을 레퍼런스로 삼아서인지 ‘승리호’는 할리우드영화에 나오는 첨단 우주선 같지 않다.

=안홍일 컨셉 아티스트와 함께 노동자와 중공업(heavy industry)의 거칠고 박력 있는 느낌을 담자고 이야기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으니까 트럭을 타고 몇날 며칠을 달린다. 트럭 자체는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트럭 운전사가 먹고 자는 공간은 앞부분의 좁은 의자밖에 없다. 물건을 내리면 캐셔에서 돈을 받는데 규정을 위반했을 땐 벌금을 문다. 전체 삶에서 일이 훨씬 큰 부분을 차지하고 누리는 건 아주 작은 느낌? ‘승리호’도 마찬가지다. <스타트렉>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거대한 우주선과 달리 사람이 있는 앞부분은 매우 작고 나머지는 다 짐칸이다.

-박력 있는 느낌을 주고자 업동이(유해진)나 후반에 합류하는 우주 청소부들이 작살을 던지는 액션도 탄생한 것인가.

=<승리호>의 액션은 잘 빠진 포르셰끼리의 경주가 아니라 쇳소리 나고 터프한 트럭들의 싸움이다. 실제로 우주 쓰레기를 제거하는 방식은 굉장히 정적이지만 영화에선 거친 인생을 살아온 우주 노동자의 작업이 험하게 보이길 바랐다. 우주선 옆에 나온 암(arm)도 사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있을 필요가 없는데 우주선끼리 박력 있게 싸우는 모습을 담고 싶어 그렇게 디자인했다.

-순제작비 200억으로 이정도 비주얼의 우주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할 줄 몰랐다. 전체 제작은 1년 넘게 걸렸고, 사전 준비를 열심히 해서 프리 비주얼 작업을 2시간 30분에 딱 끊어 마쳤기 때문에 낭비되는 촬영분이 없었다던데.

=어느 영화야 안 그러겠느냐만 제작비를 알차게 쓰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우리가 가진 야심도 관객의 눈높이도 높은데 그에 비해 제작비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관객 분들에게 “열심히 했으니 귀엽게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빡빡한 환경에서도 최대한 그럴 듯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예를 들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우주선이 있는데, 그게 사실 다 하나다. 뒤에 장식이라든지 조명만 좀 다르게 해서 다른 배처럼 보이게 한 거다. 촬영 회차도 과감하게 줄였다. 후반부 거대한 홀로그램이 나오는 신은 원래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1000여명의 사람들이 고급 의복을 입고 넓은 홀이 있는 파티장에 모여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 신의 풍경을 다르게 바꿔서 갔다. 또 짐벌이 촬영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시간이 곧 돈이니까 진동만 오는 에어펌프를 대신 썼다. 스탭들도 예전에 안 해봤던 일을 많이 하게 돼서 적극적으로 연구도 많이 하고, 이왕 하는 거 잘 해보자는 사명감 같은 것도 있었다.

-색을 잘 쓰는 걸로 워낙 졍평이 난 감독이다 보니 <승리호>의 컬러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선 태호의 첫 등장, 지구에서 우주로 올라갈 때 색감이 완전히 대비된다.

=지구는 모래바람도 일고 황사가 많이 껴 있으니까 난색으로 구성했다. 빨강부터 노란색, 초록색, 올리브, 황토색. 그래서 우주 청소부들이 입는 옷이나 지구 쪽 공간을 보면 차가운 색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다 우주로 넘어 가면 눈이 시원해지는 한색 계통의 컬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캐릭터들도 각자 색깔이 있다. 태호는 UTS 기동대 출신이라 파랑, 장 선장(김태리)은 해적단 두목 출신에 급진적인 느낌이 있어서 주황색, 타이거 박(진선규)은 주인공들 중 가장 속이 따뜻한 캐릭터라서 난색 계통의 옷을 입히다 보니 노란색이 됐다.

