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천사여 악녀가 되라'의 올림픽대교가 의미하는 것
2021-05-26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찍으며 올림픽대교를 계속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했다”라는 후문을 들었다. 이건 어느 정도까지 진지한 말이었을까. 농담처럼 김기영의 계단이 올림픽대교로, 고유한 영화적 장소가 범용한 도시의 이미지로 대치되는 상상을 떠올렸다.

김기영의 기계 도시

윤여정 배우가 이뤄낸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이례적인 사건과 김기영 감독을 언급한 인상적인 수상 소감(“이 상을 제 첫 영화의 감독인 김기영 감독님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했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마지막으로 협업한 결과물인 <천사여 악녀가 되라>(<죽어도 좋은 경험>)가 재조명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개봉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가 김기영 감독의 사후에 비디오테이프로만 공개된 미개봉 유작이라는 전후 사정을 들먹이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사여 악녀가 되라>가 김기영의 필모그래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인지는 아직도 해명하기 난감한 문제처럼 남겨져 있다.

상투형으로 얼룩진 미사여구들을 하나씩 지워보기로 한다. 이 영화에는 ‘하녀’ 혹은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없다. ‘기괴한 시각적 충격’이나 ‘파격적인 상상력’, ‘그로테스크한 화면 묘사’도 상대적으로 적고 얕다. ‘근대적 기획과 전근대적 정신의 불균질한 충돌’과 같은 주제를 중얼거리기엔 그 대립의 강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쥐’와 ‘곤충’으로 은유되는 과감한 표상에의 시도 역시 이 마지막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김기영의 영화를 통틀어 유사하게 반복되는 몇 가지 신호들을 파편적으로 연결지어볼 수는 있을 테지만, 이 영화가 김기영을 둘러싼 통상적인 논의들이 가리키는 주요한 과녁으로부터 빗나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도저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하녀> <화녀> <충녀> <화녀82> 연작 또는 경이로울 만큼 과잉된 양식미를 발산하는 <이어도>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같은 70년대 작업들. 이처럼 ‘후대의 관객’에게 열광적으로 공인받은 김기영의 영화들이 강렬한 이미지와 형식의 잔상을 전제하는 편이라면, 비교적 평탄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고작해야 김기영의 주변적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혹은 이 영화의 공개를 미루며 “후지다”고 치부한 김기영의 자평을 신뢰해야 하는 걸까?

5월 7일부터 18일까지 시네마테크KOFA에서 열린 ‘윤여정 특별전-도전의 여정을 걷다’에 소개된 프로그램 노트에서도 <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어떤 맥락에 위치시켜야 할지 난감해하는 반응이 짐작되는데, 이 영화의 인물들에 대해 “김기영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한 남성을 두고 다투는 두 여성을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에서는 자신을 배신했거나 아들을 죽인 남편에 대한 복수를 위해 두 여성이 연대하는 새로운 여성 관계가 등장”한다고 소개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한 인상을 남긴다.

‘두 여성이 연대하는 새로운 여성 관계’ 같은 문장은 동시대 관객을 호객하기 위해 삽입됐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인지 굳이 엄밀히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식칼을 들이밀며 자신의 남편과 성관계하는 도중에 그를 살해하라고 종용하는 관계에 ‘연대’로 정의할 만한 성질이 두드러진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인간이 맺는 사회적 관계의 정상성을 난폭하게 해부하고 이면에 새겨진 불화를 발가벗기는 김기영의 영화를 수식하는 데 쓰였다면 더욱 의심스러운 진술로 여겨질 텐데, 이는 일견 낡고 시대착오적으로 취급되는 작가의 작업에 허구적이고 임의적인 ‘현대성’을 투사하는 전형적인 구제의 독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백색 치즈>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오손 웰스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책을 빌려 말하는 것처럼 진정 현대적인 통찰은 상투적인 현재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과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언급해두고 싶다.

도시의 장력

다만 극중 최여정 여사(윤여정)와 명자의 관계가 김기영 영화의 새로운 여성 관계로 나타난다는 지적은 이 영화에 접근하는 한 가지 유용한 단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한편으로는 <하녀> 연작을 포함한 김기영 영화들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설정과 이야기상의 기호들을 상당 부분 공유하면서(아이의 죽음, 남편의 정관수술, 남성들의 발기부전, 아내의 불임), 다른 한편으로는 ‘안주인’과 ‘식모’ 혹은 ‘정식부인’과 ‘첩’으로 요약되는 가정 내부의 위계적 관계를 배제하고 있다. 이전이라면 드넓은 가정집 안으로 하녀/식모/첩이 침입해 들어옴에 따라 계약이 성립되고 계단과 방문을 경계 삼아 각자의 영역이 할당되었을 것이다(그리고 하녀들은 그 경계를 넘어서는 몸짓을 보이기 시작할 테다). 하지만 공간을 점유하고 특정한 위치를 부여하는 그러한 계약 조건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면?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첫 장면으로 올림픽대교의 거대한 조형물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도심 공간의 질감, 공사 중인 건물 지대, 한강 다리의 기하학적 외형을 즐겨 보여주곤 했던 김기영의 오랜 관심을 고려하더라도 무척 선언적으로 다가오는 특별한 오프닝인데, 수직으로 내리뻗은 팽팽한 와이어 이미지가 유독 돋보인다. 마치 거미줄과 같은 형상으로 프레임을 포획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시점을 달리한다면 후경에 비친 서울 도심 풍경을 모자이크하듯 조각내어 분할하는 와이어의 줄과 선이 드러나기도 한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김기영 감독의 막내아들인 김동양씨의 회고에 따르면 김기영은 <천사여 악녀가 되라>를 찍으며 “올림픽대교를 계속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얼핏 사소한 것으로 들리는 이 증언을 순진하게 신뢰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어보자.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강화된 국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기획된 기념비적인 상징물. 그러나 시기에 맞춰 만들어지지 못해 뒤늦게 완성된 건축물.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바로 그 올림픽대교를 보여준다. 분명히 이 영화에서는 방사형으로 펼쳐진 올림픽대교의 건축적 형상이 과도하리만큼 강조되고 또 반복해서 나온다.

