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이경희의 SF를 좋아해]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만, 10년 뒤에는…
2021-04-01
글 : 이경희 (SF 작가)

일본 정부는 버블 붕괴 이후의 오랜 장기 침체를 극복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도쿄가 물에 잠기는 것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도쿄만 일대에 제방을 쌓는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실시한다. 사상 초유의 토목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인간 형태의 산업용 중장비 로봇들이 개발되고, 자연히 로봇을 악용한 강력 범죄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에, 일본 경시청은 거대 로봇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부서를 신설한다. 이 부대의 이름은 ‘경시청 경비부 특과 차량 2과’ . 통칭 ‘특차 2과’다.

특차 2과에 소속된 우리의 주인공들은 박봉과 야근에 시달리는 평범한 말단 경찰 공무원이다. 테러 진압이나 범죄 수사보다는 당장 오늘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지, 소소하고 지루한 하루를 무얼 하며 보낼지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다.

이들이 상대하는 범죄자들의 면면도 다채롭다. 대개는 술에 취한 중장비 인부이거나, 꼴사나운 실연남이거나, 혹은 파업 중인 건설 노동자들이다. 작중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은 산발적으로 흩어진 운동권 조직인데, 이들의 이념적 목표는 ‘환경 보호’다. 도쿄만 일대의 해안을 영구적으로 훼손하게 될 바빌론 프로젝트를 저지하기 위해 테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가끔이지만 진짜 나쁜 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시리즈 최대의 주적인 ‘샤프트 엔터프라이즈’는 다국적 군산복합체로, 군사 기술 개발을 위해 어떠한 범죄도 서슴지 않는 회사다.

팀 전체가 주인공 격인 작품이긴 하나,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이자 주연이라 말할 수 있는 1호기 파일럿은 ‘이즈미 노아’라는 여성. 그것도 홋카이도 지방 출신의, 키가 작아 농구 선수를 그만둬야 했던 짧은 머리의 신입 경관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은 대개 여성이거나, 외국인이거나, 혹은 외국인 여성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설명을 늘어놓으면 마치 최신 SF 트렌드를 모아놓은 신작 애니메이션 같지만, 실은 이 작품, 1988년에 만들어졌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바로 리얼계 로봇 만화의 대표작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다.

국내에선 <기동전사 건담>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지만, 앞선 두 작품이 국내에 정식 방영된 적이 없던 데 반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의외로 TV에 방영된 전력이 있다.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 중에는(흑흑 이 표현 정말 싫다. ㅠㅠ) 아마 1990년대 말 즈음 이 작품을 시청한 기억을 지닌 분들도 계시리라. 이 시리즈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에서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투니버스를 통해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된 사람 중 하나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거대한 경찰 로봇을 조종하는,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 지구를 지키거나 악독한 범죄자를 추적하는 대신 우리 주변에서 볼 법한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인물들의 개인적인 사연이나 술에 취해 털어놓는 본심을 보여주며 일상의 리얼리티를 한층 강화하기도 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상의 정서는 후일 인기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리즈가 거대 로봇이라는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일상의 리얼리티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뛰어난 캐릭터성 때문이다. 전형적인 말단 공무원 신시, 속을 알 수 없는 소대장 고토, 깐깐한 정비반장 사카키, 총기 마니아 오오타 등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부터 적당히 장르적으로 과장된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같은 캐릭터들을 전혀 다른 상황에 던져놓아도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덕분에 이 시리즈는 코미디, 로맨스, 휴먼 드라마, 호러, 스릴러, 밀리터리, 로봇 액션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독특한 구성을 뽐낸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시트콤이었다가, 다음 에피소드에선 잔잔한 일상을 그리며 감동을 주고, 또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일본 사회의 문제를 깊이 있게 지적하기도 한다.

작품이 다루는 테마들도 흥미롭다. 노동문제와 환경문제를 단순히 거대 담론으로 바라보는 대신, 개인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작은 담론으로 쪼개어 디테일하게 파고드는 몇몇 에피소드의 퀄리티는 놀라울 정도다. 당시는 인류의 미래와 국가 이념을 논하던 거대 담론의 시대 아니었던가?

이런 특징들로 인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는 큰 인기를 누리며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게임 등 다양한 매체로 무분별하게 미디어믹스가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작품과 엉망인 작품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 감상이 쉽지 않은데, 현시점 국내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원안이라 할 수 있는 유우키 마사미의 코믹스판을 읽으며 인물과 분위기를 파악한 뒤 오시이 마모루가 감독한 두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감상할 것을 추천드린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버전은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이다. 개인적으로 감독의 대표작인 <공각기동대>보다도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할 정도다. 이 두편의 극장판 작품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일상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테러리스트와의 거대한 대결을 그린다.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한 점도 특징이다. 스토리나 설정뿐 아니라 작화 측면에서도 과장을 억제한 사실적인 영상미를 추구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소위 ‘리얼계’로 분류되는 애니메이션 작화 방식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두편의 줄거리는 유사하다. 천재적인 테러리스트 지능범의 뒤를 추적해 음모를 밝히고, 특차 2과의 멤버들이 총출동해 어떻게든 사건을 수습한다는 구성. 특이한 점은 이 작품들이 철저하게 악역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악역의 사연을 추적하는 동안 관객인 우리는 악역이 보고 자란 광경을 저항 없이 체험하는 입장에 놓인다. 재개발로 철거되는 낡은 골목과 그곳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권력기관 사이의 무의미한 알력 다툼, 대체 어디인지도 모르는 나라의 전쟁에 끌려간 군인들과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눈과 귀를 닫아버린 시민들…. 추악한 현실 세계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악역의 시나리오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예정대로 굴러간다. 작품 속에서 악역은 신에 필적한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감독 본인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바닥을 헤집어 긁어내는 듯한 악역의 시선은 마치 학생운동 세대인 오시이 마모루 자신의 절망과 증오를 투영한 것처럼 느껴진다. 전공투 운동이 분열로 끝나고 마치 너희는 틀렸다는 듯 버블 호황이 찾아왔을 때 그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거품이 터지고 온 사회가 한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사방의 집값이 치솟고 노동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져가는 우리의 현실은 그가 바라본 광경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엔딩 크레딧 말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만, 10년 뒤에도 그럴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과연 10년 뒤 우리는 어떤 광경을 바라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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