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높아진 성평등 의식과 현실의 괴리, 제도와 정책으로 좁혀나가야”
2021-03-03
글 : 배동미
사진 : 오계옥
875명의 영화인들이 참여해 목소리 낸 '2019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 조사 맡은 4인의 대담
심재명, 이나영, 문수연, 백조연(왼쪽부터).

“지난 2년은 <실>을 만들고 떠나보낸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면서 일상을 지켜내려 한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하 든든)의 도움을 받았다. 바쁜 와중에도 든든을 운영해준 여성 영화인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는 현장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영화 <실>로 지난 2월 9일 청룡영화상 청정원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이나연 감독이 단상에 올라 한 말이다. 이나연 감독의 바람처럼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 회복에 힘쓰는 성평등한 현장을 영화인 누구나 꿈꾼다. 이상 실현을 위해서는 실태 조사가 우선일 것이다. 한국영화계에서는 이제 막 두 번째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은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로 ‘2019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를 발표한다. 실태 조사에 독립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감독부터 영화미술 담당자까지, 총 875명의 영화인들이 참여해 목소리를 냈다. 성평등하고 창의적인 영화 현장을 꿈꾸며 실태 조사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씨네21>은 연구 책임자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와 문수연·백조연·심재명 공동 연구원을 모시고 대담을 마련했다.

이나영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페미니즘 이론, 섹슈얼리티, 초국적 여성운동을 비롯해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를 젠더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전국 성희롱 실태 조사, 성매매 실태 조사, 혐오 관련 실태 조사 등을 수행했다.

문수연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사회계급 및 계층, 젠더, 생애 과정과 노동 시장 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다. 계급과 교육 불평등, 서울시 120다산콜센터 감정노동 연구, 서울시 디지털 플랫폼노동 실태 연구 등을 수행했으며, 아시아의 불안정 노동 연구에 참여했다.

백조연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퀴어 정체성과 역사에 관심을 갖고 젠더·섹슈얼리티 인식 조사, 기지촌 여성 구술 채록, 일본군 위안부 활동가 인터뷰 등에 참여했다.

심재명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센터장이자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 기획이사. 든든 센터장으로서 영화산업 내 성폭력 예방교육, 피해자 지원, 성평등 영화정책 조사·연구·제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실태 조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이나영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다. 실태 조사 시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를 동시에 해야 전체 상황을 볼 수 있다. 양적 연구는 설문을 통해 전체적인 경향성을 파악하는 연구다. 이번 설문의 경우 질문 구성에만 3개월이 걸렸다. 질적 연구는 양적 연구에서 파악할 수 없는 구체적인 상황 연구를 목적으로 이뤄진다. 개인 면담도 있지만,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마련해 여러 명이 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문수연 설문 조사는 크게 9개 파트로, 성 고정관념, 조직 문화,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인식,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 타인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인지 경험,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해결 방안에 대한 인식, 성희롱 예방교육 경험과 평가, 근로환경, 그리고 응답자 특성으로 구성됐다. 큰 문항은 55개이고, 세부 문항까지 합하면 70개 정도다.

-이번 실태 조사에서 어떤 결과에 가장 주목해야 하나.

문수연 성희롱·성폭력 피해 비율이 2017년 실태 조사보다 약 10%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전체 기간 기준 여성의 74.6%, 남성의 37.9%가 피해를 경험했고, 최근 2년 기준 여성의 50.0%, 남성의 18.5%가 피해를 입었다고 답했다. 미투 운동 이후에 문제를 인지하는 민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피해 비율이 높게 나타나지 않았나 분석한다. 그중 미술·소품, 분장·의상 직군의 피해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두 직군은 여성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성별 위계가 작동해 피해가 많았다. 또 두 직군이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이 적다는 점에서 직군간의 위계가 작동해 성희롱·성폭력이 발생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가해 행위자의 상당수는 상급자였는데 이는 2017년 실태조사와 유사한 양상이다. 이번 연구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대체로 동일 직군에서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가해자 직군이 촬영·조명인 경우 피해자가 미술·소품(81.0%), 동시녹음(80.0%), 촬영·조명(77.1.%), 분장·의상(62.5%), 연출(53.0%) 순으로 나타났다. 가해 행위자 직군이 배우인 경우, 분장·의상(31.3%), 동시녹음(20.0%)의 피해 비율이 높으며, 행위자 직군이 평론·심사 및 자문·기자인 경우 배급·마케팅(33.3%) 직군의 피해 비율이 높았다.