-주로 어두운 우주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디테일하게 색을 잡을 때 전과 다른 계산이 필요했을 텐데.

=먼저 생각한 건 광질(빛의 성질)이다. 우주선 내부나 사무실 같은 실내는 상관없는데 우주 밖으로 나갔을 때는 날씨란 개념이 사라지지 않나. 그래서 태양빛을 직접 강하게 받게 된다. 우주선에 빛이 닿았을 때 어떤 색이 CG 티가 덜 나는지, 어떤 색이 합성이 잘 되고 어떤 색이 우주를 보다 우주처럼 보이게 하는지, 다른 레퍼런스도 많이 찾아보면서 테스트 촬영을 굉장히 오래 했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강한 직광이 여러모로 가장 효율적이고 그럴 듯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 공간을 아주 리얼하게 담은 <그래비티> 같은 영화를 보면 별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카메라를 들고 우주에 나간다면 노출 문제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주에서 요란하게 소리가 들리는 <승리호> 같은 영화라면 화려하게 가자는 생각에 별빛이나 은하수를 과장해서 많이 넣었다. 우주선이 움직인다거나 카메라 무빙이 있을 때는 눈보라 같은 작은 우주쓰레기 같은 부유물이 옆을 지나간다고 설정을 해둬서 우주선이 빨리 달리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우주 배경 영화를 찍을 땐 조명을 어떻게 쳐야 하나.

=실내에서 촬영할 때처럼 조명을 디테일하게 하기 보다는 굉장히 출력이 높은 큰 조명기로 한 번에 라이트를 주는 게 가장 좋았다. 저 멀리서 태양광이 온다고 생각하며 커다란 키 라이트 하나만 잡고 가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다른 영화들도 찾아보니 그런 방식으로 많이 하기도 했고. 그리고 카메라에 필터를 대고 후반에 DI 작업을 할 때도 가장 밝은 부분이 아스라하게 퍼져서 블러(blur) 효과를 주는, 빛번짐 효과 같은 것을 덧붙여서 작업했다.

-<승리호>는 1980~9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를 보고 자란 1970, 80년대생들이 제일 재미있게 볼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로 옛날 할리우드영화처럼 신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시작한 프로젝트 아닌가. 그러고 보니 <늑대소년>도 <E.T.>나 <가위손> 같은 이야기였네. 그런데 요즘 젊은 관객도 이런 풍의 영화를 좋아할지 개인적으론 좀 궁금하다.

=옛날 블록버스터영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갖고 시작하긴 했지만 그렇게만 영화를 만들면 안된다. 지금 <백 투 더 퓨처>와 관련해 달리는 댓글 보면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 사람들은 유튜브를 많이 보고, 틱톡에서 30초짜리 영상을 즐기고, 2시간 동안 앉아 있는 상황 자체를 챌린지로 여긴다. 그래서 스탭들과 남녀노소 모두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10~20대 관객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웹툰이나 게임도 많이 봤다. 지인을 통해 <승리호> 세트에 놀러왔던 어린 친구들이 우주선 내부 조종석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좋아한다. 그럼 됐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늑대소년>은 확장판을 포함하면 7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했고, 좀더 감독의 개성을 살린 작품으로 보였던 <탐정 홍길동>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 그다음 작품을 만들 때 대중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감독으로서 엣지를 넣을 수 있을까, 어느 정도 포기하고 타협해야 하는가.

=영화 하는 사람들 중 그에 대해 똑 부러지는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대중성이라는 것에 실체가 없다. 어떤 작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머리를 굴린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고, 관객이야말로 정말 반전 있는 분들이고. (웃음) 특정 영화 팬을 위해 만든 영화 역시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흥행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는 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케이크 나누듯 이걸 취하면 저게 줄어드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승리호>는 그저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신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원래 목표한 방향을 위해 스탭들과 진심을 다해 만들었지, 무언가를 포기한 적은 없다. 태호의 슬픈 사연 같은 것도 “제작비가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이런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넣은 게 아니다. 그건 정말 자신 있게, 아주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

자기 자리에서 누구나 다 소중하다

-<승리호>는 각 캐릭터의 개성은 물론 그들의 앙상블이 중요한 영화다. 어떻게 지금의 캐릭터들이 탄생하게 됐나.

