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파고>의 프랜시스 맥도먼드
2002-05-1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어디에도 없던 여인, 강렬하게 빛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배우로 살아온 수십년 세월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수도 있는 이런 말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한다. 무장한 것처럼 단단한 그 말투에선 기억 속에 남지 못하는 배우의 서글픔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아주 일찍 스타가 되기를 체념했기 때문일까. 맥도먼드는 영화의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각인시키려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잊혀지는 편을 택해왔다. 그러나 그 체념은 동시에 누구의 카리스마보다도 강인한 고집에 가깝기도 했다. “관객을 끌어올 수는 없지만,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에겐 내 연기가 매혹”이라고 말하는 맥도먼드는 평범한 외모를 이기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망각의 표면 위에 솟아올랐다. <미시시피 버닝>과 <다크맨>을 흘려 보냈던 사람들은 더이상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조그만 시골 학교에서 <맥베스>의 한 구절을 암송하던 순간까지, 맥도먼드는 항상 잊혀지는 편이 더 익숙한 아이였다. 그녀는 성직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중부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덕분에 항상 또래들의 유행에 2년은 뒤처져 있었다. 미니스커트와 부츠 차림의 소녀들 틈에서 그녀는 혼자 물방울 무늬의 퍼프 소매 원피스를 입고 놀림받곤 했다. 차라리 공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었는데, 소리내어 희곡 대사를 읽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열 몇살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 야망에 눌려 미쳐버린 가엾은 맥베스의 아내를 발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맥도먼드는 신앙의 대기 속에 가라앉은 집을 떠나 “미쳐버린 것처럼 살 수 있는” 연기 학교로 향했다. 열네살 이후 단 한번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날마다 이어지는 연기수업과 열정적인 동료 홀리 헌터와의 우정은 독성없는 마약과도 같았다. 맥도먼드에게 조엘 코언을 소개한 사람도 홀리 헌터였다. 헌터는 “진짜 괴짜 두 사람”이 준비하고 있는 저예산영화의 오디션을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고, 별 생각없이 들른 오디션장에서 그녀는 <분노의 저격자>의 주연과 함께 18년 동안 서로를 받쳐줄 파트너를 낚았다.

맥도먼드는 남편이자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감독이기도 한 코언으로부터 때로 작은 선물까지 받았다. <파고>의 임신한 여경찰 역으로 얻어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그것이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냉정하고 나름대로 야심만만한 여인 역이 그것이다. “나는 항상 사이코 살인마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 남자는…>의 도리스가 처음이었다.” 항상 익숙한 인물만을 연기했던 그녀에게 살인 누명 앞에서도 속눈썹 한번 떨지 않는 도리스는 모처럼 찾아온 재미였던 것이다. 코르셋을 입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관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 남자는…>.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역할들을 겹쳐 하면서 스스로를 뚜렷하게 드러내온 그녀의 경험은 결코 허술하게 넘겨버릴 것이 아니다. 그녀의 신작 <바다 곁의 도시>를 연출하는 마이클 캔튼-존스는 “맥도먼드는 마치 우리 중의 하나처럼 보인다. 그것은 매우 보기 드문 재능”이라고 칭송했다.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그처럼 숨어버렸다가, 이렇게 강렬해진 배우는 맥도먼드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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