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엄태구의 내성적인 성격이 화제가 됐을 때, 사람들은 <밀정>에서 서슬 퍼런 살기를 보여주던 하시모토와의 괴리를 언급했다. 그런데 엄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의 연기와 캐릭터는 비로소 그이기 때문에 설명된다. 엄태구는 모든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하지만 질문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고 모든 물음에 어떻게든 그만의 답을 들려주는 인터뷰이다. 그러고는 “너무… 진지해졌습니다”라며 수줍게 웃는다. 긴장한 만큼 오래 숙고하고 선택한 방향으로 매 순간 최대 출력으로 에너지를 쏟는 엄태구의 연기에는 일견 동물적인 본능으로 착각할 만큼 많은 고민이 묻어나 있다. 언제나 치열하게 연기를 대하는 그가 처음으로 상업영화 주인공으로 분한 <낙원의 밤>은 정통 누아르의 무대를 제주도에 이식한 박훈정 감독의 신작이다. 사랑하는 누나와 조카를 잃고 피의 복수를 감행한 태구는 제주도에서 총기 불법 브로커 쿠토(이기영)와 그의 조카 재연(전여빈)을 만난다. 전형적인 누아르 문법에 이국적인 제주도의 풍광, 서정성을 과감하게 교배한 <낙원의 밤>에서 엄태구는 근사한 유화제다. 거친 비주얼과 감각의 역치를 시험하는 폭력성, 그리고 눈빛만으로 교감의 순간을 설득하는 순간이 그를 경유해 한자리에 공존한다. 특별히 제주도에서 진행된 <낙원의 밤> 제작발표회가 끝난 후 바닷가 인근에 위치한 어느 카페에서 엄태구를 만났다.
-제주도는 언제 내려왔나.
=오늘 도착했다.
-아무 것도 못하고 홍보 일정만 소화했겠다.
=일정 소화하는 것이…. 아무 것도 하는 거다. (웃음)
-혹시 여유를 가질 시간이 있었나 해서 여쭤본 거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근처에서 유채꽃을 보고 왔거든.
=그냥 여기서 바다 보면서 바닐라라테 먹는 게 좋다. 원래 두 잔 이상 안 먹으려고 하는데, 오늘은…. 여기가 맛집이다. 바닐라라테 맛이 괜찮다.
-바닐라라테 마니아라는 얘기를 듣고 나도 아까 바닐라라테를 주문했다. (바닐라라테가 도착하자) 와, 이로써 세 잔째?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니까 다 먹진 않겠다. (웃음) 여기가…. 커피를 좋은 걸 쓰시는 것 같다. (옆에 있는 관계자에게 친절하게) 밑부분부터 드시면 아마 너무 진할 거다. 약간 들어서 드셔야 한다.
-다같이 바닐라라테를 마시면서 인터뷰를 해보자. 조직으로부터 버림받아 도망치고 복수하는 누아르영화 속 남자주인공은 매우 많았다. 그들과 태구의 차별점은 어디에 있다고 봤나.
=정통 누아르영화의 공식에 재연이라는 캐릭터가 들어오면서 새로움과 신선함이 생긴다. 재연이 굉장히 매력적이고 주체적이라서 시나리오를 보고 나도 재연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재연의 존재가 곧 태구의 차별점이다. 재연이 있기 때문에 그와 무언가를 함께해낼 수 있다.
-영화 초중반까지 관객은 태구의 눈으로 재연이라는 인물을 점점 알아가게 된다. 이때 태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음…. 왜 이렇게 날 싫어하지? (웃음) 그러다가 재연에 대해 알아가면서 점점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죽은 누나도 재연도 병을 앓고 있고, 누나에게 벌어진 일과 재연의 사연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고, 조카도 생각났을 거다. 안타까운 모습이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원래 태구는 별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연이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눌 때 태구에게 자기도 모르는 이상한 에너지가 생긴다. 본인만 염두에 뒀을 때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태구는 재연을 ‘살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태구의 표정도 점점 풀어진다.
-재연과 태구 사이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나.
