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낙원의 밤'과 '서복'이 보여준 절멸의 스펙터클
2021-06-02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낙원의 밤>과 <서복>의 엔딩이 보여준 살육의 스펙터클로부터 <버닝>의 엔딩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두 불태우거나 절멸시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없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가 바란 세상인가? 문득 퀸의 노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가? ‘Is This The World We Created…?’

길을 잃다

<낙원의 밤>

하나의 유령이 지금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무력감이라는 유령이. 이 말이 다소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낙원의 밤>과 <서복>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미래가 봉쇄된 사회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엔딩 무렵 살육의 스펙터클을 전시한다. 이 장면을 두고 ‘자살의 몸짓’이라 불러도 좋다. 죽음을 각오하고 벌이는 누군가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것임을, 자신에게는 그 어떤 미래도 없음을 알기에 벌일 수 있는 살육의 스펙터클.

공교롭게도 이 두 영화는 죽음의 기운이 만연하다. <낙원의 밤>의 재연(전여빈)은 한달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중이고, 태구(엄태구) 역시 조직의 보스를 난도질한 대가로 (재연의 말을 빌리면) 사형선고를 받고 제주도에 숨어든다.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것은 뇌종양에 걸린 <서복>의 기헌(공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영화만 놓고 본다면, 지금 한국영화는 너무나 위험한 죽음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갈 곳이 사라진 시대

<낙원의 밤>

<낙원의 밤>과 <서복>은 주요 인물들이 죽거나 죽음을 앞둔 채로 끝맺는다. 하지만 이들이 육체적 죽음 이전에 정서적으로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좀처럼 삶의 충동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복>에서 복제인간 서복(박보검)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전 갈 곳이 없어요”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서복뿐만 아니라 <낙원의 밤>과 <서복>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어쩌면 이 두 영화의 인물들은 갈 곳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목적 없는 삶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서복>에서 조직의 대의를 위해 누명을 쓴 채 죽어가던 동료를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죄책감에 시달리던 기헌의 마음은 이미 황무지로 변했고, <낙원의 밤>의 재연은 삼촌(이기영)으로 인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과거의 외상적 사건에 붙들린 채 정서적으로 폐쇄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는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서복>의 임세은(장영남)이나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동차 사고로 누나를 잃은 <낙원의 밤>의 태구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외상적 사건에 현재를 저당잡힌 이들 인물은 부유하듯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갈 곳이 없어 무기력해진 것인지, 무기력하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들에게는 그 어떤 삶의 의지도 없다. <서복>에서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기헌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서복과의 동행을 택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살고 싶다는 의지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정작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것이 <낙원의 밤>과 <서복>의 인물들에게서 우울증의 정서가 느껴지는 이유다.

<낙원의 밤>

마틴 셀리그먼의 지적처럼, 우울증은 정서적 혼란의 종착지다. 그러니까 우울증 때문에 정서적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혼란, 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쓸모없을 것이라는 불안, 즉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이 반복된 좌절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부정적인 설명 양식이 우울증의 핵심이자, 이 두 영화의 인물들이 무기력한 정서에 빠져 있는 이유다. 무언가가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서복의 삶은 그 단적인 사례다. 이들 영화의 인물들에게는 삶의 목적이 없고, 그렇기에 그들은 행위자라기보다는 그저 ‘겪는 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 영화가 죽음을 앞둔 인물들을 내세워 미래를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적 반응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라고 말할 때, 그 속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물리적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무언가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미래라는 표현에는 어쩔 수 없이 환상이 내포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음이 예고된 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러니 아무 환상도 없을 수밖에. 오해는 말라. 나는 이들 인물들에게 죽음이 예고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육체적 죽음 이전에 정서적으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서복>

