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두 사람이 걷던 이 길을 이 밤에 나 혼자서 걸어가는데.” 가수 배호의 노래 <비 내리는 밤길>이 들려오며 영화가 시작된다.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 <밤빛>의 두 주인공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극중 희태(송재룡)는 한번도 본 적 없던 아들 민상(지대한)과 함께 산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짧은 대화만 오갈 뿐이지만 잠든 아들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아픈 아버지에게 감기약을 건네는 아들의 손길엔 쓸쓸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밤빛>은 죽음을 앞둔 희태가 민상과 함께한 2박3일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칼아츠에서 영화를 공부한 김무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겨울산과 여름산의 모습을 부자 관계와 엮어 대조적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밤빛>은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돼 일찍이 관객과 만났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밤빛>의 개봉과 함께, 김무영 감독과 희태와 민상 부자의 동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산이라는 장소에 원래 관심이 많았다고.
=옛날부터 산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산은 항상 어딘가 모르게 다른 공간처럼 느껴진다. 미국에 있을 때 지인이 운해가 자주 끼는 산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 재밌는 곳이라 생각해 그곳을 기반으로 단편을 쓰다가 귀국하게 됐다. 이후 심마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흥미롭게 봤고, 거기서 얻은 영감을 더해 <밤빛>을 완성했다.
-영화에서 산은 어떤 공간으로 설정했나.
=중간적인 공간으로 생각했다. 암을 앓고 있는 희태는 죽음의 영역에, 민상은 생의 영역에 위치한 사람이다. 그런 희태와 민상이 생과 사의 중간 지대인 산에서 조우한다. 옛날부터 조상들은 산을 중간 지대로 생각했다더라. 그래서 제사도 주로 산에서 지냈고.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제 방태산, 태백 함백산 등 영화의 주요 배경이 전부 높은 산이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강원도다 보니 바람이 세고 날씨가 추웠고, 특히 자작나무 숲은 관광객의 소리를 통제하기 어려워 3번 정도 다시 찍어야 했다. 희태 집도 동네 이장님의 추천으로 겨우 찾았다. 실제 심마니가 살던 집이었는데 집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어서 매번 올라가는 게 쉽진 않았다. 하지만 그만한 집을 찾기 어려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송재룡, 지대한 배우는 어떻게 섭외하게 됐나.
=송재룡 배우는 드라마 <미생>에서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 깊었다. 송재룡 배우만 톤이 다르더라. 배우 특유의 현실감과 에너지가 희태랑 비슷하다고 느껴 섭외했다. 지대한 배우는 <마이 리틀 히어로>에서 보여준 모습이 자연스럽고 좋아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다. 감정이 과잉되거나 스피드가 너무 빠를 때에만 내가 컨트롤했고, 대체로 두 배우를 믿고 맡겼다.
-희태와 민상 사이에 의도적으로 침묵을 배치했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어떤 의미가 담긴 연출인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성격 때문이고, 둘째로 내가 대사를 통해 서사를 완결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고, 정보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대사를 넣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연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대사로 뭔가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신이 많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있진 않아도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몇 차례 받았다. 희태와 민상이 만나기 전, 겨울산에 오른 희태와 기차에 탄 민상의 장면이 오버랩된다. 두 사람이 마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어지던데.
=추석에 아버지와 산소에 갔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에 관해 들은 적 있다. 부모는 자식을 또 다른 자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더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죽어도 자식을 통해 계속 생이 이어지는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이걸 환생으로 치환해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후 환생과 분신이라는 개념을 계속 염두에 두고 희태와 민상의 관계를 그려나갔다. 희태와 민상의 모습이 그렇게 오버랩되는 것도 내가 민상을 희태의 분신처럼 표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민상이 떠난 뒤 혼자 남은 희태가 산을 오르고, 홀로 정상에 오른 민상이 다시 산을 내려가는 신이 이어진다.
=같은 의미가 담겼다. 때문에 그 신에서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이 같다. 그 밖에 거울을 통해서도 같은 주제를 드러내고 싶었다. 다만 이때는 희태와 민상이 거울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데,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변주가 존재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여름과 겨울의 대비도 극명하다. 겨울이 희태의 외로운 시간이라면, 여름은 희태와 민상이 함께하며 생기로 반짝이는 시간이다.
=말한 대로 겨울은 희태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고, 반대로 민상과 함께하는 여름엔 생명력을 부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극중 겨울-여름-겨울 순으로 계절이 반복된다. 마지막 겨울에는 민상이 혼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이 겨울을 좀 다르게 받아들였으면 했다. 말하자면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말이다.
-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김보람 촬영감독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다.
=사실 난 어둠이 더 짙게 깔린 상황에서 빛이 더 공격적으로 들어오길 원했다. 김보람 촬영감독이 그렇게 찍으면 안된다고 말리더라.(웃음) 결국 인공조명을 줄이고 자연광을 많이 쓰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또 원래는 불편한 지점을 더 그려보고 싶었는데 김보람 촬영감독과 이야기하면서 훨씬 대중적인 스타일로 완성하게 됐다. 촬영까지 전부 혼자 작업하는 방식이 익숙해서 처음엔 협업 자체가 어려웠는데, 나중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다 아는 편한 사이가 됐다.
-<밤빛>이란 제목의 의미는.
=밤에 별을 바라보고,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고, 초에 불을 밝히는 순간까지 전부 아우른다. 미국에서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제목이 <Night Light>였다. 그걸 <밤빛>으로 그대로 직역했다. 다른 제목도 생각해봤는데 역시 이게 제일 맘에 들더라.
-처음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나.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가족들이 전부 영화광이었다. 영화가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브라질>을 인상 깊게 본 뒤로 더 다양한 영화를 찾아보게 됐고, 많이 보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끄적이게 됐다. 이후 한국독립영화협회와 칼아츠에서 영화 제작 수업을 들었다. 특히 칼아츠에서는 실험영화나 다큐멘터리, 영상 설치 등 기존에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다양한 작업 방식을 배웠다. 영화 밖의 사회적 현상을 영화 안으로 들여오는 시선에 관해서도 그때 알게 됐다.
-차기작 계획은.
=장충동에 반공 이념을 기리며 세워진 남산자유센터가 있다. 이 건물을 시작으로 권력과 창작자, 재현의 상관관계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다큐멘터리고 현재 40% 정도 제작이 진행됐다. 내년 안에 완성작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