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얼마 안 걸려.” 마 이사의 등장은 간결하다. 뒤로 족히 20명을 거느리곤 양 사장(박호산)에게 협박 전화를 하는 뒷모습. 이 익숙한 장면에 새로운 레이어를 얹는 건 배우 차승원의 존재감이다. “양 사장아, 이 개새끼야.” 어이없단 듯 웃으며 양 사장을 부른 뒤 이내 적대감으로 굳어버린 그의 얼굴은, 태구(엄태구)의 복수 이후 또 한차례 파란이 일 것임을 암시한다.
처음 배우 차승원이 <낙원의 밤> 출연 소식을 알렸을 때 많은 관객이 <독전>의 브라이언을 떠올렸다. 하나 차승원이 완성한 마 이사는 브라이언보다 거칠고,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희끗한 수염이 그의 나이를 가늠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도 좀체 놀라는 법이 없는 마 이사에게선 나이듦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연륜이 드러난다. 맡은 배역에 자신을 적절히 녹여낼 줄 아는 차승원의 저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처음 마 이사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
=뭘 보고 이 역할을 나에게 맡겼을까, 나한테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더라. 그래서 바로 박훈정 감독을 만나봤지.
-어떤 점 때문에 맡겼다고 하던가.
=일단 마 이사가 탁 나왔을 때 “어, 그 배우네” 하고 알아봐줬으면 했다고 했다. 마 이사가 중간에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확 전환되니까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되기를 바랐다고. 마 이사는 어떤 사람이고, 마 이사와 계속 부딪히는 양 사장은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감독과 마 이사가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길 바랐다는 말도 나눴다고.
=그게 첫 번째였다. 이 사람에게 좀 삶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보단 생활을 중시하는 면들이 언뜻언뜻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에 마 이사의 삶이 그리 많이 등장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마 이사는 자기 일에 충실히 임해서 그걸로 밥도 먹고 가정을 꾸린 사람이다. 이미 윗선에 올랐고 이런 현장의 일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고, 그래서 자꾸 일을 빨리 끝내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거다. 그런 모습이 좀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야 양 사장 같은 인물들과 차별화되니까. 사실 나는 마 이사가 제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상대에게 딱히 안 좋은 감정이 없고 이 사건에 개입하기도 싫은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가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거니까. 한편으론 짠하단 생각도 들고.
-중국집 원탁 테이블 신도 흥미로웠다. 박 과장(이문식)과 양 사장을 대하는 눈빛도, 태도도 완전히 달랐다. 이 신은 어떻게 촬영했나.
=열강들이 모여서 회담하는 거랑 비슷하다. 한 사람은 예전부터 나와 관계 있던 형사고 한 사람은 나를 배신한 양 사장이고, 그렇게 셋이 모여서 각자의 목적과 입장을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런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 거다.
-마 이사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차분한데 양 사장에 관해서만큼은 감정적인 동요가 크다. 양 사장이 뭐 하나 잘못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같은 조폭이면서도 확실히 선을 긋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건 어찌 보면 양 사장이니까 마 이사는 그 사람만 미운 거다. 재연(전여빈)도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니 딱히 감정이 동할 일이 없는데 양 사장만큼은 정말 끝까지 싫어하는 거지. 방금 이야기한 신에서도 화면상엔 다 같이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가만 보면 양 사장은 혼자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한다. 한 방 안의 두개의 테이블. 같이 밥 먹는 것조차 싫은 거다.
-마 이사의 눈빛이나 자세 등을 보면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고 느꼈다. 실제로도 눈빛이나 제스처 등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걸로 먹고살았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막 치열하진 않잖나. 그런 데서 연륜이 묻어나오길 바랐다.
-긴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기고 자연스럽게 수염을 기른 마 이사의 스타일도 눈에 띄었다.
=주로 머리 올백할 때 가르마를 타지 않나. 마 이사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다. 트렌디하게 가지 말자, 완전히 얼굴 다 드러내듯이 하나로 쫙~ 넘기자고 말했다. 심지어 그 구레나룻도 살짝 붙인 거다. 수염도 멋지게 다듬고 싶지 않았다. 희끗희끗한 게 보이면서 이 사람의 나이가 가늠이 되고, 어딘가 늑대 같기도 하고. 그렇게 보였으면 했다.
-서울에선 정장을 갖춰 입다가 제주도로 넘어가며 캐주얼한 흰 점퍼로 갈아입었다.
=이 흰옷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만큼 마 이사는 손에 피 안 묻히고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다.
-박훈정 감독과의 합이 굉장히 좋았다고.
=원래도 같이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막상 현장에 가니 서로 손발이 잘 맞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겠냐고 상황을 만들어 제시하면 그걸 받아들이고 또 능수능란하게 다른 상황을 덧붙이기도 하고. 그런 과정이 정말 탁월한 감독이었다. 내가 나중에 장편 또 같이하자고 이야기해뒀다.
-누아르영화는 원래 좋아하나.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홍콩 누아르를 많이 봤고, 프랑스 누아르도 좋아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 있나.
=누아르는 <신세계>지. (웃음)
-바로 전 영화인 <힘을 내요, 미스터 리>와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을 택했다. 변화의 폭이 큰 선택을 한 이유가 있나.
=이제 소시민의 삶을 다룬 일반적인 드라마는 더이상 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안 해봤던 것들을 하고 싶고, 다분히 장르적인 작품들에 참여하게 될 것 같다. 장르적 세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맡은 캐릭터에 나의 질감과 특성을 쑥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찾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과 <삼시세끼 어촌편5>에 연달아 출연했다. 영화, 드라마가 아닌 예능, 특히 요리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능 프로그램을 하는 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무엇인가.
=안 그래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1년에 한편씩은 하자고 이야기해뒀다. 그건 예능이라기보다는 생활이 녹아 있는 거니까 굳이 마다할 필요 없고, 소모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멤버들은 바뀌어도 유해진씨와 나는 계속하지 않나. 프로그램하면서 훌쩍 떠나서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묻고, 정말 있는 그대로 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걸 좋아하는 분들이 있고. 우리의 관계도 갈수록 더 돈독해진다.
-과거 인터뷰에서 요리하다 보면 연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세심해진다고 했더라. 현재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다. 난 정말 섬세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나. (웃음) 개인적으로 나의 그런 성향을 굉장히 좋아한다. 내 영화 중에 <하이힐>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가진 섬세함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굉장히 씩씩하고 남자답게 보지만 그 영화에선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내가 가진 디테일함 때문에 <하이힐>의 지욱도 연기할 수 있었던 거고. 그런 나의 얼굴이 되게 좋다.
-차기작 <싱크홀>에선 스리잡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정만수를 연기한다.
=마 이사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동시에 개봉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정만수는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버지인데,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매사 틱틱대고 불만 많고, 말하자면 꼰대다. (웃음)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또 영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고. 괜찮은 영화니 개봉하면 보러 오시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