김기영이 이 조형물에 사로잡힌 이유를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해석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바보사냥>에서 주의 깊게 묘사된 63빌딩과 더불어 도시의 변화를 예민한 시선으로 담아낸 근거로 읽어낼지도 모르지만, 이는 특별히 흥미롭지 않다. 무엇보다 영화의 첫 장면이 선명하게 전달하는 바는 이런 거대한 건축적 조형물의 장력이 영화의 전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숏이 열리면 그다음 숏은 이전 숏에 관한 주석으로 달라붙는다.

이어지는 숏의 역할이 부드러운 연결이든, 급격한 해체든, 예상치 못한 전환이든, 전면적인 폭발이든 근본적인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몽타주를 구축하고 데쿠파주를 설계하는 것은 한 문장을 끝내고 다음 문장을 접속하는 방식이나 바둑의 수순을 이어나가는 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A에서 B로 전환되어야 하는 내적인 논리의 연속으로 영화는 마지막 숏에 도달한다. 화면이 열리고 나면 <천사여 악녀가 되라>의 컷들은 올림픽대교를 비추는 숏의 장력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입부가 암시하는 영화의 속성을 과격하게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올림픽대교의 팽팽한 줄 아래로 노출된 피사체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꼭대기와 연결된 수많은 줄이 대지로 이어지는 건축적 조형물 밑에 인물들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인다. 자동차들은 충돌하고, 시야를 가리는 붉은 액체로 인해 전복되어 끝내 폭발해 불길에 휩싸인다. 불에 타 죽은 아이들의 트라우마 이미지가 인물의 뇌로 되돌아와 죄의식의 플래시를 터트린다. 그 플래시의 빛 번짐은 총구에서 솟구치는 빛과 호텔 침대의 기묘한 빛으로 연결된다. 김기영의 렌즈가 굴절시킨 도시의 구조는 이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녀’ 없는 <하녀>

도시적 규모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면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하녀> 연작의 중심부를 차지하던 계단의 수직선을 들어내고 그 좌표와 위상을 서울 중심부에 건설된 올림픽대교의 수직선으로 확장한 사례라 말할 수 있다. <하녀>의 계단이 은유적인 상징물로 활용되기보다는 물리적인 구조물로 기능하는 것처럼(나는 김기영이 끊임없이 다뤄온 계단이 위아래로 분리된 계급을 지목하는 시각적 상징이라기보다는 신체를 미끄러지게 만들고 넘어뜨리고 끝내 추락시키는 지극히 물질적인 영화의 함몰 장치라고 본다. 김기영의 계단에서 남자와 하녀가 반복하는 건 넘어지고 뒤집히는 신체의 특정한 자세다. 계단은 그런 특정한 자세를 구현하기 위한 표상의 무대로 몇번이고 동원된다), 이 영화의 중심적 조형물도 그와 같은 작용을 발산한다.

가령 영화의 중반 지점에서 명자는 식칼을 들고 남편을 살해할 것을 요구하는 여정을 피해 옥상으로 도망친다. 옥상 난간에 다다르자 명자의 눈앞으로 여정이 칼을 드리우고 있고, 그녀의 뒤편으로는 올림픽대교가 예의 조형적 형상을 과시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공간을 난폭하게 압축시킨다. 물질성이 지워지고 전형성이 대두되는, 혹은 원근법이 가려지고 평면으로 수렴하는 이 컷의 구도에는 영화의 근본적인 장력과 그 파생물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불감증에 시달리는 개인의 몸과 그들의 계약이 증언하는 부서진 가정의 형태가, 그것들을 뱉어낸 서울의 기하학적 단면과 통합된 앵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자의 뒤로 보이는 조형물의 형상은 지금 그녀의 목을 위협하는 식칼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물리적 작용을 일으킨다(옥상에서 명자는 추락하지도, 되돌아서지도 못한 채 움직임을 박탈당해 있다). 말하자면 명자는 여정이 가하는 요구와 그 뒤에 새겨진 도시의 요구에 이중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조형의 형상으로부터 촉발된 김기영의 도시는 본격적으로 내부에 붙잡힌 대상을 균질화한다. <육식동물>의 동식은 호스티스를 강간하기 직전에 차창에 비친 서울의 도심에 대고 중얼거린다. 인구 천만의 도시는 하룻밤 사이 천 마리의 소를 잡아먹고 5천명의 아이를 임신케 한다고. 그의 말처럼 도시는 자동화된 원리로 팽창한다. <천사여 악녀가 되라>의 도시 공간에서는 반복건대 공간적/계급적 구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인물들은 집에서 또 다른 집으로 이동하고, 트라우마와 또 다른 트라우마로 인한 신경증적 증상에 시달린다. 그 사이를 오가는 여정과 명자는 뱀파이어처럼 피를 나누어 협상을 맺는다.