심재명 직군 사이의 위계, 어떤 직군과 밀접하게 일하는지 등 영화 현장의 특수성 때문에 이런 수치가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특정 직군에서 가해 행위가 많이 나오는 건 확실히 특징적이다.

문수연 현장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이 강하다고 이야기되는 촬영·조명 직군의 가해 행위 비율(47.3%)이 가장 높았다. 촬영·조명 다음으로는 제작(31.0%), 연출(30.3%), 배우(10.3%) 순으로 가해 행위 비율이 높았다.

-현장을 잘 알고 있는 심재명 대표가 보기에 실태 조사 결과가 의아하진 않았나.

심재명 전혀. (웃음) 익히 알고 있거나 예측했던 내용대로 나왔다. 대신 성 고정관념과 미투 운동 이후 인식의 변화에 대한 영화인들의 답변 내용은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연령이 낮을수록, 여성일수록 훨씬 더 영화계의 성 고정관념 개선 의지가 높고, 현장에 대한 불만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피해 사례와 가해 사례는 예측했던 그대로다.

백조연 여성이 많은 직군인 분장·의상·헤어, 소품의 경우 영화계에서 기술보다 덜 전문적이고 보조적인 일을 맡는다는 인식이 있다. 이로 인해 일부 현장에서는 이들을 동료로 대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희롱·성폭력을 겪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나 분장·의상, 미술·소품은 네트워크나 별도의 조합이 따로 없어서 문제를 경험하더라도 공유하고 같이 문제제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없어 더 취약한 상황이다. 또 여성감독의 경우, 스탭들이 여성감독을 낯설어하는 경우가 많고 여성감독의 실력을 낮춰 보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감독은 성희롱 언행에 노출되기도 한다. 배우의 경우 남성 중심의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다 보니 여성배우가 일할 기회가 많지 않다. 이러한 환경에서 감독이 여성배우에게 캐스팅을 빌미로 연인 관계나 성적 행위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나영 아직 알려지지 않고 이제 막 입문한 어린 여배우들에게는 아직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공과 사라는 게 있지 않나. 하지만 공사 구분이 여전히 안되는 영화인들이 있다. 젊은 여배우들이 면접처럼 보이는 술자리에 나오라는 제안을 받으면, 가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술자리인지 면접인지, 면접이라면 공식적인 면접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더 나아가 이게 감독과 연애를 하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한 젊은 세대와 기존 세대 사이의 인식 간극이 굉장히 크다. 기성 세대는 그게 꼭 범죄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젊은 세대는 명백히 인권침해라고 보는 것이다.

백조연 또 작가 직군의 경우,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각본을 쓰게 됐을 때 투자사나 제작사로부터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꾸라고 요구받고, 남성감독이 시나리오를 수정할 경우 여성 캐릭터가 성적으로 어필을 한다거나, 노출이 있는 의상을 입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난다. 또 작가들은 감독과 계속 회의를 해야 하는데, 공적인 장소가 아닌 사적인 장소에서 회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계속 이런 경계들 속에서 영화인들이 성희롱을 경험한다.

