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의 첫 방송을 기다리는 동안, 제목으로 삼은 대사를 입 밖으로 내도 괜찮을 상황을 생각해보았다. 후배의 화장품 파우치에서 립스틱을 빌리는 선배가 하필 사용 기한이 한참 지난 채로 굴러다니던 립스틱을 집었을 때 정도? 물론 저런 내용이라면 제목으로 뽑히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의 도발은 어떤 이들에겐 짜릿한 상상의 재료가 될 것이고, 나 같은 이들에겐 짜증 섞인 관심을 끌기 적당하다.
화장품 회사 마케터 윤송아(원진아)를 따르는 후배 채현승(로운)은 송아가 같은 팀 상사 이재신(이현욱)과 비밀리에 사내연애 중임을 알게 된다. 선배가 행복해 보이니 짝사랑을 접을 찰나, 재신이 다른 여자와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것을 목격한 현승은 이를 송아에게 고해바친다. 제목이자 첫회의 엔딩 대사는 저따위 남자를 만난다고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고쳐 바를 필요 없다는 뜻. 매회 엔딩마다 로맨스 장르에서 골백번 반복된 대사가 감미로운 중저음으로 나오는 바람에,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용도가 선명한 남자주인공이라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는 철저하게 이별 후 회복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무도 몰랐던 지난 연애의 증인이자 대화 상대인 현승의 중저음이 선배를 향한 믿음과 지지를 끊임없이 생산한다면 송아 역 배우 원진아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는 연애사가 어떻든 해야 할 일은 하는 직장인의 중심을 잡는다. 드라마 속 진정한 사랑은 왜들 그렇게 여자주인공이 큰 빚을 떠안는 상황이나 고용불안과 함께 오는지, 연애가 꼬이면 왜 일로도 망신을 겪어야 하는지 지긋지긋하던 터라 안정적인 직장에서 돈 문제에 얽히지 않고 매일 조금씩 회복되는 이야기가 편안하다. 송아가 업무 전달을 잊는 실수 장면이 있었다. 여주인공 능력치를 깎아 도와준 상대에게 기대게 하는 전개인가 했으나,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미리 처리한 현승은 송아의 고맙다는 인사에 선배가 그렇게 가르쳤고 배운 대로 했다고 말한다. 인간 피로회복제다.
VIEWPOINT
그 립스틱 바르든 말든
사귀다 헤어진 사람들이 같은 회사에서 얽히는 드라마에는 엘리베이터에서 불편하게 마주치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무시하는 상대 옆에서 빈정거리며 화를 돋우는 2007년 MBC 드라마 <케세라세라>의 엘리베이터를 돌아본다. “역시 한은수씨는 화장 안 한 게 훨씬 낫네요. 아침에 화장하니까 좀 무섭더라구요. 꼭 귀신처럼.” 강태주(에릭)가 시비를 걸자 한은수(정유미)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윗입술, 아랫입술 아주 빈틈없이 발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