=(부끄러워하다가) 딱! 한 단어만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냥 그 신, 순간순간에 충실하려고 했다. 연민, 동정, 이성에 대한 호감…. 그중 어떤 하나가 큰지는 잘 모르겠고, 조금씩 다 섞여서 포함되어 있다.
-<낙원의 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전여빈이 지금까지 연기한 배우 중 가장 말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 왜 그렇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같나.
=감독님이 식사 자리를 많이 만들어주고 바닐라라테 같은 디저트도 많이 사주셨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 워낙 전여빈 배우가 성격도 좋고 편안하고…. (갑자기 속삭이며) 착하다! 정말 좋은 사람. 같이 나오는 회차도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더 친해졌고 의지도 됐다. 내가 장난도 많이 쳤다. 진심도 섞여 있는 장난. <죄 많은 소녀>를 보기 전에 전여빈 배우가 연기 괴물이라는 기사를 봤다. 도대체 어떻게 연기했기에 ‘연기 괴물’이라고 하지? 그리고 영화를 봤는데 정말 괴물이었다. 그 뒤 작품으로 만나게 된 거다. 현장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만날 “어, 역시 연기 괴물~!”(웃음)이라고 했다. 나는 진심 반, 농담 반이 섞여 있는데 그쪽에선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보는 내내 물음표가 붙는 부분이 있었다. 도대체 태구는 왜 양 사장(박호산) 밑에서 충성을 다하는 걸까.
=그에 대해 감독님이 설명해주신 적이 있다. 주변에서 도대체 네가 왜 그 사람 밑에 있느냐고 하고, 태구 역시 양 사장이 무능하다는 걸 안다고. 하지만 어릴 때의 의리 하나 때문에 이 사람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계속 양 사장 곁에 있지만 영화 도입부에선 너무 지쳐서 조직 일을 정리하고 누나와 조카 옆에 있으려고 한다.
-그 심정이 태구의 얼굴만으로도 다 느껴졌다. 비주얼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었나. 혹은 기존 작품에서 레퍼런스 삼은 게 있다면.
=감독님이 태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얼굴만으로 그의 전사가 다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굉장히 지쳐 있고, 이 일을 그만두고 싶고, 다소 찌든 모습. 그래서 체중을 9kg 늘리고 스킨과 로션만 바른 거친 피부를 보여줬다. 입술을 트게 하려고 일부러 립밤도 안 발랐다. 레퍼런스는 없었다. 그냥 시나리오의 감정선을 제일 많이 생각했다. 초반부에 큰 사건을 겪기 때문에 제주도 촬영분에서 그 감정이 태구의 가슴에 담겨져 있지 않으면 연기가 비어 보일 것 같았다.
-평소 모습을 보면 도대체 <잉투기>의 ‘칡콩팥’ 태식 같은 캐릭터는 어떻게 연기했나 싶다. 인간 엄태구가 캐릭터가 되고 다시 빠져나오는 전환의 순간들이 궁금하다.
=나도 가끔은 인터뷰할 때 너무 긴장하거나 <바퀴 달린 집> 같은 예능에 출연하고 나면 ‘… 그동안 내가 연기를 어떻게 했지?’ 싶다. 이렇게 떨리면 안되는데, 진지하게 매니저에게 물어본 적도 있다. 10년 넘게 치열하게 연기를 해왔지만 정말 살아 있는 신을 찍어서 기분이 좋을 때보다 아쉬울 때가 훨씬 많다. 어쨌든 캐릭터에 다가가는 여러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매일 같지는 않다. 외부의 것을 끌어오기도 하고, 자기 안에서부터 끌어오기도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면 서로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결국은 자기 안에 없으면 못한다. 그래서 내 안을 많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러면 정말 별 볼일 없고, 선한 생각도 하지만 되게 악한 생각도 하는 여러 가지의 내가 있다. 그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자 놀이터가 촬영장이다. 가령 웃긴 춤을 추는 장면의 경우는, 어릴 때는 생각 없이 기분이 좋으면 춤도 췄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고 사회성이 생기면서 막아뒀던 내 모습이다. 연기를 위해 내 안을 들여다보면 순간적으로 깨지는 순간이 있다. 최대한 그 인물로 살아 있는 순간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화면으로 보면 담력이 센 타입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겁내지 않고 그때그때 유연하게 연기하는 배우 같다. 그렇게 보일 수 있는 비결이 있는지.
