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승리호'를 마냥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힘든 이유
2021-02-23
글 : 송경원
[송경원 기자의 프런트 라인]

감탄하면서 봤다. 아마도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가성비 영화일 것이다. 이만한 예산에 이만한 결과물을 뽑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꼭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집에서 보는 아쉬움을 삼키며 이 영화가 지닌 초월성에 대해 썼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말순이가 초월적으로 귀여웠다면 <승리호>의 꽃님이는 초월적으로 사랑스럽다. 그리고 순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네버랜드와 원더랜드 사이 어딘가에서

<승리호>를 싫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주를 무대로 한 영상의 완성도는 한국영화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나고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속도감은 경쾌하고 유려하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를 운항하는 승무원은 모자란 듯 꽉 차 알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참 쉽고 친절하며 착하다. 조성희 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승리호>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한시도 저버리지 않는다.

조성희 감독은 <승리호>를 “좋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행기”라고 했다. 그 말을 빌려오자면 이 영화는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한 항해와도 같고, 감독은 이를 위한 수단으로 이른바 ‘착한 것’들을 부지런히 수집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세상 애매한 수식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착함’이다. 개성을 짚어주는 여러 칭찬 중 어느 것 하나 꼭 짚어내기 힘들 때, 우리는 대개 착함이라는 안전한 단어를 고른다. 누구나 좋아해 비난받을 일 없고 딱히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목표 달성과는 무관하게 의지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두루뭉술한 언어. 유의어는 아니지만 비슷한 단어를 꼽으라면 유토피아가 떠오른다. 유토피아의 어원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착함이란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바람이다.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착한 영화 되기

승리호의 조종사 태호(송중기)는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는 딸 순이의 시체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중이다. 후반부에 가까스로 비겁하고 더러운 돈이 생기지만 그 순간 딸 순이와의 기억이 그를 붙잡는다. 순이가 남긴 노트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순이도 아빠처럼 좋은 사람 될 거야’라고 쓰여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플래시백을 통해 직접 눈앞에, 이토록 노골적으로 펼쳐내길 주저하지 않는데도 <승리호>에 그다지 거부감이 일진 않는다. 촌스런 신파라기 보단 오히려 다시 승리호의 일원이 되는 태호처럼 <승리호>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을 무장해제시키는 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조성희 영화의 저력은 여기에 있다. 좋은 것, 착한 것에 대한 갈구. 이 영화의 숱한 구멍과 이야기의 속도를 잡아끄는 약점들, 때론 넘치고 종종 모자란 것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싫어하기가 힘든 건 영화가 재현한 세계가 착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가 동화라고 쉽게 납득하고(혹은 깔보고) 넘어가는 그것. 영화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려는 순간 저 삐뚤빼뚤한 글씨에 담긴 진심과 선의마저 외면하는 것 같은 사소한 죄책감이 피어난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다. 조성희 영화는 언제나 아이들로 대변되는 순수를 향해 직진한다. <늑대소년>(2012)을 두고 낭만적인 로맨스로 가득한 동화라고 느끼거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 2016)이 판타지 모험담처럼 다가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성희 월드의 중력의 중심에는 항상 어린이가 있다. 이건 아이를 데려다놓고 귀여움을 전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조성희는 아이의 시선에서 상황을 재현한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순수. 아이가 느낄 만한 반응, 아이가 상상할 법한 일들이 그의 영화의 행동 원리다.