한국영화계의 특수성

-성희롱·성폭력 피해와 관련한 한국영화계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심재명 국가인권위원회, 양성평등위원회, 회사나 기업에서 적용되는 각종 법률을 영화계에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영화산업은 프로젝트별로 계약을 맺는다. 만약 내가 제작하는 영화 현장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는 당사자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풀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제작자인 나는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피해 사실을 발화했을 때 현장이 중단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피해자는 입을 닫는다. 영화산업노조가 수년 동안 노력해서 영화산업근로표준계약서 적용이 이뤄졌듯이 성희롱·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법적 규제나 지원이 필요하다.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방지를 위한 특별법(가칭)’이 그것이다. 표준근로계약서에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가해자를 제재하고 피해자를 구제할지 해법을 명시해야 한다. 든든에서 성희롱·성폭력 발생 시 합의와 중재, 사과 권유, 법률과 의료 지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법적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여성영화인모임이나 든든, 영진위 단위에서 끝낼 게 아니라 직능별 조합과 영화계 전체에서 머리를 맞대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연구진은 여러 분야에서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에 참여했을 텐데 영화계 성희롱·성폭력은 어떤 점에서 달랐나.

이나영 2회의 전국 성희롱 실태 조사, 성매매 실태 조사를 진행해왔다. 이 조사들과 비교해 영화계만의 특수성이라면, 무엇보다 균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계는 산업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직군별로도 차이가 있고 계약 관계도 다양하다. 하나의 조사에서 모든 직군의 모든 경험을 파악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영화계의 또 다른 특수성은 표현의 자유다. 공사 구분이 없고 사람들이 몸으로 뭔가를 표현하고 창작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너무 억압적이면 자유롭게 사유하고 표현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하더라. 하지만 미투 운동이 영화계에서 주도적으로 나왔다는 점은 중요하다. 영화인들이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는 곳일수록 오히려 긍정적일 수 있다. 사람들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훨씬 더 해결 의지가 높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할 가능성도 높다.

-성별간, 연령간, 직군간 가장 큰 차이를 보였던 조사 결과는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주목해야 하나.

문수연 성별 차이를 보면, 성 고정관념을 조사하는 10개 세부항목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경향이 나타났고, 조직문화 10개 항목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기존 영화계 문화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부정적으로 봤다. 성별로 가장 차이가 컸던 건 ‘가슴,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쳐다봄’ 행위가 성희롱인지를 묻는 항목으로 남성의 답변 비율이 여성보다 10%포인트 낮게 나타났다. 시각적인 성희롱을 성희롱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차이가 큰 건 피해 비율이다. 피해자가 남성일 때도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다.

이나영 성별과 연령에 따라 실태 조사 결과가 교차한다.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결국 권력의 문제다. 일반 직장에서도 하위직에 있는 사람이거나 임시직, 혹은 여성이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계도 비슷하다. 피해자는 20대 여성, 가해자는 40대 남성이 가장 많았다. 다른 산업에서는 가해자가 50대일 경우가 가장 많은데 영화계는 40대가 많다.

심재명 영화 현장에 50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나영 보통의 경우 가해자는 부장급으로 넘어가는 정규직 50대 남성이 가장 많다.

문수연 또 촬영·조명 직군은 가해 비율이 가장 높지만 피해 비율은 가장 낮은 직군이고, 미술·소품, 분장·의상은 피해 비율이 가장 높은 직군이다. 제작과 연출 직군은 가해와 피해 비율이 모두 높다. 직군과 성별을 같이 놓고 봤을 때 여성이면서 촬영 직군에 종사하는 이들의 피해 비율이 가장 높다. 여성이면서 제작, 여성이면서 연출인 경우에도 피해 비율이 높다. 성별을 고려하지 않고 직군만 놓고 봤을 땐 사실 촬영·조명 직군에 남성이 많기 때문에 피해 비율이 낮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남성들이 많이 일하는 직군에서 일하는 소수 여성의 피해 비율이 가장 높다.

예방교육에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성희롱·성폭력이 일어나기 전 예방교육도 중요할 것이다.

문수연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의 효과에 대해 연령대가 낮을수록 효과가 없다고 평가했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제작사, 배우, 키스탭 등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들이 볼 때 정작 현장에서 권한을 갖고 가해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교육을 안 받기 때문이다.

