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스파이의 아내'는 어떻게 밀도 있는 실내극을 완성해냈나
2021-04-06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한 남자가 스파이 혐의로 잡혀가기 직전에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걸쳐 입는다. 카메라는 침묵을 지키며 이 몇초 동안의 동작을 보여준다. 이런 호흡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영화라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고 싶다.

두개의 세계, 두개의 필름, 두개의 얼굴

<스파이의 아내>

영화의 초반부에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남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에게 말한다. “당신은 언제나 나보다 멀리 보고 있어요.” 예사로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꽤나 인상적인 부름이다. 이야기 내부의 단서들로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를 유추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유사쿠는 사토코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눈앞에 보이는 세계 바깥을 향해 시선을 둔다. ‘코즈모폴리턴’을 자처하는 사업가인 그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생체실험 일지와 기록 필름을 목격했으며, 그 거대한 전쟁범죄의 증거가 담긴 필름을 밀반입한 뒤 미국으로 떠나 폭로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절반이 지나갈 동안, 정확히 말하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사토코는 유사쿠의 심리적 궤적에 대해, ‘자신보다 멀리’ 보는 그의 시선이 정확히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이런 미묘한 시선의 불일치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필름에 새겨진 영상을 본 사토코가 급격한 심리적 변화와 결단을 감행해 유사쿠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상을 바라볼 때조차, 조금씩 다른 열망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경로로 움직인다.

극히 드물게 나오는 소수의 야외 장면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대목을 실내극으로 전개하는 <스파이의 아내>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영화의 내부 공간을 점유하는 인물들 사이를 진동하는 감정과 움직임이다. 하지만 인물들의 정념이 모두 드라마의 논리로 해명되는 건 아니다. 이야기는 명확한 도식으로 짜여 있지만, 동시에 여러모로 불투명한 면모를 수반하고 있다.

끔찍한 학살의 증거를 밀반입해 폭로하려는 유사쿠, 유사쿠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그의 계획에 동조하는 아내 사토코, 부부를 의심하고 압박하는 헌병대 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를 중심에 두고 길항 관계에 놓인 세 사람의 (거짓)말과 믿음이 혼선을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극적 관계가 형성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노하라 다다시의 협업으로 완성된 시나리오는 놀라울 만큼 능숙한 솜씨로 사소한 감정의 충동에서 출발해 개인의 삶과 국가 공동체가 부서지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집요한 포착을 멈추지 않는다.

내부를 자극하는 외화면

<스파이의 아내>

구로사와 기요시의 탁월한 영화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스파이의 아내> 또한 세 인물의 욕망과 정념을 서사적 개연성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가령, 유사쿠의 외도를 의심하던 사토코가 국가가 자행한 범죄의 기록을 마주하고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는 ‘스파이의 아내’로 이행하는 동안 영화는 그녀가 겪는 딜레마를 감지할 만한 당위적인 숏을 한번도 할애하지 않는다. 영화는 변모하는 내면의 혼란 따위를 비추는 매체가 아님을 철저할 정도로 자각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목격한 사토코의 변화의 근거는 그녀가 빛이 차단된 어두운 방에서 영사되는 필름의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전부다. 암실과 은밀한 빛의 기록. 그것을 마주하는 여인의 얼굴에서 통상적인 이야기의 용법으로는 추론할 수 없는 단호한 정념이 갑작스럽게 솟아오른다. 이미지의 열병에 사로잡힌 것처럼, 섬광처럼 나타난 형상으로 사토코의 얼굴은 백색의 빛으로 물든다.