아이의 시선에서 그려진 재현은 장르의 옷을 입는 과정에서 몇 가지 기묘한 충돌을 자아낸다. <승리호>에서 꽃님이(박예린)의 아버지 강현우 박사(김무열)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이상하다. 승리호와 검은 여우단이 접선하는 장소에 잠복해 있다가 이를 습격한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은 꽃님이와 승리호 선원들을 제외한 모두를 제거할 것을 명령하고 UTS 기동대는 강 박사를 향해 잔인하게 수십 차례 총격을 가한다. 뇌수가 흩뿌려지고 살점이 여기저기 튀어야 마땅할 정도의 과도한 폭력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뒤 강 박사의 시체를 치우는 장면을 보면 주변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사실적인 재현에 집중하는 영화는 아니니까. 그저 단순히 12세 관람가를 위한 수위 조절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괴리라면 설명, 아니 약간의 변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욕망이 충돌한다. 하나는 액션 활극답게 시원스런 총격 장면을 전시하고 싶은 욕망, 다른 하나는 잔인한 묘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다. 조성희 영화에선 그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금지되어 있다. 승리호 선원들이 수시로 꽃님이의 눈을 가리는 것처럼 감독은 관객의 눈을 가린다. 그것은 아이들의 상상, 이미지 속에선 존재 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승리호>에서 응집된 조성희 영화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관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들(혹은 덜 자란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 아이가 그린 낙관적 디스토피아

조성희 영화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상상된 세계를 구현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지금 여기가 아닌 시공간을 필요로 한다. 만약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것으로 한정했을 때 그의 영화는 미지의 폭력 앞에서 불안에 떠는 <남매의 집>(2008)과 같은 호러의 껍질을 쓴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선 알 수 없는 상상의 세계지만 성인 관객은 익히 알고 있기에 반대로 아이들의 반응을 애처롭게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늑대소년>이나 <탐정 홍길동>처럼 성인이 주인공일 때는 어떻게 될까. 흥미로운 현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들 영화에는 어른이 없다. 어른인 척하는, 혹은 물리적으로만 어른인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늑대소년>은 제목 그대로 소년과 소녀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47년 동안 순이를 기다린 철수는 물론 47년 후 할머니가 된 순이가 스스로 고백하듯 그들은 시간에서 박제된 채 영원을 산다. <탐정 홍길동>에서 홍길동은 어떤가. 그는 덜 자란 피터팬 같은 남자다. 냉혹한 전문가, 탐정의 옷을 입고 있지만 꼬마가 트렌치코트를 입은 것처럼 그의 행동 원리에는 순진함과 낭만이 가득 차 있다.

승리호의 네명의 선원이 꽃님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면 일종의 유사 가족이 연상된다. 승리호라는 배 안에서 태호는 자연스럽게 아빠, 장 선장(김태리)은 엄마, 타이거 박(진선규)은 삼촌, 업동이(유해진)는 언니 정도로 설정되기 딱 좋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들의 관계는 역할을 분담한 가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자아가 네개로 분열된 것처럼 보인다. 태호는 자신의 잘못으로 가슴으로 키운 딸 순이(오지율)를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꽃님이가 들어온다. 꽃님이를 받아들여야 할 서사적 당위의 중심에 태호가 있는 만큼 태호는 꽃님이를 가장 천천히 받아들인다. 나머지 타이거 박, 업동이, 장 선장은 각각 다른 타이밍과 이유로 꽃님이를 긍정하게 되는데, 아이를 사랑하는 순수한 남자 타이거 박은 거의 처음부터 꽃님이를 좋아한다. 장 선장은 꽃님이가 UTS에 치명타를 먹일 중요한 존재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업동이는 꽃님이가 폭탄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채고서부터 자연스럽게 일원처럼 대한다.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능력자, 전문가들이지만 아이에 대해서만큼은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 없이 행동한다. 겉모습만 거칠고 위악적일 뿐 한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 승리호 선원들의 공통점은 (단지 속도의 차이가있을 뿐) 꽃님이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사 패턴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목표, 예를 들면 돈과 아이라는 단순한 갈림길을 제시하고 결국엔 아이로 상징되는 착한 행동을 선택하는 것 하나뿐이다. 이건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는, 성장의 서사가 아니다. 각각의 사연으로 위장된 삶을 살던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원래 그러했던 인물들이 각기 다른 방식과 속도와 에피소드로 다채롭게 상황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네명의 선원은 <인사이드 아웃>(2015)의 네 가지 감정처럼 각자 어린아이의 속성을 하나씩 분배받아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이건 승리호라는 이름의 한명의 어린이가 아이답게 행동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정반대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설리반 역시 유아적인 사고와 패턴에서 한치 벗어나지 않는, 덜 자란 어른이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간 조성희 영화에서 악역에 해당하는 이들은 주로 기능으로 소비되고 구체적인 사연은 대개 생략되곤 했다. <늑대소년>에서 지태(유연석)가 대표적인데, 신형철 평론가는 “원수의 아들(과거)이고 가짜 아빠(현재)이며 끔찍한 남편(미래)이다. 지태는 그 악당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신형철의 스토리텔링, ‘타자, 낭만적 사랑, 그리고 악’, <씨네21> 882호)라고 분석했다. <늑대소년>의 악에는 사연이 없고 그저 당위로 행동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승리호>에선 다르다.