=음…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에 주변에서 폭소가 터지자 멋쩍은 듯 웃으며) 그저 기적이다. 모르겠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긴장이 많이 된다. 연기에 답이 딱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날의 날씨와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많아서 내가 준비한 것들이 현장에서 그대로 안 나올 때가 많다. 나도 살아 있는 생명체다보니 긴장이 많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긴장하는 게 어떻게 보면 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긴장하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준비하는 것도 있다. 내 직업이니까 고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송강호 배우가 <밀정> 현장에서 엄태구 배우가 긴장을 푸는 법을 따라 하는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선배님이랑 연기를 하려고 딱 섰는데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거다. 떨지 말라고 내 몸을 마구 쳤다. 그런데 요즘은 그러진 않는다.
-두려움을 떨쳐내는 방법을 터득한 건가. 신인 때는 대사 하는 것 자체를 무서워할 정도였다던데 지금은 훨씬 발전한 것 아닌가.
=아니다. 그건 떨쳐내지 못한다. 여전히 나에겐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을 떨쳐내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그냥 정도의 차이다. 연기를 오래할수록 두려움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아니더라. 갑자기 처음 촬영하는 것처럼 긴장되고 두려움에 지배당할 것 같은 날도 있다. 나도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이 직업이 어렵고 그래서 또 재밌다.
-새벽 기도를 나갈 만큼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워낙 수줍음이 많은데 강렬한 악역으로 대중에 눈도장을 찍어서인지 평소 모습과 캐릭터의 괴리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들 얘기한다. 그런데 그게 단지 이미지의 반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혹시 신자로서 따라야 할 가치와 캐릭터를 연기하며 생각하는 악한 마음이 서로 갈등을 빚은 적은 없나.
=어릴 때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한번도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롭다. 이게 내 직업인데 악한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하나님이 나무라진 않을 거다. 오히려 훨씬 잘하기를 바랄 것이다. 예를 들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작품에서도 누군가는 유다를 연기해야 한다. 그 캐릭터를 잘 연기하는 것이 우리의 직업이다. 그리고 유다를 연기하려면 내 안에 있는 무언가와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가 있든 없든 나쁜 생각을 하느라 배우로서 힘든 것은 똑같지 않을까. 그저 내 일을 잘해내야 한다.
-<낙원의 밤> 이후에는 OCN 드라마 <홈타운>으로 만날 수 있다.
=<홈타운>, 준비하고 있고, <홈타운>, 기대된다!
-왜 촬영하는 당사자가 시청자처럼 이야기하는 건가! (웃음)
=살짝 걱정된다. 너무 무섭다, 대본이. 모니터 볼 때 너무 무서울까봐 걱정된다. 하지만 같이 나오는 배우들이 평소에 좋아했던 분들이라 기대가 된다. 감독님도 너무 좋은 분이다.
-마지막으로, 그냥 영화 제목 때문에 물어보고 싶었다. 만약 엄태구에게 낙원이 있다면.
=음… 장소로서 낙원은 없지 않을까. 그런 것 같다. 살면서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 있다면 그게 낙원이 아닐까. 예를 들어 어려운 촬영이 있는데 감사하게도 진짜 살아 있는 순간으로 잘 끝내고 차에 탈 때, 아니면 부모님 댁에서 엄지(반려견 이름)가 나를 반기며 안길 때, 아무 생각 없이 기분 좋을 때 그게 낙원일 수 있다. 물론 그 순간이 지나면 ‘내일 촬영은 어떡하지’ 걱정이 시작된다. 경치 좋은 곳을 가도 잠깐만 좋지, 너무 아름다운 것을 계속 보면 오히려 쓸쓸해질 때가 있다. 계속 이어지는 낙원은 없고 그냥 어떤 좋은 순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