기묘하게도 구로사와 기요시는 1940년대 고베를 재현해 보이는 그럴듯한 현실적 풍경을 최대한 배제한 뒤 모든 정념의 밀도를 실내 공간 내부에 응축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 이유를 역사적 시대배경을 구현할 만큼의 많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제작환경의 한계에서 찾거나(물론 구로사와는 실내극 구성을 취한 이유에 대해 반쯤 농담처럼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식의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강렬한 밀도의 실내극을 완성해낸 영화의 형식적 장악력에 공허한 감탄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자신의 첫 번째 역사극이자 전례 없는 강도의 실내극을 만들면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무엇보다 강렬하게 의식한 대상을 언급하자면, 카메라의 시야에 비치지 않는 화면 바깥 ‘외화면’(hors-champ) 공간의 영역일 것이다. 외화면, 외부, 보이지 않는 바깥이라고 지칭할 법한 그 영역은 구로사와의 영화에서라면 우리가 머무는 내부와 무관하게 절단되어 있기는커녕 자꾸만 내부를 자극하고 긴밀한 연루를 일으키는 장소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구로사와 기요시가 비로소 선택한 전쟁이라는 소재는 내부와 외부의 비가시적인 긴장을 가장 극단적인 대비로 표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처럼 느껴진다. 거기엔 외부와 내부라는 두 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끔찍한 폭력이 펼쳐져 있고,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의 응시가 발생할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필모그래피에서 외부로 열린 개방적인 움직임과 충동에의 면모가 아주 새삼스러운 측면은 아니다. <도쿄 소나타>와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는 기묘한 낯선 자 또는 친밀한 유령과의 동행이 펼쳐지고, <산책하는 침략자>에서도 불가피하게 바깥으로의 물리적인 여정이 잇따르곤 했다. 그런데 <스파이의 아내>에서 바깥은 전적으로 카메라가 볼 수 없는 비가시적 영역에 한정되어 있으며, 게다가 그곳에서 (간접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구로사와의 전작에서 그려진 여정들처럼 또 다른 삶의 리듬이 아니라 참혹한 죽음의 기록이다. 영상의 형태를 두른 이 외부의 기록과 물질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그 어느 영화의 화면에서보다 과격하고 불안정하게 내부를 두드리고 있다.

거리의 군인들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바깥을 향해 행군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도달할 법한 곳에는 또한 밝혀지지 않은 기밀과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외부는 역설적으로 저택, 사무실, 창고, 극장과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세계의 표면에 광원이 불분명한 과도한 빛을 투과해 화면 안쪽을 백색의 불안으로 물들인다. 부부가 영화를 보러 간 극장에서 국가에서 제작한 전쟁의 프로파간다 필름과 중일전쟁 시기에 징집되어 중국에서 사망한 야마나카 사다오의 <고우치야마 소슌>이 나란히 상영되는 장면은 그런 비가시적인 긴장의 한 예시다. 프레임의 한계로 가려진 외부와 인물들의 서로 다른 열망으로 들끓는 내부는 그렇게 하나의 벽 위에서 고요하게, 그러나 격렬히 충돌하고 있다. 이는 또한 필름 이미지를 영사하고 그것을 대면하는 물리적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순수한 매혹과 충격을 간직한 20세기라는 이미지의 시간에 대항하고 이를 픽션 내부에 밀반입하는 대담한 영화적 기억의 밀수꾼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명확한 전모를 알 수 없고,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그렇기에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은 끔찍한 폭력이 바깥에 존재하고, 그것을 목격한 자들이 하나둘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창문과 문틈의 틀을 넘어서 윤곽을 희미하게 만드는 빛이 그러하듯 실내와 바깥을 구분 짓는 명확한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제 안쪽은 부드러운 일상의 리듬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체험과 기억의 얼룩이 덧입혀지면서 분열적으로 부풀어오른다.

인상적인 한 장면을 떠올려보고 싶다. 사토코가 귀국한 유사쿠에게 한걸음에 달려들어 포옹하던 때에, 유사쿠는 눈길을 돌려 함께 고베로 되돌아온 생체실험의 증인 후미코를 바라본다. 하나의 시선에서 또 다른 시선이 발생하는 것. 아내와 재회하는 다정한 시선과 후미코를 주시하는 결단의 표정이 뒤엉키는 것이다. 이러한 표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는 이중성의 형태로 변형된다. 내부와 외부라는 두개의 영화적 지대, 두개의 필름(잔혹한 실험의 증거인 기록영상의 필름과 유사쿠와 사토코가 만드는 아마추어 스파이영화 필름), 두개의 얼굴이 주어진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스파이의 아내>의 인물들이 그저 투명한 하나의 얼굴, 하나의 맹목적인 시선으로는 그 형태를 지속하기 어려운 세계에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스파이의 아내>

