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전주국제영화제]
[인터뷰] '희수' 공민정 배우 - 오로지 내가 되는 연기
2021-05-05
글 : 남선우
사진 : 최성열

<희수>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한 여자를 따라간다. 혼자만의 조용한 여행을 떠난 희수가 그 주인공이다. 프레임 한 쪽에서 유유히 걸어 나온 희수는 대구 염색공단과 강원도 어촌을 오가며 정처 없이 떠돈다. 함께 공장에 다닌 애인, 고장난 라디오를 가진 할머니, 민박집에서 만난 중년 여성, 자전거를 태워주는 남학생 등이 그와 잠시 발맞출 뿐이다.

그가 왜 이동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길은 없다. 희수는 대사가 거의 없고 마음을 극적으로 표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희수를 연기한 배우 공민정은 미세한 표정 변화로 내면의 일렁임을 보여준다. 희수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관객이 짐작할 수 있게 돕는다. 차근차근 감정의 증폭을 계산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얼굴근육을 움직인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에 공민정 배우는 대답했다. 오직 나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희수가 되었다고.

-<희수>는 대사가 적은 작품이다. 시나리오가 어떻게 다가왔나.

=시나리오에 대사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신 희수의 오감이 느껴질 정도로 디테일한 상황설명과 묘사가 있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기분이었다. 그게 대사보다도 즉각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희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어떻게든 인물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희수의 어떤 면에서 자신과 닮은 점을 보았나.

=그동안 대외적으로 알려진 배역들이 대부분 자기주장이 강했다. 발랄하고 웃긴 역할도 많이 했고. 그런데 사실 내가 편하게 여기는 감정은 저 밑에, 마음의 기저에 깔려있는 차분한 감정이다. 희수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부끄러움 많고, 유약하다. 희수를 연기할 때는 그런 감정으로 있을 수 있을 테니 내가 뭔가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물론 다른 영화 속의 모습도 다 나의 일부다. 그러나 희수야말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견뎌온 성격의 구조를 가진 인물이라 편안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 희수는 감정원 감독의 친구로부터 이름과 이미지를 따왔다고. 감정원 감독과는 촬영 전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제주도에서 우연히 만난 감정원 감독이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희수> 시나리오를 건넨 게 시작이었다. 나는 시나리오에 적힌 정서가 너무 잘 이해되었다. 그렇게 말하니 감정원 감독이 너무 좋아하면서 실은 내가 걸어오는 걸 보고 희수가 오는 줄 알았다는 거다. (웃음) 그러면서 감정원 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 언니가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는 언니가 노력해서 해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고. 언니는 오히려 희수에 가까운 사람일 것 같다고. 그 말을 듣는데 공감도 되었고, 친해지기 전부터 내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영화를 함께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에 대한 정보도 들었나.

=감독이 친구의 모습을 영화에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희수의 전사를 실제와 다르게 설정했고 내게도 그렇게 이야기해줬다. 감정원 감독은 희수를 연기하는 건 내 몫이니 공민정의 방식으로 접근해서 공민정이 느끼는 대로 표현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시나리오도, 현장에서도 많은 부분이 열려있었다. 감독도 내가 희수라고 믿었기 때문에 즉흥적인 상황에 나를 데려다놓고 찍었다. 예를 들어 미아자와 겐지의 시 <무성통곡>을 듣는 장면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현장에서 처음 듣는 시에 촬영 중 감정이 복받쳐 눈가가 빨개진 기억이 난다.

-시나리오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촬영 전 참고한 작품이 있나.

=감독님의 톤을 참고해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이다>를 봤고, 감정원 감독이 권해준 테오 앙겔로플로스 감독의 <안개 속의 풍경>도 봤다. 이 영화의 내용이 마치 희수의 전사 같았다. 희수가 동생과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그런데 <희수>를 준비하는 과정은 다른 작품과 좀 달랐다.

-어떻게 달랐나.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기본적으로 캐릭터와 나의 접점을 찾고, 나의 어떤 모습을 올리고 내릴지 고민하지 않나. 그런데 <희수>를 연기하면서는 애쓰지 않았다. 크게 노력한 게 사실상 없다. 왜냐하면 희수는 곧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하기 위해 연구하기보다 감독님 그리고 나 자신과 많은 대화를 했다. 그랬기 때문인지 희수의 대사는 적지만 영화를 찍으며 마음속으로 수많은 얘기를 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을 온전히 다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닮은 인물에 밀착되면서 감정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나.

=매 신마다 슬펐고, 매 신마다 울었다. 그래서 인물을 객관화하려고도 해보고, 인물로부터 떨어지려고도 해봤다. 계속 눈물을 보이고 감정을 드러내면 과할 테니 감독에게 울어도 괜찮은지 질문도 많이 했다. 다시 찍으면 어떻겠냐고 물으면 정원이는 항상 좋다고 했다. (웃음) 물론 마음을 많이 쓰는 작업이다 보니 아프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 힘듦이 고통스럽고 벗어나고 싶은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슬플 때 슬픈 영화를 찾아보면서 울지 않나. 그러면서 힐링이 되고 원래 상태보다 나아지곤 한다. 나 또한 <희수>를 찍으며 그랬다. 심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이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희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캐릭터와 좋은 스탭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 뭐든 게 고맙기만 한 영화다.

-전주에서 다시 만난 희수를 떠나보내기 전 희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안아주고 싶다. 그 다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영화 속 희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다. 그가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당장 다음주부터 <갯마을 차차차>라는 드라마를 찍으러 포항에 간다. 희수를 잘 떠나보내고 싶은 마음에 시나리오도 다시 읽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희수를 이번에 전주에서 잘 보내주고 싶다. 영화제에서 관객과 영화를 보면서 나의 희수가 많은 사람의 희수가 된 것 같아 뭉클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관객에게도 <희수>가 위로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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