=캐릭터들을 만든 과정이 너무 길고 지난해서 한번에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승리호 ‘팀’을 먼저 생각했다. 이들은 다른 블록버스터 히어로와 달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직업인이다. 자신들이 수거하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기도 한데, 가치적인 의미가 아닌 ‘버려졌다’는 의미에서 그런 거다. 이들은 어떤 신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몰리고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된다. 다들 속물적이고 못된 면도 있지만 그중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게 타이거 박이다. 문제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은 장 선장, 우주선 조종을 잘하고 머리를 쓰는 사람은 태호. 그렇게 각자 역할을 배분한 다음에 그 안에서 개성을 하나씩 찾아갔다.

-그들과 로봇이 함께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업동이는 인간보다 돈도 더 착실하게 모으고, 외모에도 관심이 많다.

=업동이는 초창기 시나리오 때부터 있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을 포함해 최초의 아이디어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캐릭터다. 원래 군용 로봇이라 뒤통수를 보면 ‘Airborne’이라고 공수부대 독수리 마크 같은 것도 있는데, 폐기처분되면서 어찌어찌 재활용센터까지 굴러들어왔다. 그곳에서 업동이를 데려온 장 선장이 너무 좋은 OS를 깔았다. 원래 장 선장이 뭐든 과하게 하는 성격이다 보니. (웃음) 그런데 과거보다 깊은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자기 꿈이 생긴 거다. 업동이를 보면 옷을 자주 갈아입는데 그게 다 새 거다. 유일하게 옷도 세탁해서 입는다. 인간미도 있다. “한 6천~7천 정도.” 셈이 정확해야 할 로봇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웃음) 숫자를 한번에 읽지 못하고 “일, 십, 백, 천, 만” 손가락으로 세는 디테일은 유해진 선배님의 아이디어였다.

-<늑대소년>을 함께 했던 송중기와는 미리 출연을 논의했었나.

=그냥 마음속으로만 바랐다. 전작도 흥행 못했고 <승리호>는 돈도 많이 들어가는 영화니까. 우주선 날아다니는 한국영화가 없었으니까 시나리오 쓰면서도 “송중기를 캐스팅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이게 들어가긴 들어가는 건가?”는 생각이 더 컸다. 야심보다는 공포가 더 컸던 거지. 그렇게 불안해하던 중 송중기 씨가 함께 하겠다고 해서 프로젝트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특별 출연이 있다. 꽃님이의 아빠 강현우 역의 김무열과 업동이의 변신 후 모습으로 등장하는 김향기다.

=일단 강현수는 태호와 비슷한 연령의 젊은 아빠여야 했다. 이 영화에 딸을 가진 부모가 두 명 나오는데, 강현우 박사가 딸을 만나는 모습을 보고 태호가 옆에서 부러운 마음이 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의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는 안 됐다. 태호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젊은 아빠여야 하는데 가령 백발의 배 나온 아저씨면 안 되지 않겠나. (웃음) 다행히 김무열 배우가 허락을 해줬다. 만약 업동이가 여자로 이식 수술을 한다면 업동이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모습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내부에서 김향기가 어떠하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늑대소년>을 함께 했던 배우라 너무 좋다며 함께 하게 됐다.

-그외 다양한 국적의 조단역들이 영화를 채운다. 동시통역기가 있다는 설정하에 아랍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프랑스어, 나이지리아 피진어, 타갈로그어, 스페인어, 덴마크어 등 다채로운 언어가 등장한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에 붙어 있는 국기 역시 다양하다.

