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곡 <Teddy bear>의 문이 뿌옇게 퇴색된 기타 연주로 열리는 순간, 귀가 솔깃하다. 느긋하게 출렁이는 리듬을 타고 ‘your eyes, your hair, your toes, your lips, 가만 널 마주 봐’ 하는 탁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어쩐지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앨범 커버를 한번 더 확인한다. 김세정, 그 세정이 맞다. 참가자의 극한을 시험하는 서바이벌 오디션에서도, 뛰고 구르고 어찌됐든 망가져야 주목받을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멤버들과 함께 ‘극단’(劇團) 컨셉으로 무대를 꽉 채웠던 그룹 시절에도, 활기찬 18살 고등학생이나 아픈 비밀을 숨긴 카리스마 넘치는 사이코메트리를 연기하면서도 씩씩한 웃음을 짓고 있던 바로 그 말이다.
김세정의 두 번째 미니 앨범 《I’m》은 그간 높은 개인 인지도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던 세정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가능성에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지난해 첫 솔로 앨범 《화분》으로 대중에게 ‘저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불러요’ 하고 조심스럽게 내밀었던 손은, 《I’m》을 통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지금껏 보여준 적 없었던 나른하고 허스키한 매력이 가득한 첫곡을 지나면 타이틀 곡 <Warning> 차례다. 경쾌한 멜로디가 전반적인 곡을 이끄는 이 상큼한 팝은 뭐가 됐든 한번 같이 가보자고, 잘못되면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고 듣는 사람의 팔을 힘껏 잡아끈다. 미지의 세계를 앞두고 울리는 불안한 경고음 또는 현대인의 고질병인 번아웃이 보내는 경고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는 그대로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다. 뭐가 됐든 한번 해보자, 같이 가보자는 기운 넘치는 권유.
앨범에 수록된 5곡의 노래는 모두 김세정이 직접 참여했다. 다양한 K팝 아티스트와의 작업, 특히 핫펠트와 인상적인 곡들을 남긴 이우민(collapsedone)(<Teddy bear> <집에 가자>)을 필두로 다양한 작곡가, 프로듀서와 함께 완성한 노래들은 팝과 록, 발라드를 종횡무진 오가며 김세정의 목소리와 캐릭터가 가진 힘 그대로를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타고난 김세정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차분하게 성장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기분 좋은 한장이다. 솔직하고 환한 세정의 미소만큼.
핫펠트 《1719》
듣는 순간 호기심을 잡아 끄는 첫 곡 <Teddy bear>를 세정과 함께 만든 건 프로듀서 이우민(collapsedone)이다. 트와이스, 여자친구, 갓세븐, 2PM 등 다양한 K팝 그룹과 작업해온 그는 핫펠트와 함께한 《1719》 작업을 통해 특별한 존재감을 쌓았다. 솔직함과 불안함 사이의 절묘한 조율을 담아낸 앨범은 그룹 활동 이후, 솔로 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 아이돌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아이유 《LILAC》
국민 여동생으로 시작해 누구나 인정하는 뮤지션이 되기. 아이유는 아마 음악계에서 가장 어려운, 터놓고 말해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을 끝내 성공으로 이끈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우연하게도 흡사한 시기 발매된 두장의 앨범을 이어 듣고 있으면, 특별한 연결고리 없이도 음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보이지 않는 악수와 포옹이 오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누구나 서로에게 그러한 것처럼.
* 이번호를 끝으로 뮤직 지면 연재를 종료합니다. 김윤하 평론가, 최다은 PD, 이수정 사무국장과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