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부터 3월 현재까지, 영화계에 학교 폭력(이하 학폭) 논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피해자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배우들의 과거 학폭 가해 내용을 알리고 있으나 지목된 배우들 사이의 행보는 갈린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방영 중인 드라마에서 하차한 연기자도 있지만 폭로 내용이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입장을 내며 법적 다툼을 예고한 이들도 있다.
지금으로선 의혹 너머에 있는 진실에 가닿기란 쉽지 않다. 업계 관계자들은 사실 확인에 애를 먹는 것은 물론 공개를 앞두고 있던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 차질 및 발표 지연으로 인한 후속 대처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배우, 매니지먼트, 제작사간의 계약 관계만으로는 작품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이 어떻게 규명될지 불분명하다. 영화계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최근 논란의 여파와 함께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미투 운동 이후, 또 한번 대중예술인의 도덕성 검증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이번엔 학폭 논란이다. 성폭행과 성희롱에 대한 고발이 영화계에서 감독과 배우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면, 이번 의혹은 “학폭을 저지른 연기자를 화면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 피해자들의 호소와 함께 줄곧 배우들을 향해 있다. 배우의 사생활과 관련한 이슈로 영화 개봉 및 드라마 방영에 차질을 빚은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작금의 상황이 마치 “자연재해 같다”고 말한다.
시작은 스포츠계였다. 지난 2월 8일, 배구단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주축이었던 이재영, 이다영 선수가 과거 학폭을 저질렀다는 주장과 함께 피해 사실이 담긴 글이 한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해당 내용은 파급력이 큰 타 커뮤니티에 추가된 사실과 공유되면서 힘을 얻었고 결국 2월 10일, 두 선수는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리며 학폭을 자행한 사실을 인정, 사과했다. 이후 구단의 공식 사과와 두 선수에 대한 무기한 활동 정지 처분, 두 선수의 배구 국가대표 자격을 무기한 박탈하는 징계가 이어졌다.
제2, 제3의 피해자들, 책임은 누가?
배구계에서 시작된 들불이 야구, 농구, 축구, 복싱계 등으로 이어지는 동안 연예계로도 불씨가 옮겨왔다. 가해자로 지목된 가수 및 배우들은 주로 90년대생으로 나이가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며, 인터넷 커뮤니티상의 폭로를 통해 의혹이 불거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경우 폭로 내용이 과거 학창 시절에 그치지 않고 그룹 내 따돌림 문제를 지적하는 식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를 전한 이는 손에 꼽힌다.
영화 <글로리데이>, 드라마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만자> 등에 출연한 배우 지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중학교 동문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피해 사실을 토로한 지 이틀 만인 3월 4일 오전에 자신이 가해자였음을 인정했고, 같은 날 저녁 드라마 <달이 뜨는 강> 제작진은 그의 하차를 결정했다. 때는 이미 드라마가 6회까지 방영된 시점이었다. 이튿날 <달이 뜨는 강> 제작진은 지수를 대체할 연기자로 배우 나인우를 섭외했고, 재촬영에 돌입할 것임을 알렸다. 뒤이어 드라마의 일부 출연진이 제작진에 재촬영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조단역 배우들이 추가 개런티를 요구하기 애매해지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피력했다. 촬영과 편집을 다시 해야 하는 제작진의 피해도 크지만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위치의 배우들도 피해를 나눠 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학폭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민형사상 법적 조치에 돌입한 배우들 또한 적지 않다. 배우 조병규, 박혜수, 김동희, 동하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주로 소속사를 통해 학폭 의혹과 관련해 사실 무근 입장문을 발표한 뒤 곡해됐거나 부풀려진 내용에 대한 법적 조치를 예고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같은 대응에도 불구하고 광고계와 방송계는 논담이 오간 연예인의 기용에 있어 재빠른 ‘손절’로 일관하는 중이다. 조병규 배우가 출연할 예정이었던 KBS 예능 프로그램 <컴백홈>은 그의 출연 보류를 발표했고, 박혜수 배우가 촬영을 마친 드라마 <디어엠>은 홍보 활동을 중단하고 편성을 미룬 상태다. 김동희 배우는 학생복 광고에서 사라졌다. 드라마 및 예능 프로그램 하차와 광고 중단에 직면한 이들은 진실을 밝혀 오해를 해소하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무엇이 진짜인지 증명할 객관적인 방법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학폭 논란에 휩싸인 배우로 인해 영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해졌다는 한 감독은 “뉴스가 나간 이후 배급을 검토하겠다는 영화사로부터 최종 확답을 듣지 못했다”며 “함께 고생한 스탭들의 필모그래피에 작품이 추가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까 우려스럽다”고 걱정했다. 그는 “배우의 출연 계약서의 귀책사유 항목이 막연하기도 했고, 배우의 잘못으로 작품이 피해를 입었다는 인과관계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씨네21>이 2013년 이후 작성된 여러 종의 출연 계약서를 입수해 검토한 결과 배우에게 부여된 귀책사유 항목은 ‘부적절한 행동’,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행위’, ‘자신의 사회적 이미지를 훼손하여 연예 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대중문화예술인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일체의 행위’ 등 법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명시되어 있다. 음주운전, 마약, 성범죄, 간통과 같이 분명한 표현으로 계약 위반 혐의를 명시한 계약서도 있으나 이마저도 학폭은 귀책사유 항목에 포함되어온 역사가 없다.