신형철 평론가는 당시 <늑대소년>의 감독판에서 지태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히든 스토리가 추가되는 걸 기대한다고 했지만 <승리호>를 보면 그게 꼭 좋은 방향만은 아닌 듯하다. 설리반의 경우 사연이 너무 많다. 많은데 허술하다. <승리호>의 최대 약점은 (아쉬운 영화가 늘 그렇듯) 빌런의 존재감이다. 설리반은 어린 시절 전쟁의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로 지구의 존재를 지우고 화성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동기도 단순하지만 그걸 수행하는 과정은 의사, 물리학자, 우주 공학자의 타이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천재가 꾸몄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단순하다. 그저 눈앞의 원인을 제거하고 안 보이면 평화롭다고 믿는, 그야말로 이불에 오줌을 지린 아이가 빨래를 하는 대신 옷을 버리는 걸 택하는 수준이다.

인류의 정화를 위해 선택받은 자만 데려가겠다는 그의 계획은 타노스의 과격한 버전에 가까운데, 그걸 수행하는 방식은 또 얼핏 조커와 겹치기도 한다. 설리반은 자신을 비난한 기자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스스로 타락하길 유도한다. 그렇게 죄를 저지르고 나면 부정한 존재로 치부하고 제거하는 교활한 시험을 반복하는데, 이 행동의 유일한 목적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타인을 통해 확인받는 자학적 쾌락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이건 설리반이 UTS 기동대 대장 자리에서 태호를 내친 이유와도 충돌한다. 설리반의 조건에 따르면 아이를 구하고 생명을 지킨다는 선한 행동을 통해 가치를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태호를 내친다. 한마디로 설리반은 독선과 아집에 가득 찬,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란 자신에게 좋은 사람일 것이다. 영화는 그를 위한 사연을 들려주려 하지만 설명을 할수록 캐릭터는 편편해지고 변명으로 변질된다.

설리반과 같은 허술한, 단순한, 조잡한 악역이 필요한 건 <승리호>가 선악이 명쾌한 아이의 시점에서 구현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쩔 수 없는 어른의 사정 같은 건 끼어들 수 없다. 혼자 음모를 꾸미고 실패한 악당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 의도치 않았겠지만 위성궤도 우주낙원 UTS에 살고 있던 5% 사람들에겐 ‘우리는 몰랐어’ 같은 면죄부가 주어진다. 시스템에 동참하고 혜택을 받은 순간부터 책임도 함께 따르지만 <승리호>는 악을 설리반 개인에서 몰아주며 이를 지워버린다. 여느 영화라면 허술함을 지적할 수 있는 불편한 지점이지만 왠지 <승리호>에선 이 부분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수준의 사고방식, 선악과 흑백 구분에서 디자인된 유아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소년, 소녀의 세상, 조성희 월드의 한없는 낙관이 드리우는 그림자라고 해도 좋겠다.

이제 우리는 당연히 이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승리호>에서 어른들이 어른의 육체에 아이의 영혼이 깃든 존재처럼 행동한다면 진짜 아이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승리호>에는 두명의 아이가 나온다. 꽃님이와 순이. 꽃님이는 나노봇 기술이 주입된 인류의 희망 같은 존재다. 꽃님이에게 영화조차 이유를 ‘끝내 밝혀내지 못한’ 어떤 기적이 일어나 나노봇을 조종하여 식물을 성장시키는 등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된것이다. 꽃님이는 성장과 평등, 개발과 환경이 대립하는 이 영화에서 환경과 순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철학적이고 생태학적이며 동화적인 캐릭터다. 여러 층위에서 접근 가능하겠지만 결국 제일 두드러지는 건 초월자, 다시 말해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면모다. 설명되지 않는 존재. 더 냉정하게는 승리호에서 유일하게 아이가 아닌 타자, 아이를 초월한 타자가 바로 꽃님이다.