=택시나 버스 같은 영업용 차량 번호판처럼 미래의 우주선도 법제화가 돼 있어서 번호판과 배 주인의 국적 국기를 함께 달도록 했다고 상상했다. 지구는 영토가 나뉘어 있고 각 나라에서 쓰는 언어가 있지 않나. 그런데 우주 공간에서는 국가를 지우고 싶었다. 국적을 특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언어이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와 언어를 등장시켜 이곳을 무국적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틀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서 몇 단계의 검수 과정을 거쳤다. 가끔 할리우드영화에 한국말이 나올 때 말을 이상하게 할 때도 있지 않나. 우리는 그런 일이 없도록 배우는 물론 해당 언어 전공 교수님을 모셔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를 구현하려고 했다.

새로운 세대, 그리고 희망

-외국 배우 중 <호빗> 시리즈의 리처드 아미티지가 가장 인상 깊다. 우주개발기업 UTS 회장 제임스 설리반을 연기한다.

=우리 작품을 너무 좋아했던 배우다.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승리호>를 응원하는 마음도 갖고 있고. 내가 감동할 정도로 준비를 많이 해왔다. 촬영 전부터 동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부터 제프 베이조스, 누군가의 연설문도 발췌해서 보내주면서 이런 인물을 레퍼런스로 삼으면 어떠겠냐고 이메일로 의견을 줬다. 영화에 나온 설정, 대사 하나하나를 다 이해하려고 질문도 많이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현장에선 또 너무 유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한 작업이었다.

-설리반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깊이 얘기해보고 싶다. 의사이자 물리학자, 우주 공학자, 역사학자이며 현존하는 인류 중 가장 부자에 고령(152살)인 그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설리반이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물론 성질이 괴팍하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점 때문에 영화에선 좀더 못돼 보이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설리반이 우주 시대를 개척하고 영생의 비밀을 풀고 화성 테라포밍에 성공해 인류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곱씹어보면 이 인물이 단순한 악역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설리반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킨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더 멀리 가려고 하고. 야망을 갖고 범인류적인 도약을 꿈꾸는 사람들 때문에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성장에 희생은 불가피하지 않나. 그 뒤에는 남겨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람, 복지를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설리반은 전자다.

-그래서 설리반이 믿는 ‘좋은 세상’과 태호가 다짐하는 ‘좋은 사람’이 대비되는 거겠지.

=<승리호>는 태호가 순이에게 약속했던 ‘좋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행기다. 소년병으로 자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태호가 순이를 만나고 마음속 온기를 찾은 듯했으나 그것을 다시 잃는다. 그리고 꽃님이를 통해 자기 내면의 ‘좋은 사람’을 다시 발견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꽃님이가 “우주에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대요. 우주의 마음으로 보면 버릴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고요. 자기 자리에서 다 소중하다”고 하는 부분이었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과연 ‘좋은 세상’인가 아니면 뒤에 남겨진 사람들도 같이 가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 내 영화라고 너무 과잉 해석하는 것 같긴 하지만(웃음) 창작자로서 시나리오를 쓸 땐 이런 생각을 하며 썼다.

-‘승리호’는 업동이가 지은 이름이다. “선장이 좋은 거 아무거나 쓰라고 했는데, 그때는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썼다. 왜 영화 제목을 <승리호>라고 지었나.

=업동이와 비슷하다. 처음엔 적당히 유치하고 신나는 제목을 붙인 건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승리호의 ‘승리’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승리호>가 계급 이슈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전복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게 적을 척결하며 어떤 혁명을 일으키는 스토리는 아니지 않나. <승리호>에는 지구에 있는 버려진 사람들, 지구에서 조금 높이 올라간 우주에 있는 사람, 그보다 더 먼 화성에서 아늑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중 부자들이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담은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마지막까지 보면 UTS 사람들도 적이 아니고 다 같이 화합하게 된다. 제목은 ‘승리호’이지만 역으로 우리 모두 소중하고 다른 사람보다 못한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남매의 집>에는 어떤 종말론적인 상황에 갇혀 사는 가족이 나오고, <늑대소년>은 낯선 철수를 어린이들은 마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지만 어른들이 내치는 이야기였고,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은 자신의 혈육이기도 한 윗세대를 적으로 삼고 다음 세대인 어린이들과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넓은 의미의 가족 이야기를 꾸준히 다뤄왔는데 <승리호>는 아예 대안 가족을 탄생시키며 마무리된다. 송중기와 김태리가 주연을 맡는다고 하면 ‘러브 라인’을 기대하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는데 두 사람이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한다는 뉘앙스도 일절 없고. (웃음)