<스파이의 아내>가 구축하는 긴장은 부부가 꾸미는 비밀스러운 공모가 발각되느냐 마느냐, 혹은 누가 누구를 밀고했느냐 아니냐, 라는 식의 극적인 서스펜스를 규명하는 차원의 긴장이 아니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몰두하는 건 일상적인 내부의 풍경 위로 외부의 자극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살아남은 증인, 번역된 증거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름의 기록들이 프레임의 경계면을 틈입해 들어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불러온다. 불 꺼진 방의 한쪽 벽 위로 학살당한 시신의 기록들과 카메라를 쳐다보는 피해자들의 눈빛이 ‘실물보다 큰’ 형상으로 떠오를 때 내부는 더이상 독립적인 내부로만 존립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파이의 아내>에서 형성되는 긴장은 내부에 위태롭게 균열을 내는 외부적 자극의 엄습이 어느 정도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 관측하는 역학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영화가 구축한 실내극의 형식은 그렇게 부풀어오른 내부가 완전히 내파에 다다를 때까지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투명한 정체성과 비밀을 간직한 인물들의 액션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긴장이 아니라 실내극이라는 특수한 형식이 외부의 계속되는 압력으로부터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가늠해보는 영화적 역학의 긴장이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묘사되는 실내 공간의 생김새는 그런 식으로 변형되고 있다. 영화는 인물들이 화면 안쪽으로 진입하고 퇴장하는 출입구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외부의 압력이 강력하게 작용할수록 카메라는 더욱 깊숙한 내부 공간으로 진입해간다. 유사쿠의 회사 사무실은 대표적인 예시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사무실에서 어두운 복도로, 복도를 건너 텅 비어 있는 거대한 창고로, 나아가 그 안에서 자물쇠가 잠긴 금고로 향하는 것이다.

내부는 그렇게 물리적으로 폐쇄되고 있다. 텅 빈 벽에 떠오른 영상이 일으키는 열병은 공간과 인물의 형체를 일그러뜨릴 것이다. 필름을 손에 쥐고 미국으로 건너가려던 사토코가 배 안에서 사람 한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사각의 상자 내부로 들어가는 장면에 이르면 내부 공간의 물리적 내구성은 한계에 이른다. 부서지고 일그러지기를 반복한 내부는, 비좁은 넓이로 수축된 채 원형으로 뚫린 구멍에 눈을 가져다대는 것만이 허용된 작은 암흑상자(Camera obscura)로 그 형체가 퇴화한다. <스파이의 아내>는 그런 불가피한 수동성의 체험을 영화의 근간에 두는 가혹한 리액션 영화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가 기어이 마주한 것은

<스파이의 아내>

정신병동에 갇힌 사토코는 말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바로 그 사실이 이 나라에서 내가 미쳤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은 모든 내부의 가능성을 소진해버린 비어 있는 인간의 형체를 각인시킨다. ‘나’를 주체로서 인식하고 주체의 행위를 추동할 만한 장소로서의 공간이 사라진 자의 자각이다. 그녀는 미치지 않았지만, 미친 것이나 다름없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만, 그건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사기가 쏟아내는 섬광이 제거된 무상한 얼굴. 사토코는 필름을 보는 강렬한 체험에 사로잡혀 불가해한 정념을 분출해왔지만, 그것은 필름 릴이 뒤바뀌는 순간 증명할 수 없는 한정된 체험이며, 더욱 선명하고 긴 분량의 증거를 확증할 수 없는 불투명한 감각임을 깨닫는다. 그녀에겐 어떤 종류의 기대도 남아 있지 않다. 사토코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한” 자일지 모른다. 또 여전히 유사쿠와 다른 것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실내 공간에 놓인 물통과 접시가 요란스럽게 흔들린다. 바깥에서 거대한 폭파 소리가 들리고 이내 건물이 흔들린다. 외부에서 벌어진 공습에 내부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정신병동의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잠에서 깨어나 닫혔던 문을 열고 나간다. 이 결말의 시퀀스는 세계의 내파를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내적인 공간을 흔들고 무너뜨리는 현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도 사토코는 안쪽에서 멈춰 선 채로 망설인다. 이 지점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로베르 브레송의 <돈>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그려낸다. 사건이 종료되고 모든 사람이 화면을 빠져나간 뒤에도 잠시 화면 바깥을 주시하는 이들의 시선으로 스크린을 비추던 <돈>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파이의 아내>의 마지막은 기어이 사토코를 움직여 복도를 지나쳐 불빛이 새어드는 문 바깥으로, 전쟁의 폐허가 펼쳐진 세계의 이미지를 직시하는 자리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폐허가 펼쳐진 반대편에 화면 가득 차오른 사토코의 강렬한 클로즈업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부의 자리에서 역사적 시간을 통과한 한 여인이 영화 전체를 향해 마주 서는 유예된 리버스숏이자, 역설적으로 그녀가 비로소 유사쿠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모든 것을 소진해버린 한 인간의 눈동자에 기어이 그 폐허의 기록을 대면시킨다. 부서진 세계와 인물은 그렇게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진다. 이런 압도적인 정념의 결말을 두고 덧붙일 말은 없을 것 같다. “이로써 일본은 패망하고 전쟁은 끝나겠지. 아주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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