아이, 타자, 초월자

영화에서 신기한(혹은 허술한) 장면 중 하나는 꽃님이가 수시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거다. 승리호 선원들은 선내 감시카메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님이를 종종 놓친다. 검은 여우단과 거래하기로 한 장소에서 정작 거래 대상인 꽃님이를 놓치는 것도 이상하다. 거래가 무산된 후 정비창에서도 꽃님이는 선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꽃님이가 사라지면 사건이 시작된다. 꽃님이는 유령처럼 사람들의 인지 바깥으로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영화 속 어디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다시 말해 꽃님이는 이야기의 통제 바깥에서 이야기의 물꼬를 터주며 종횡무진한다.

이건 아이가 지닌 속성과 닮았다. 아이들은 항상 사라진다. 우리는 모든 어린 시절을 지나왔지만 어린 시절의 정보들을 기억하고 체험을 환기할 뿐 그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는 언제나 미지의 존재이며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다. 조성희 감독은 이러한 이해 불가능한 존재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다면 그저 이해되지 않을 타자로 남겨두는 것이다. 정확히는 이해하고 품고 싶은 한없는 애정을 쏟아부으면서도 동시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영역임을 인정하고 거꾸로 아예 초월자의 지위를 부여해버리는 것이다. 여느 영화라면 ‘저게 말이 돼?’라고 반발할 지점, 예를 들면 해피엔딩을 위한 의지로 만들어낸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의 기적 같은 경우도 꽃님이가 그 주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태호의 죽은 딸 순이가 영원한 추억 속에서 살며 성장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어른의 육체와 (상상된) 아이의 영혼을 지닌 채 이야기를 꾸려간다면, 진짜 아이는 타자의 세계에 머물기 위해 초월성을 획득한다.

대개 타자는 공동체와 충돌하며 공동체가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여기서는 좋은 사람 되기)을 열어주는 기능을 한다. 그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공동체(어른들)로부터 오해받고 (순이처럼) 처단되거나 추방되기 마련이다. <늑대소년>의 철수나 <탐정 홍길동>의 말순 모두 이러한 과정을 밟았다. <승리호>는 다르다. 꽃님이는 승리호의 가족이 된다. 이후 어떤 가족으로 언제까지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조성희는 영원한 원더랜드에 머무는 대신 엔딩에서나마 드디어 이들의 시곗바늘이 미래를 향해 움직이도록 허락했다. 낭만이라는 영원으로 회귀했던 <늑대소년>과 모험이라는 영원을 이어갔던 <탐정 홍길동>과는 다른 첫 번째 엔딩. 어쩌면 이것이 피터팬을 스크린에 옮겨온 조성희 네버랜드의 완성형이자 마침표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여전히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강 박사가 중간에 그토록 잔인하게 사라져야 했던 건 어쩌면 꽃님이가 승리호의 가족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가족을 잃은 꽃님이를 승리호가 품어준 것이 아니라 승리호의 일원이 되기 위해 기존 가족이 사라져야 했던 건 아닌가하는 인과의 역전, 이야기의 욕망을 슬쩍 감지한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영원한 네버랜드에서 이상한 나라의 원더랜드로 넘어가는 것 정도의 과정이 아닐까. 어른이 된 내가 상상해보는 이상하고 어설프지만 사랑스러운 세상. 스크린에 불이꺼지면 이걸 다 포기하고 현실 세계로 복귀해야 함을, 안다. <승리호>를 신나게 보고 난 뒤 정작 평을 할 땐 너무 많이 보여주거나, 안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못한 것을 까다롭게 따져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토록 고되고 끔찍하고 힘든 일이다. <승리호>의 지나친 낙관과 해맑음이 거슬리면서도 솔직히 이 낭만적인 엔딩에 머물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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