=굳이 여기서 꽃님이 엄마를 찾는다면 타이거 박 아닐까. (웃음) <승리호>의 가족은 이성애 기반의 결혼과 혈연으로 완성되는,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찾아보니 요즘 가족의 형태가 정말 다양해졌더라. 혼인신고는 안 했는데 동거인으로 법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우주선 밖으로 어디 갈 데도 없으니 싸우기도 하고 애증과 함께 누구보다 진한 유대도 있을 것이다. 태호, 장 선장, 타이거 박, 업동이 그리고 꽃님이는 가족이 될 수 있다.

-<탐정 홍길동> 마지막 신, 홍길동은 말순이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숨긴다. 언젠가 말순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승리호>의 꽃님이도 아빠를 잃고, 어른들은 아빠가 멀리 일하러 갔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나. 한편 태호는 죽은 순이를 떠나보내며 인생의 한 챕터를 마무리한다. 혈육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도했다기보다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지만 결국 새로운 가족 만들기를 계속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혈육을 떠나보냈지만 진짜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가는 것. 친남매나 친자식은 아니지만 이들처럼 함께 부대끼며 살 수 있다.

-태호는 순이를 만나고 사람을 해칠 수 없게 됐고, <늑대소년>에서 철수를 품어준 것도 시골 어린이들이었다. <탐정 홍길동>의 홍길동도 동이와 말순이 때문에 복수에 대한 집착을 놓게 되지 않나. 조성희 감독이 그리는 어린이들은 단순히 귀여운 신 스틸러가 아닌 희망의 상징 같다.

=희망이기도 하고, 일단 어린이들이 나오면 창작자로서 이야기에 안정감이 생긴다. 악당과 선한 주인공만 있으면 평면적이고 재미가 없다. 완전히 도덕적으로 무결한 캐릭터가 있어야 도덕적인 밸런스가 맞을 것만 같은데 그런 존재가 나에겐 어린이다. 어린이는 나쁜 점이 하나도 없는 성자 같다. 그리고 구세대에 대비되는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탐정 홍길동>은 이전 세대를 제거하고 다음 세대와 손잡는 의미를 담은 영화다. 전자는 아버지이면서 남성, 후자는 어린이면서 여성이었다. <승리호>도 나이가 많은 권력자 설리반이 등장하기 때문에 비슷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의식하며 시나리오를 쓴 건 아니지만 그렇게 영화가 읽히는 것에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어린이 혹은 어린이 같은 존재가 계속 등장해서일까, <늑대소년>에 이어 또 한글 쓰기 노트가 등장한다. <늑대소년>에서 열심히 한글을 배우던 송중기가 이번엔 학부모가 돼 아이의 노트를 보고!

=이 또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만(웃음),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연필 쥐고 무언가를 쓰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무해한 느낌이 있어서 계속 넣는 것 같다. 다음부터는 안 넣어야지.

-<탐정 홍길동> 다음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안 나오게 할 거라고 하고선 이번에 둘이나 나왔는데. (웃음)

=그렇네. 그래도 다음엔 한글 쓰기 노트를 안 넣겠다. (웃음)

-차기작 계획이 있나.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단계에 있진 않지만, 앞으로 영화를 좀더 부지런히 만들고 싶다. <탐정 홍길동>을 2015년에 찍었고, <승리호>가 2021년에 공개되다 보니 작품 텀이 너무 길어졌다. 앞으론 좀더 분발해서 적어도 3년에 한편씩 찍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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