심재명 영진위의 지원을 받는 영화는 필수적으로 든든으로부터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받도록 돼 있다. 일반 상업영화들은 강사 자격을 취득한 전문가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노무사가 약식으로 표준근로계약서 내용을 인지시키면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하기도 한다. 든든에서 예방교육 강의를 나갈 때, 영화 촬영 전 시나리오 리딩이나 워크숍 기간에 소화하길 요구받는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영화인들이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어 아쉬울 때도 있고, 특히 헤드스탭이나 최종 의사결정권자들이 교육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주연배우, 회사 대표, 감독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상 대부분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다. 또 교육 참여 인원의 문제도 있다. 가령 어떤 영화가 영진위의 지원을 받았을 경우, 스탭 중 10명이 교육을 들어도 그 영화 현장은 교육을 완수한 것이고, 30명이 들어도 완수한 게 된다. 지금으로선 강제력이 없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많이 참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해당 스탭의 몇 퍼센트가 교육을 들어야 하는지와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이들에 헤드스탭을 포함시키는 등의 가이드라인과 규정이 필요하다.

-실제로 현장에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시간은 얼마나 되나.

심재명 기존에 2시간이었는데 길다는 반응이 있어 지금은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 진행한다. 든든에서는 프로그램 개발과 강사진 재교육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교육 내용이 불만족스럽거나 여러 번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강사진의 재교육과 커리큘럼, 타깃별 교육 내용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이나영 든든의 경우, 영화계에 종사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강사진을 꾸렸기 때문에 든든 강사들에게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은 영화인들은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심재명 대표가 말한 대로, 성희롱·성폭력 교육에도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 영진위가 규정을 만들어 든든이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가령 현장 영화인이 1년에 1번은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서서 듣지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계는 성희롱 · 성폭력 위험 지대?

-가해 행위의 특성을 보면 행위자가 상급자(65.3%)인 경우가 가장 많다. 이는 일반적인 성희롱, 성폭력 사례와 비슷하다. 성희롱과 성폭력은 결국 권력과 위계의 문제인 것 같다. 연구진은 한국영화계가 다른 분야보다 심각한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가.

이나영 영화계의 현실을 가늠하고 이해하는 하나의 척도로 사용해야지, 다른 분야와 비교하는 기준으로 사용해선 안된다. 설문의 문항도 영화계에 맞게 만들어졌기 떄문에 다른 분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화계 종사자들이 스스로 현실의 문제를 깨닫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문제의식이 높을수록 변화의 가능성은 확실히 높기 때문이다. 실제 만나본 영화인들은 과거에 스스럼없이 했던 언설이 지금 보니 성희롱이라며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들 한다. 조심하다보면 생각도 바뀌고 당연하다고 여기던 행동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겠나. 한국영화의 희망적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강조하는 분들이 많았다.

-현장 영화인들의 인식이 이처럼 바뀐 변곡점은 무엇인가.

심재명 역시 미투 운동이다. 나 역시 피해 여부를 묻는 문항에 답을 해봤는데 평생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해당이 안되는 게 없더라. 하지만 영화인들이 미투 이후로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영화산업은 피해 사실을 이야기해 경력 단절을 겪는다든가 평판이 떨어진다든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악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프리랜서 고용 형태를 띠고 있지만 개인의 재능이나 캐릭터가 중요한 산업이기도 하다. 단언할 순 없지만 영화계가 유난히 심각하다고 보진 않는다. 영화인들의 문제의식이 남다르고 다른 대중문화예술계에는 없는, 민관이 함께하는 성폭력 상담센터가 탄생한 건 굉장히 특이한 사례다. 그리고 영화계에 진입한 젊은 여성 영화인들의 성 감수성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다.

이나영 위계 문화나 연줄 문화가 문제긴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게 없는 영역은 없다. 대신 영화인들은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개인의 재능이 뭔가를 만들고 돈을 버는 영역으로써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이 또 영화계다. 이는 굉장히 특수한 동력이다. 영화계에는 또한 감독과 배우 등 공인이 많은데 가해자가 공인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공인들이기 때문에 가해자 낙인도 두려울 수 있다. 문제의식이 높아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감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해주다 보면 상호통제가 가능해진다. 권력관계가 다양하게 맞물리면 자정 가능성도 커진다.