<낙원의 밤>과 <서복>은 관객에게 인물의 이 무기력한 정서에 공감해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낙원의 밤>은 장르가 요구하는 기본적 사건을 기계적(또는 의무적)으로 배치한 뒤 그 사이사이를 재연과 태구의 정서(또는 그러한 정서를 갖게 된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들로 채운다. 재연의 삼촌이 죽은 뒤 도피한 펜션에서 늦은 밤 각자의 방에서 잠 못 이루는 태구와 재연을 보여주는 숏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이 침묵의 숏들이 인물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정서적 효과를 관객에게 전달하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낙원의 밤>과 <서복>은 사건이 갖는 힘보다는 인물의 정서를 앞세우는 영화들이고, 그렇기에 지금의 인물을 설명할 수 있는 과거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대표적인 것이 재연이나 기헌에게 있었던 과거의 사건일 텐데,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인물에게는 외상적일 수 있지만 관객에게는 조금도 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객이 인물의 정서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이 되는 과거의 사건이 설득력을 가져야 하지만 이 사건들은 서사의 인과적 논리를 갖추는 데만 도움을 줄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사연이 인물의 정서를 상투적인 전형성의 틀에 갇히게 하고, 이로 인해 인물의 정서와 관객의 반응(또는 공감)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 <서복>은 반복적으로 과거의 사연을 들려주는데, 오히려 그것이 복제인간을 사이에 둔 가치관의 대립을 보여주려 하는 영화적 시도와 충돌하는 효과를 낳는다. 실제로 <서복>은 인물들이 지향하는 가치의 대립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서복은 일종의 리트머스종이와 닮아서, 그와 관계된 인물들이 어떤 욕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징표 역할을 한다. 서복을 어떠한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각 인물의 욕망과 세계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서복을 통해 누군가는 영생의 삶을, 탐욕을, 권력을, 그리고 죽은 아이의 부활을 꿈꾼다. 하지만 <서복>에서 이러한 차이는 단지 나열될 뿐 서사적 대립과 갈등의 핵심으로 자리하지 못한다. 기헌과 안 부장(조우진)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동료의 죽음에 얽힌 과거의 원한이 생존을 위해 서복을 지켜야 하는 기헌과 서복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안 부장의 차이를, 더 나아가 (그것이 선명하지 않다 해도) 서복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가려버린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사적 원한이 복제인간에 대한 철학적 대립의 가능성을 축소함으로써 삶과 죽음이라는 영화의 주요 테마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회피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안 부장과 김천오(김재건)의 대립이나 안 부장과 서복(또는 기헌)의 대립 역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 소모적으로 활용될 뿐이다.

과거를 기웃거리기

<서복>

무엇보다 서복이 이 세계의 다양한 욕망과 세계관을 가시화하는 리트머스종이라면, 서복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 또는 그의 시선에 여과되는 세계의 모습이 좀더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져야 한다. 하지만 서복에게 투사되는 세계는 너무나 전형적이고 상투적이다. 생애 처음 연구실 바깥으로 나온 서복은 어느 재래시장의 풍경에 이끌린다. 일반적으로 재래시장은 기하학적 척도에 의해 측정 가능한 개념적 공간보다는 추억과 감정이 배어 있는 하나의 장소로 여겨진다. 그래서 재래시장은 점차 소멸되어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한 향수라는 낭만적 감정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 마치 도시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골목길을 낭만화하는 시선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재래시장이라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시선을 과거로 향하게 한다.