다른 사람의 피를 자신의 몸 안으로 흡입하는 이런 계약 절차는 통속적이지만 또한 의미심장하다. 김기영의 여자들이 취하는 이런 행동은 어느 순간 손쉽게 섹스와 살인을 수행하는 무던한 과격함과 결합해 뱀파이어의 생존법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들은 타인의 피를 갈구하는 대신 남자의 정충을 삼킨다. 달리 말해 그녀들은 송곳니로 피를 빠는 대신 성기로 정액을 흡입하는, 뱀파이어의 뒤집힌 은유다. 이는 또한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생태적 현상과 연결된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뱀파이어 성과 같은 건축적 조형물, 도심을 오가며 살인과 섹스를 교환하는 흡혈귀들. 공장에서 나와 가정집에 침입해 상승 판타지를 꿈꾸는 하녀의 궤적은 이런 환경에서라면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김기영이 바라보기에, 이 도시의 자본주의는 공장 바깥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공장화된 도시 공간을 제외한 고유한 영화적 장소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결론이기도 하다.

서로의 몸을 통과하는 핏방울, 한 남자의 몸을 공유하는 여정과 명자. 그러므로 두 사람이 형성하는 건 ‘연대’와 같은 공허한 용어로 설명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라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계약이다. 그건 상대방의 남편/남편의 내연녀를 살해하는 ‘교환 살인’을 도모하는 것으로 실행된다. 한 생명과 다른 하나의 등가교환. 인간의 삶은 교환 가능한 자본의 다른 모습이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이면서 세계의 차이는 희미해지고 모든 것은 균질한 구도로 공회전하기 시작한다. 발기되지 않는 성기가 정자를 생산하지 못하는 동안, 여자들은 번식을 중단하고 불감증에 시달린다.

아이들은 모두 자동차 사고로 불에 타 죽는다. 여정의 남편은 무심한 절차를 집행하듯 아내와 잠자리를 가진 남자들을 처리한다. 심지어는, 명자의 침실과 모텔방 벽면에는 어처구니없게도 말이 달리는 붉은 바탕의 그림이 똑같이 걸려 있다. 그렇게 도시는 집단적인 패턴을 그리는 대규모 공장지대로 변모한다. 계급으로서의 하녀가 사라진 도시 공간에 승인되지 않은 하녀(들)와 노동자(들)로 범람한다. 익명의 부품들이 작동하듯 지속되는 불모의 기계 도시가 전경화되는 것이다.

반(反)영화적 협상

김기영이 조직하는 인간 피사체는 표면적으로 괴물과 짐승 혹은 곤충의 형질을 드러내는 한편, 심층부에는 기계장치의 원리를 내장하고 있다. 동물성과 기계적 생식기능이 협상하는 이런 이형 결합의 몸은 김기영이 영화 연출 경력을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호기롭게 선언한 형식이며(<나는 트럭이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김기영의 초기 단편은 의인화된 트럭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인간 여자의 배 속에 가득 잉태된 쥐 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충녀>의 한 장면이 환기하는 그의 오랜 문제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여 악녀가 되라>는 김기영의 인물들을 관통하는 기계적 원리가 외부로 표출되는 동물성을 잠식한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불균질한 ‘협상’은 또한 김기영이 영화 형식의 표면에 욱여넣은 자국이다.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는 저급한 스트립 댄서의 신체 클로즈업, 동시대에 양산된 에로영화풍의 섹스 장면, 장총을 들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탐정 캐릭터로 형식적 불화를 이룬다. 여러 장르의 양식과 표현을 오가는 것은 김기영의 장기 가운데 하나지만,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 이르면 추레하고 번잡하기 짝이 없는, 돌려 말할 것 없이 ‘질 나쁜’ 장면들로 얼룩지게 된다. 이것은 스타일의 한계점이었을까? 혹은 고유한 영화적 장소를 상실하고 무작위로 균일화된 도시 이미지에 덧씌우는 반(反)영화적 항변이었을까?

영화 끝부분에 여정의 남편이 운영하는 공장이 도산하고 만다. 기계장치는 작동을 멈추고 남편은 유언장을 써둔 채 두 여인이 꾸며낸 죽음을 받아들인다. 유언장으로 인해 사망보험금을 받지 못한 여정 또한 자동차 폭발로 사망한다. 김기영은 완성된 영화를 끝내 공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에 패배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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