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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먼 곳' 박근영 감독 - 잠시, 영화의 안식처에 머물다
2021-03-18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시적 영화를 염원하는 작가들의 이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박근영 감독은 지금 한국 독립영화 신에서 그런 드문 움직임을 조용히 이어나가고 있는 감독이다. 데뷔작 <한강에게>(2018)에서 어느 시인의 일상을 빌려 동시대와 호흡하는 죄의식을 풀어낸 그는, 이번 신작 <정말 먼 곳>에서 안식처를 찾는 동성 연인의 발자취를 따라 풍경과 정서를 쌓아나간다.

서울을 떠나 딸 설(김시하)과 함께 목장에서 생활하는 남자 진우(강길우)에게 어느 날 연인 현민(홍경)과 쌍둥이 동생 은영(이상희)이 찾아오면서 균열은 시작된다. 강원도 화천에서 얻은 공간의 심상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써내려간 뒤, 그곳의 자연이 안기는 우연과 신비에 힘입어 비로소 영화를 완성한 박근영 감독과 영화처럼 가만가만 대화를 나눴다.

-양의 몸통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오프닝을 시작해, 죽은 양의 털을 벗기는 남자 진우, 그를 엄마라고 부르는 딸 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일반적인 연상을 조금씩 위배해나가는 전개로 느꼈다.

=처음 강길우 배우에게 화천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할 때부터 머릿속에 그렸던 몇몇 장면 중에 지금의 오프닝 신도 있었다. 로케이션으로 쓴 목장은 촬영 전부터 내가 종종 방문하던 곳이었는데, 깔끔하게 잘 가꾸어진 일반적인 목장과는 달랐다. 그곳에서 본 양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새하얗고 순한 이미지와 달리 털에 얼룩도 많고 더러운 모습이었다. 양털을 가까이서 자세히 보자 아무렇게나 엉키고 헝클어진 실체가 보였다. 그것이 내가 <정말 먼 곳>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방식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설이 진우를 엄마라고 부르는 설정은 내 유년에서 끄집어냈다. 한동안 어머니가 부재했는데, 그때 이모를 할머니라 부르고 아버지에게 엄마라고 불렀다. 젠더와 혈연의 개념이 녹아 있는 이번 영화와 잘 어울리는, 하나의 암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촬영 전부터 화천을 자주 드나들었다면 평소에도 목가적인 생활과 가까운 편인가.

=그렇진 않다. 나도 도시에서 평범히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우연히 화천이란 공간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진득이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먼 곳>은 내가 경험해보고 싶은 공간에 인물들을 그려넣어 먼저 상상해본 결과물에 가깝다.

-박은지 시인의 2018년 신춘문예 당선작 <정말 먼 곳>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 박은지 시인과는 국문과 동기인데,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말 먼 곳’의 의미를 함께 나눴나.

=“이 시를 쓰게 된 당신의 계기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시에서 받은 나의 생각과 영감에 충실한 채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고 시인에게 처음 전했었다. 편한 친구 사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시인도 그것이 곧 시의 확장성이라는 데 동의하고, 나의 뜻을 무척 응원해주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나서야 다시 만나 각자가 생각한 정말 먼 곳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정말 먼 곳이 ‘안식처’였다면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하더라. 일맥상통하면서 또 다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금 발 디딘 현실에 대한 비관이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

-서울을 떠나 화천에 자리한 진우뿐 아니라, 목장 주인인 중만(기주봉)의 어머니 명순(최금순)도 이북 출신이라는 설정이다. 영화 속 주요 인물들에게서 떠돌듯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적 감각이 베어나온다.

=진우는 중만 가족과 일종의 유사 가족을 이루고 있다.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치매가 온 할머니, 삼촌을 엄마라 부르는 설, 홀로 딸을 키워온 중만 등 제각기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완벽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게이 커플인 진우와 현민, 미혼모였던 은영 또한 소수자의 정체성이 분명하다. <정말 먼 곳>이 이렇게 소외되거나 각자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우화처럼 읽히길 바랐고, 그 안에서도 각자가 느끼는 거리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강에게>와 <정말 먼 곳> 모두 죽음 혹은 이별이 영화의 배후에 있는 주요한 정서적 모티프로 다가온다. <정말 먼 곳>에서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돋아나더라.

=내가 기쁨은 짧게 느끼고 슬픔은 오래 쥐고 있는 부류의 사람이라서 그런 듯싶다. (웃음) 평소에도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고 파고들면서 최선을 다해서 슬픔의 본질을 고민하려는 편이다. 기쁨이나 밝은 감정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영화에서도 보인다. 밝은 장면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길이가 짧다든가….

-강길우 배우와는 <한강에게>를 찍을 때 강진아 배우의 소개로 처음 만났고, 이번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선 작업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함께한 것으로 안다. 금세 가까운 관계가 되어 서로 신뢰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처음 만나 찻집에서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눌 때부터 막상 영화 이야기는 거의 안 할 정도로 오래 보아온 친구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강길우 배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웃음) 영화 만들기가 서툴고 미숙한 단계에서부터 그와 함께해서 이제는 무엇이든 먼저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10년 후, 20년 후의 삶에 대해서도 함께 말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긴 기분이다.

-은영은 드러나지 않는 전사의 여백이 큰 인물이라 캐릭터를 장악할 수 있는 힘 있는 배우가 필요했던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민 또한 맡은 배우에 따라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캐스팅이 쉽지 않았을 듯한데.

=은영은 관객의 입장에선 자칫 미워할 수 있는 캐릭터인데도 이상희 배우가 특별한 힘을 불어넣었다. 차 문을 여는데 한번에 열지 못하고 버벅거린다거나, 목장 축사의 나무 울타리에 어색하게 기대는 작은 동작처럼 은영에게 의외로 허당기를 부여하는 디테일에서 깜짝 놀랐다. 무언가 단호하게 하고 싶지만 실은 그게 서툰 사람, 자기 마음은 그게 아닌데 무언가 뜻대로 안되는 사람의 손짓이나 몸짓을 그렇게 표현하는구나 싶어서 많이 배웠다. 홍경 배우는 알아갈수록 내면이 깊은 사람이라 인상적이었다. 현민은 겉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움 속에 오히려 강하고 의연한 면모를 품은 인물인데, 홍경에게서 실제로 그런 성숙함을 느꼈다.

-치매 상태에서 갑자기 정신을 차린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아침 식탁을 차려주고, 식혜를 만들면서 은영을 다독이는 장면도 놀랍다. 현업에서 활동하는 80살 이상의 고령 배우가 드문 현실이라 최금순 배우에게도 특별히 눈길이 갔다.

=장률 감독의 <두만강>에도 출연하셨듯 연길에서는 아주 유명한 베테랑 배우다. 미팅 때보다 촬영 현장에서 실로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꼈다. 갑자기 회복한 명순이 찌개를 끓이다가 자신을 보고 놀란 아들 중만을 돌아보는 장면에선 일순 기이하기까지 한 뉘앙스를 현장에서 그냥 만들어내셨다. 내 영화의 기키 기린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웃음)

-시와 영화가 만나는 지대가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나. 앞으로의 작업도 그 위에서 펼쳐질까.

=지금으로서는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은유’라고 말하고 싶다. 장면으로부터 표현하는 것이 영화이고, 그런 영화를 시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행간을 더듬듯, 편집을 할 때도 장면과 장면의 사이에 관해 생각하곤 한다. 다음 작업에서는 시인이나 시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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