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라는 것을 한 지 몇년이 되었을까. 내 인생의 첫돈을 받고 하는 마감은 번역이었다. 20대 초반, 어찌어찌 일본에서 2년을 살고, 중반에 어찌저찌 돌아와서 복학을 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돈이 필요했다. 할 줄 아는 것이 일본어라서 관련 번역과 통역 일이 들어오면 전부 맡았다. 패션지 번역을 하면서 그놈의 모-드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고민하였고(지금도 그 말의 대체어를 모르겠다), 건축 관련 서류를 번역할 땐 한국말로도 처음 보는 용어가 많아서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잘 살아 있지만). 하나만 더 말하자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자를 그리면 무슨 뜻인지 찾아주는 포털사이트나 앱이 없었는데, 그 말은 허공에 한자를 그려 획수를 알아낸 후 옥편의 얇디얇은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며 뜻을 찾아야 했다는 뜻이고…. 휴, 저의 라떼 스토리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욕심은 없었다. 번역과 통역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단지 프리랜서의 세계에서 ‘거절’은 상당히 위험해 보였을 뿐이다. ‘김 대리, 지난번 그 번역 맡긴 친구 연락처 있나?’ ‘아 그 사람 지난번에 안 한다던데요.’ ‘어 그럼 다른 사람 찾아봐.’ 그런 사무실 풍경이 떠올랐다. 내 망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보그> 에디터가 <엘르> 에디터에게 날 소개하고 <더블유> 에디터에게도 소개하려면 계속 일을 받아야 했다. 이 일은 재미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기계처럼 아침이 올 때까지 번역을 했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어찌어찌 전업 음악인이 되었다. 글도 쓰게 되었다. 아직도 그 미묘했던 시간이 기억이 난다. 음악 일에서 돈이 조금 벌린다고 하던 일을 그만둬도 될까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니 어쩔 수 없었다. 예상대로 한두번의 거절 후에 일은 금방 끊겼다. 그리고 새로운 성격의 마감을 맞이했다. 다른 부분의 두뇌와 에너지를 사용하는 마감.
사람들은 사고를 치거나 마감을 미루고 잠적하는 예술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말하는 관계자를 보면 약간의 흥분마저도 느껴진다. 회사원의 딸이었던 나는 그런 부분이 불편했다. 충동적이고, 믿을 수 없고, 제멋대로고, 책임감 없는 예술가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20세기엔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21세기의 저는 평범한 프리랜서일 뿐입니다. 출퇴근을 안 할 뿐이지 그냥 음악 노동자이자 활자 노동자예요. 하지만 십몇년이 지난 지금, 어딘가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 말은 구멍이 많은 주장이었음을 인정한다.
프리랜서의 기본은 자신의 일 처리 능력을 잘 파악하고, 일을 잘 가려 받고, 기한 내에 잘 처리하는 것일 테다. 나의 경우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일단 내 일 처리 능력이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엉덩이를 붙이고 옥편을 찾으며 어떻게든 한 문장씩 하다 보면 끝이 나는 아르바이트 번역 일과는 달랐다. 멜로디가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것이다. 이건 물구나무를 서고 두팔로 걸어다녀도 안된다.
많은 예술가가 이걸 해내기 위해 실제로 물구나무보다 더한 무언가를 시도할 것이고 나도 온갖 짓을 했다. 오키나와의 무슨 곶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4인실의 2층 침대 아래 칸에 들어가 커튼을 치고 웅크리고 앉아 영화를 보고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터널 선샤인> 근처였던 것 같다) 3집 타이틀곡의 가사를 썼다. 적으면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기억이다. 녹음 날은 다가오고, 가사는 안 나오고, 발매일은 정해져 있고, 스탭들은 기다리고 있다. 그럼 사람이 미쳐가지고 갖은 짓을 하게 되는데 나는 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공항 가는 길에 생각한다. 내가 이 가사로 100만원을 벌 수 있을까. 이번 여정의 숙소, 밥, 비행기 왕복값을 계산하면 그 정도 되는데 이 곡으로 과연 그만큼…(다행히 그 노래로는 그 이상 벌었다).
그리고 일은 내 일정을 고려하며 들어오지 않는다. 좋은 기획이니까, 거절하면 다시 안 들어올 것 같아서, 잘나간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서, 이 사람에겐 더이상 거절을 할 수 없어서, 이 정도는 해내야 할 것 같아서, 단지 수입을 위해서,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또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리고 기한은 항상 모자란다. 처음에는 이게 나의 한심함이자 프로로서의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했다. 왜 나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일하지 못하지, 왜 책상이나 건반 앞에 앉아 바로 작업에 돌입하지 못하지, 왜 금방 딴짓을 하지. 왜 하루는 이렇게 짧지. 오늘 내내 한 작업은 왜 구리지. 왜 온종일 세 문장밖에 쓰지 못했지. 정신 차려보면 눈물로 범벅이 된 사과 메일을 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인터뷰를 본다. 그 작가님은 23년간 한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항상 일주일 전에 원고를 주곤 하셨죠. 아, 너무 괴롭다. 나는 아무래도 업계에 있으면 안될 것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수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예술가들이 어떻게 마감에 대처하고 작업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책을 찾아보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원래 어려운 거구나! 영화음악가들의 작업 과정을 다룬 다큐 <스코어: 영화음악의 모든 것>에는 명장면이 많다.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지는 신비한 과정, 영화라는 예술에서 음악이 작동하는 방식 등등. 하지만 진짜 인상적인 장면은 벨벳 재킷을 입은 한스 짐머가 마감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이었다.
천재들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좋다. 감히 나와 겹쳐볼 순 없지만 큰 위로가 된다. 책 <작가의 마감>도 재미있다. 일본 근대소설 작가들의 마감에 대한 편지와 산문을 모은 책이다. 나쓰메 소세키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다자이 오사무도 마감 앞에서 죄인이다. <음예 예찬>으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집중을 하루에 20분밖에 못한다고 말했을 땐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선생님도 그러세요!?
이 원고도 사실 늦었다. 담당 기자님에게 눈물이 가득한 문자를 보냈다. 태연하게 받아주시는 태도에 ‘혹시 일부러 날짜를 당겨 말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늦게 줘도 되는 건 아니니까, 불경한 생각은 절대 하지 않기로 한다. 내일은 출판사 대표님에게 눈물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너무 자주 운다.
요즘은 미라클 모닝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알람 시간은 새벽 4시. 작업을 하고 아침 9시가 되면 밤 9시 같은 피로가 밀려온다. 좋은 시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물구나무는 전부 서본다. 예전에는 나에게 자격이 있을지 걱정을 했다. 비틀스의 앨범도 1만3천원, 내 앨범도 1만3천원, 그래도 되나. 앨리스 먼로의 책과 내 책이 같은 가격이어도 되나. 매일 하루에 8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과물을 못 낸 날도 밥을 먹을 자격이 있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에 대한 편견은 오히려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개미도 베짱이도 아닌 것을. 그냥 계속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늦는 것은 정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