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몰라요>를 보다가 신기한 체험을 했다. 화창한 교실 안, 소녀들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귀여운 동작으로 입술 위에 틴트를 바르고 있다. 뒤이어 그 입술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잔인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화창한 교실 가득 폭언이 채워진다. 그 말들은 너무 자연스레 흘러나와서 충격적이다. 중요한 건 다음 장면이다. 아이들이 공터에서 보드를 타고 있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카메라도 그들과 함께 보드를 타듯 공터 위를 미끄러지며 이곳의 풍경을 담는다. 유명 휴대폰 광고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장면은 아름다울 수 없는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 이르러 즉각적인 메스꺼움과 멀미를 느꼈다. 흔히 멀미는 서로 다른 감각 사이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배를 탔을 때 시야는 평온한데 몸은 마구 흔들리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멀미도 가능할까? 괴롭힘이 난무하는 잔인한 교실과 평화롭고 한적한 공터. 우리는 아무런 통증 없이 이 장면들 사이의 괴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 몸은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정글 같은 교실을 보여준 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자유로이 공터 위를 활주하는 카메라를 지켜보며 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이환 감독 특유의 연출법인 것 같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 연결할 수 없는 것들의 연결. 그는 자꾸만 평화롭게 병존할 수 없는 것들을 바짝 붙여놓는다.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세진(이유미)은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어찌 보아도 그 웃음은 이상하다.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앞에서 주영(안희연)과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고, 은정(방은정)의 정서적인 학대에도 배시시 웃는다. 그녀는 웃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동자로 거듭 기이하게 웃는다. 웃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의 웃음은 긴장을 고조시키기 마련이다. 그 웃음과 현실은 서로 잘못 짝지어진 듯 위태롭고 불안하다.
살기 위한 웃음 뒤의 진짜 현실
그러나 늘 천진난만할 것 같았던 세진은 폭력을 정면으로 직면하는 상황이 오면 마치 시체처럼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다. 이런 상태야말로 폭력의 사슬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진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세진은 낙태 시술자 앞에서 죽은 듯 누워 있고, 재필(이환)에게 얻어맞은 뒤 졸도해버린다. 어쩌면 위험한 생태계의 가장 아래에서 모든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그녀에게, 웃음은 현실을 가리는 얇은 위장막일지도 모르겠다. 세진의 말대로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또 삶에는 웃음이 필요하니까. 마치 얻어맞아서 부르튼 입에 억지로 핫도그를 밀어넣듯이, 아프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그녀는 웃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은 이환 감독의 전작 <박화영>(2018)에도 등장한다. 고등학생 박화영(김가희)은 일진 아이들에게 ‘엄마’라고 불린다. 얼핏 보면 친구들에게 아지트를 제공하고 라면을 끓여주는 화영의 모습이 마치 엄마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엄마라는 호칭이 오가는 상황은 아무래도 기이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상함은 커진다. 화영은 아이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폭력을 받아내는, 마치 분풀이용 샌드백 같은 역할을 떠맡는다. 그녀는 자꾸만 이 모든 상황이 즐겁다는 듯 태연하게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를 외친다. 하지만 너무 큰 폭력을 감당해야 될 때 화영은 잠시 정신을 놓은 듯 멍한 표정이다. 그 표정 위로 무방비하게 쓰러진 세진(<어른들은 몰라요>)의 형상이 겹친다.
우리가 ‘엄마’라는 단어에 담아두었던 그 모든 것. 말의 의미, 사회적인 맥락, 정서적인 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박화영>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불화한다. 이 잔인한 정글에 엄마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환 감독은 일진 아이들의 지저분한 아지트에서 ‘엄마’라는 소리가 발화될 때 느껴지는 정서적인 충격을 섬세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화영이 엄마를 자처하며 잔인한 아이들 사이를 활보하는 모습을 위태롭게 응시한다. 그러니까 <박화영>은 엄마, 박화영, 일진 아이들을 한데 뭉쳐놓은 뒤에 그들 사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긴장과 날선 폭력을 들여다본다.
이것은 이환의 악취미인가. 어째서 그는 자꾸만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서로 붙여놓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 두편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웃음’, ‘엄마’처럼 삶의 필수적인 것들이 결여된 곳에 그것을 억지로 밀어넣는다. 매일 폭력을 감당하는 소녀에게는 웃음을, 부모가 부재하는 아이들에게는 엄마를. 이때 이환은 불편감과 어색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거의 우격다짐으로 욱여넣는다. 그리고 텅 빈 결핍을 억지로 채웠을 때 도리어 파국으로 치닫는 현실을 똑똑히 응시한다. 긴장이 고조되다 도리어 붕괴해버리는 현실을 말이다.
여기 굶주린 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그를 볼 때 단순히 배가 고프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허겁지겁 먹은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모두 토해낸다면 굶주림이 얼마나 오래된 일상이었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이환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는 결핍을 결핍 그 자체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억지로 채운 뒤에 결국 산산조각 나는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을 끝내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이 여기 있음을 강변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며, 누군가의 비극을 현상으로만 바라보고 간단한 해결을 기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유약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상기했다.
자신만의 걸음에 희망을
이런 맥락에서 함께 언급하고픈 영화가 있다. 김수현 감독의 <귀여워>(2004)에는 한 아버지와 세 아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각자 원하는 여성상이 있다. 아련한 첫사랑, 이상한 요구도 품어주는 새엄마, 성관계의 대상까지. 이때 한 여자가 나타나 그들의 요청을 모두 흔쾌히 들어주는데, 결과적으로 그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지가 코믹하게 제시된다. 이 기괴한 아지트가 무너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결핍을 억지로 채운 뒤에 기이하게 뒤틀어지는 형상을 지켜본다는 점에서 이환은 김수현과 만난다.
그래도 이환의 영화에는 늘 한줌의 희망이 남겨져 있다. <박화영>에서는 화영이 마지막에 다시 찾은 웃음과 농담이 그랬다. <어른들은 몰라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세진은 문득 보드에서 내려 천천히 걷는다. 영화는 그녀의 웃음기 없는 표정을 차분하게 바라본다. 어쩌면 빠른 속도로 시원하게 굴러가는 보드는 세진에게 현실을 잊게 하는 하나의 판타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우리에게 느린 걸음을 선보인다. 그녀가 조심스레 현실에 발을 들이며 자신만의 걸음을 시작했다고 보아도 좋을까. 여기에는 억지웃음도, 빠르고 매끄러운 활주도 없다. 하지만 멀미를 불러일으켰던 첫 장면과 달리 그녀의 힘없는 걸음걸이는 또렷하게 나의 각막에 새겨진다. 이 마지막 장면을 힘차게 긍정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