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영화 '정말 먼 곳' 연이은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는 작품
2021-03-16
글 : 김성훈

서울에서 사람들의 시선에 지친 진우(강길우)는 강원도 화천에 내려가 새 출발을 한다. 그의 곁에는 귀엽고 영리한 딸 설(김시하)이 있다. 부녀는 이해심이 넓은 중만(기주봉)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안락한 목장 생활을 한다. 진우가 설을 보살피듯 중만 또한 딸 문경(기도영)과 어머니 명순(최금순)을 모시고 살아가는 양목장 주인이다. 조용하고 평온한 시골 생활은 현민(홍경)과 은영(이상희)이 진우 앞에 나타나면서 균열이 생긴다. 진우의 연인인 현민은 진우를 따라 화천으로 내려와 성당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연락이 두절됐던 진우의 쌍둥이 동생 은영은 갑자기 나타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자신의 딸인 설을 데리고 서울에 가 평범하게 키우겠다고 말한다.

전작 <한강에게>(2019)에서 연인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무너져내린 여성의 일상을 담담하게 담아낸 박근영 감독은 신작 <정말 먼 곳>에서도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상처를 받은 남자가 연고도 없는 곳에 거처를 꾸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거리를 둔 채 바라본다.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딸과 함께 수십 마리의 양 떼를 돌보고, 자신과 딸을 가족처럼 돌봐주는 중만 가족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문경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는 진우의 모습은 화천의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져 한폭의 풍경화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카메라와 인물간의 거리감 때문인지 진우의 평범한 일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화면에 드리우는 것도 사실이다.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상황 전개가 벌어지진 않지만 영화는 진우의 잔잔한 내면에 큰 물결이 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감정이나 고민을 내색하지 않은 채 설을 묵묵히 키우고, 성실하게 일하는 진우의 일상은 겉으로는 단단한 바위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영화는 그가 왜 화천까지 오게 되었는지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든다. 그에 대한 궁금증은 현민과 은영이 진우 앞에 나타나 진우의 일상을 뒤흔들 때 영화적 긴장감으로 변모한다. 특히 진우와 현민의 관계는 두 남자를 설명하는 중요한 설정인 동시에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진우를 포함해 현민, 은영 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사회적 시선, 주변 환경, 살아온 삶의 궤적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번번이 좌절하고, 또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진우와 현민, 진우와 은영 등 이들의 고민과 이해관계가 얽히고, 그들이 바라는 삶과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안타깝다. 화창한 날부터 검은 그림자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화천의 날씨는 마치 그들의 복잡한 감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서사에 스며드는 긴장감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덕분이다. 박근영 감독의 데뷔작 <한강에게>로 이미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강길우는 진우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대사가 많지 않은데도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빚어냈다. 홍경은 진우의 오랜 연인인 현민의 감정을 밝은 얼굴 뒤로 꾹꾹 눌러담았다. 이상희는 갑자기 진우 앞에 나타나 그의 일상을 뒤흔드는 은영의 보이지 않는 전사까지 채워넣는다. 이 밖에도 실제로 부녀 관계인 기주봉과 기도영이 각각 맡은 중만과 문경은 진우와 설의 화천 생활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며 유사 가족의 모습을 제대로 묘사한다. <정말 먼 곳>은 연이은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작은 희망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다.

CHECK POINT

카메라

양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기보다는 거리를 둔 채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저 지켜보고 담아낼 뿐이다. 클로즈업숏이 손에 꼽을 만큼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컷 분할 없이 긴 호흡으로 움직이는 인물의 동선과 행동은 공간의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이야기에 독특한 정서와 공기를 불어넣는다.

마법 같은 우연들

이 영화에는 제작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여럿 등장한다. 진우와 설이 양목장에서 일하는 영화의 초반부, 컨트롤이 전혀 불가능한 양들이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모습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대한 눈구름은 시각특수효과(VFX)가 주지 못하는 감흥을 던지는 장면이다.

영화의 또 다른 캐릭터, 강원도 화천

리안 감독의 2005년작 <브로크백 마운틴>이 미국 서부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면 <정말 먼 곳>은 강원도 화천을 주무대로 삼은 영화다.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한국에 이런 풍경이 있나 싶을 만큼 낯선 공간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화천의 자연 풍광은 여러 차례 물결치는 인물들의 복합적인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