배우와 매니지먼트사가 맺는 전속 계약서의 명문도 다르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11월 제정·고시한 ‘대중문화예술인(연기자중심) 표준전속계약서’ 중 제17조(계약의 해제 또는 해지 등)는 4항과 5항에 걸쳐 ‘기획업자’ 또는 ‘기획업자’ 소속 임원 및 직원이 ‘연기자’에 대한 성범죄(성폭력, 성추행 등)로 인하여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 연기자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제18조(불가항력에 따른 계약종료)는 “‘연기자’가 중대한 질병에 걸리거나 상해를 당하여 대중문화예술 용역의 제공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정이 발생한 경우 이 계약은 종료되며, 이 경우에 ‘기획업자’는 연기자에게 손해배상 등을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사전 검증 강화하고 계약 관계 보강해야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자 애쓰는 제작사의 노력, 즉 출연 계약서 보완은 불가피해 보인다. “미투나 학폭 논란이 벌어졌을 때 가장 큰 피해자는 돈을 댄 사람들, 즉 투자배급사다. 개봉을 못하면 제작비를 회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다음 피해자는 오랫동안 영화를 준비하고, 제작을 진행한 제작사다.” 한 영화 제작사 대표는 이와 같은 이유로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하나 “경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은 배우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작품의 이미지가 이미 훼손된 후에도 손쓸 방법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도 존재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남았는데 책임질 주체가 선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한 투자배급사 대표는 “방송국들은 이미 배우 계약서에 학폭 관련한 문항을 넣어서 비슷한 사태 발생 시 그 손해를 배우와 매니지먼트가 책임지게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귀띔했다. “결국 배우 또는 관련자들의 사전 위험 검증 시스템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다른 영화계 관계자도 “투자 결정 시 체크해야 할 항목이 추가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사전에 알아본다고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걱정이 많다”고 털어놓았다. 영화계에 퍼진 해당 문제의식으로 인해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 또한 “연예계에 학폭 논란이 불거진 2월 이후, 귀책사유인 사회적 물의의 한 종류로 학폭을 포함시킨 출연 계약서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출연 계약서가 생겨나는 상황은 이해하지만 매니지먼트 입장에서는 이러한 조항이 마뜩잖은 것도 사실”이라며 “솔직히 소속 배우의 가해 여부를 알아볼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만 믿을 수는 없지 않나. 배우와 계약할 때 생활기록부를 보는 일도 없고, 본다고 한들 학폭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나 하겠나”라는 반문이 뒤를 이었다. “만약 적혀 있다면 조치를 취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소속 배우들과 일대일로 미팅을 했다”며 소속사 차원에서 배우의 과거 행적을 조사하고 논란을 사전에 방지할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이로써 안심할 수는 없다고 전했다. “논란에 휩싸이지 않은 배우 또한 논란에 휩싸인 배우로 인해 재촬영에 임하면서 스케줄이 꼬일 수 있다. 이때 발생한 피해는 누가 책임질 수 있나. 현재 학폭이라는 이름 아래, 개인간의 단순한 다툼인지 집단적인 괴롭힘에 가담을 해서 일어난 폭력인지 구별이 안된 채 여론 재판만 증폭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배우가 과거에 다른 학생을 따돌리고 폭행을 가했다면 정말 죗값을 치러야겠지만 명백하지 않은 이야기로 오히려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실제로 배우 최예빈, 조한선 등의 경우 최초 폭로글 이후 해당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동문들의 반박 댓글 및 게시물이 줄지어 올라온 후에야 의혹을 벗을 수 있었다. 수많은 반박과 증언이 있어야지만 최초 게시물의 허위를 지목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소속 배우에게 의혹에 대한 대화를 청하거나 계약의 귀책사유 재검토를 문의하는 문제는 회사와 소속 연예인간의 신뢰가 달린 일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고백했다. “계약서 중 사회적 물의 항목을 세세하게 포함시키는 건 무리가 있다.
우선 사회적 물의의 기준부터 애매하다. 어떤 광고주는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조차 사회적 물의라고 칭한다. 근데 그게 계약 위반의 사유가 되는 것도 억울하다. 그래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문제를 기준 삼아 계약서를 작성하려 한다. 그럼에도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배우에게 확실하지 않은 의혹을 두고 계약서를 수정하자고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무척 껄끄러운 부분이다.” 그 또한 제작진을 비롯한 조단역 출연자들, 나아가 시청자들의 피해까지 짚으며 “학폭 의혹 여파로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오는” 지금 상황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최근 학폭 논란으로 인한 제작 중단 및 공개 지연 사태는 배우와 매니지먼트, 배우와 제작사간의 계약 관계 보강과 검증 시스템 강화를 요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관건은 어떻게 신뢰를 깨지 않고, 면피하려는 용도가 아닌 책임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취재에 응한 영화계 및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들은 예외 없이 지금 시점에서는 그 방법을 확정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경우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 콘텐츠분쟁조정위원회 등의 중재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관계자도 있었다.
정확한 사실관계의 증명 이전에 여론 재판이 선행되는 상황 또한 우려의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관계자들은 학폭이라는 분명한 잘못이 드러날 시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지만, 그전까지는 배우의 양심을 믿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관객 중 피해자가 있음을, 피해자가 언제든 시청자가 되어 상처를 감당해야 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문제를 수습하는 동안 발생할 콘텐츠 제작 현장의 피해자들까지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논란 이후의 현장을 건강하게 꾸리기 위한 대책과 고민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