<서복>의 신학선(박병은)은 서복에 관한 연구를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들’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복>은 가장 미래적인 설정으로 과거를 기웃거리는 영화다. <서복>은 단지 소재적 차원에서만 SF 장르와 관계를 맺으면서 복제인간이라는 화두가 제기할 미래의 문제를 회피한다. 물론 과거에 얽힌 매듭을 풀 때 미래도 준비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서복>이 준비하는 미래는 너무도 희미해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낙원의 밤>과 <서복>은 미래 대신에 외상적 사건의 기원(재연, 기헌, 임세은 등)으로서의 과거와 향수의 대상(재래시장, 태구의 물회에 얽힌 기억 등)으로서의 과거를 자꾸 되돌아보려 한다. 현재를 잠식한 고통스러운 과거와 그리움으로 낭만화된 과거, 이는 과거에 대한 정반대의 태도처럼 보이지만 비대해진 과거가 현재를 잠식하고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그 역할은 동일하다. 그렇게 현재는 과거에 붙들리고, 미래와 그 속에 내포된 환상은 자신의 자리를 잃는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미래는 더이상 좋은 삶의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일 뿐, 환상이 자리할 틈이 없다. 그것이 존재한다 해도, 목 뒤의 튜브로 무언가 되기를 바라는 꿈을 착취당해야 하는 서복과 유사한 미래가 존재할 뿐이다. 시시포스보다 더 가혹한 운명 앞에서 이들 영화가 선택한 것은 인물에게서 미래의 가능성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가 사라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절멸의 스펙터클, 자살의 몸짓

<서복>

<낙원의 밤>과 <서복>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라 영화 자체도 마찬가지다. <서복>은 서복이 복제 과정에서 돌연변이로 얻게 된 초능력을 과시하는 장면들을 영화의 주요 스펙터클로 제시한다. <서복>에서 이러한 초능력은 말 그대로 돌연변이의 결과일 뿐, 영화가 내세우는 테마와 별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복제인간을 매개로 한 삶과 죽음의 테마가 돌연변이 소재의 영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이는 <로건>(감독 제임스 맨골드, 2017)과 비교하면 좀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로건>은 돌연변이의 초능력을 스펙터클화하면서도 삶과 죽음이라는 테마를 영화의 중심에 놓지만, <서복>의 돌연변이적 초능력은 스펙터클의 전시에 종속되어 있다.

물론 그 정점은 안 부장이 동원한 군사력과 서복이 맞붙는 장면이다. 그런데 서복은 무엇을 위해 이 전투를 벌이는 것일까?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도, 기헌을 살리는 것도, 아니면 무언가에 대해 복수를 하는 것도 그 행동의 이유는 아닌 듯하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것은 ‘심판’에 가까운 행위다. 실제로 이 장면에서 서복은 마치 타락한 자들을 절멸하려는, 그럼으로써 현재의 시간을 끝맺으려는 심판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시간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거나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매듭짓기 위한 처참한 살육, 그렇기에 우리는 그 장면을 절멸의 스펙터클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낙원의 밤>의 엔딩에서 우리가 보는 것 역시 재연이 벌이는 절멸의 스펙터클이다. 절멸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없다는 듯 펼쳐지는 이 살육의 광경은 이 무의미한 현재의 시간을 끝맺겠다는 차가운 광기만 존재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다는 하나의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환상을 품지 못하는 미래 앞에서 인물이 현재를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재연과 서복은 누군가를 절멸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성마저 그 절멸의 일부로 삼는다. 그 끝이 자신의 죽음임을 알면서 벌이는 이 절멸의 스펙터클은 자살 외에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받을 방법을 갖지 못한 자들의 절규와 허무의 몸짓이다. <낙원의 밤>과 <서복>의 재연과 서복은 자살의 몸짓, 또는 절멸의 스펙터클에서 자신의 유일한 쓸모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무력한 삶에서 벗어나는, 또는 그것을 끝맺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러한 면에서 <낙원의 밤>과 <서복>의 엔딩 장면은 <버닝>(감독 이창동, 2018)의 엔딩을 떠올리도록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운 채 영도의 지점으로 돌아가는 극단적인 선택 외에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세계. 절멸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 세계. 결국 이 절멸과 자살의 스펙터클은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의 그림자이다. 스스로의 존재성을 지우고, 세상을 절멸시키는 것 외에는 그 외부를 향한 영화적 상상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상상력이 봉쇄된 이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한계 지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환상을 잃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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