문수연 가해자가 키스탭이었는데, 사건 발생 이후 현장에서 즉시 분리된 사례도 있었다. 문제 해결 의지가 있고 사건을 덮거나 그냥 넘어갔을 때 영화 촬영에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런 선례는 영화계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나영 문제를 중재하는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다르다. 좋은 사례들이 공론화되고 모델 케이스가 생기면,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이렇게 해결된다는 그림이 있기 때문에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다. 또 면접 조사에 참여한 배우와 스탭들이, 확실히 여성 영화인이 있는 현장은 다르다고 이야기 하더라. 예방교육과 성평등한 현장을 강조하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해결될거란 믿음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심재명 실제로 상업영화 제작자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해고하고 방출한 경우가 있다. 지금은 관행적으로 실무 프로듀서가 성폭력 문제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장에서 위계에 의해서 누군가가 성폭력을 당했을 경우 프로듀서가 피해 사실을 듣고, 가해자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해자를 해고할 것인지를 두고 문제를 공론화한다. 관행적으로 프로듀서가 이 역할을 맡는 것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장에는 근로자 대표가 존재한다. 표준근로계약서에 따라 영화 스탭 중 근로자 대표를 맡은 이는 업무 시간이나 근로환경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하고 투표를 진행하고 의사 결정을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사람은 없다. 제작자가 관행적으로 이 역할을 하지만 근로자 대표처럼 제도화되지 않은 건 문제다.

-마지막으로 실태 조사를 진행하면서 각자가 느꼈던 소회를 듣고 싶다.

백조연 가장 인상 깊은 건 면접 조사에 참여했던 분들 중 자신만을 위해서 이야기하러 온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목소리를 내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성 영화인들을 위해 변화를 만들 거란 각오를 하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또 이들은 서로 연대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심재명 실태 조사는 앞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하고, 내용에 깊이를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 내용, 직군별 분포도에 대한 배려라든가, 이번에도 시도한 심층면접, 초접점 집단면접 등 여러 방식을 통해 더 많은 분들이 실태 조사에 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느꼈다. 조사 결과를 보면, 결국 가해자가 많았던 직군과 피해자가 많았던 직군간의 임금 격차가 컸다. 어쩌면 성평등한 영화 현장을 만드는 게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가장 중요한 해결법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영화인이 늘어날 필요가 있다고 절감했다. 또 설문 결과를 보면, 든든의 인지도가 너무 낮아서 더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 사실을 말했을 때 도움을 주고 지원해줄 수 있는 단체가 있다는 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 영화인에 대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대처법을 알고 이미 준비돼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영화 현장에 진입했을 때 피해 회복 방법이 다르다. 모르고 당하는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

문수연 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성희롱·성폭력 피해 이후 문제의식이 높아졌다거나 기대 수준이 높아졌다고 응답한 이들이 많았다. 현재는 성평등한 문화에 대한 영화인들의 인식 변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연령간 인식 격차도 큰 과도기다. 정책과 영화계 문화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일 경우, 높아진 성평등 의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더 커질 수 있다. 문제의식이 실천으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와 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설문 조사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해달라는 문항에 “이런다고 변화가 있겠느냐”고 회의감을 드러낸 분들이 있었다. 앞으로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가 체계화되고 정례화될 필요가 있다. 다음 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없다면 영화인들의 실태 조사 참여가 저조해지지 않을까.

이나영 영화계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를 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연속해서 몇년째 영화계에 관심을 가지며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영화계를 떠받치고 있구나, 그게 한국영화의 힘이구나’라고 느꼈다. 그 열정과 애정이 꼭 성평등뿐만 아니라 직군간 차별이나 불균형적인 노동 조건들을 바꿔나가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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