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녀>
제작 한립물산주식회사 / 감독 김기영 / 상영시간 120분 / 제작연도 1972년
김기영 감독은 1960년작 <하녀>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서구영화의 문법과 장르 관습들을 자신의 것으로 다시 창안했고, 영리한 연출과 제작의 효율성이 빛을 발하며 상업적 성공과 미학적 성취가 동시에 창출됐다. 그의 아홉 번째 극영화 <하녀>가 전체 32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유다. 연출자로서의 김기영은 타고난 천재성과 부족한 제작 기반에서 비롯된 작가주의적 태도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체화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프로듀서이기도 했던 그는 대중적 흥행성을 영화 제작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하녀> 이후 특유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예의 그 독창성을 여러 장르들과 접합해본 김기영은 1960년대의 흥행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자 1970년대 초입 다시 중산층 부부와 식모 사이에 벌어진 기이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제작자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그가 <하녀>라는 흥행 보증수표를 그냥 묻어둘 리 만무했다.
피해망상과 질투라는 감정
1970년에 제작하고 이듬해 개봉한 <화녀>는 그 첫 번째 리메이크였다. 김기영의 계산대로 이 영화는 개봉관인 국제극장에서만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1971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천년호>(감독 신상옥, 1969)의 특별감독상 수상으로 처음 개척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윤여정이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김기영은 <화녀>가 개봉한 지 1년 만에 다음 작품에 착수하는데, 바로 <충녀>였다. 원제가 <속 화녀>인 것에서 엿볼 수 있듯이 <화녀>의 흥행 성공과 평단의 호평을 이어가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그동안 다수 평자들이 <하녀>의 리메이크 시리즈는 <화녀> <화녀 ’ 82>, 그 변주는 <충녀>, <육식동물>(1984)이라는 흐름으로 구분하곤 했지만 사실 <충녀>는 <하녀>와 <화녀> 두 작품의 리메이크로 파악하는 편이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김기영은 본처와 남편 그리고 식모/첩의 삼각관계를 변주하기 위해 또 다른 실화를 찾아낸다.
시나리오의 첫 페이지에 “지난 3년 동안 신문 3면에 보도된 기사들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1967년 3월에 일어난 참극, 명보극장 사장 살인 사건이 영감의 근원이었다. “50대 남성들이 가슴 밑바닥에 감추고 있는 패배감과 수억년 동안 진화, 완성된 감정들 중 하나인 질투”는 이렇게 영화의 본질이자 서사의 동력이 된다.
영화는 <하녀>에서 활용한 액자 구조를 다시 가져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하녀>의 액자식 구성이 영화와 현실의 거리두기, 즉 당대 관객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충녀>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근사한 이중전략으로 승화된다.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중년 남자들이 새로 입원하는 이교수(남궁원)에게 서로 질세라 남권을 찾아야 한다고 소리 높이는 와중에 자신을 생물학자라고 소개하는 한 남자는 피해망상의 극단을 보여준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것은 교미를 끝낸 곤충의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것처럼 사실상 여자에게 살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제야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고 그 배경으로 1970년대 서울의 언캐니(uncanny)한 풍경이 실려나온다. 사각형으로 구획된 낯선 공간에서 서서히 카메라가 줌아웃하면 산을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동네가 드러난다. 후경에는 아파트 건물이 둘러서 있고 그 앞으로 단독주택 부지로 보이는 공간들이 들어서 있다. 인간의 삶이 곤충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어 체육 수업으로 학생들이 자리를 비운 교실이 보인다. 여고생 명자(윤여정)가 시계를 훔치다 담임에게 들켜 그에게 던져주고, 돌아온 반 학생들이 명자를 의심하자 그녀는 면도칼을 들어 공책을 긋는 것으로 대응한다.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면도칼은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된다.
블랙코미디와 공포 스릴러의 공존
하교하는 명자는 언덕길을 오르고 아파트 계단을 오른다. 이때 명자는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발길이 잡혀 계단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업에 실패하고 병마저 든 아버지는 들것에 실려 그 계단을 내려갔고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첩이었던 어머니와 대학을 마치겠다는 오빠는 집에 도착한 명자에게 요정에 나가 자신들을 부양하라고 말한다. 가족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울고, 녹색 양장으로 갈아입은 명자는 눈물을 흘리며 올라온 길을 내려간다. 그녀의 뒷모습을 잡던 카메라는 저 멀리 빌딩 숲으로 시선을 옮기며 호스티스로 전락한 명자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담(박정자)과 경희(사미자)의 계략에 빠져 성불능이던 동식(남궁원)과 관계를 맺고 첩이 되기로 결심한 명자는 그의 집을 찾아가 오여사(전계현)와 만난다. 본처 오여사는 명자에게 남편의 공유를 제안한다. 낮 12시부터 밤 12시까지는 본처가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동식과 지내고, 밤 12시가 되면 본가로 남편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본처는 남편의 건강을 책임지라며 명자에게 월급까지 지급한다. 셋의 기이한 관계는 명자가 아이 갖기를 원하면서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러닝타임이 2시간에 달하는데, 전반의 한 시간 정도는 본처와 첩이 남편을 공유하는 생활이 블랙코미디 톤으로 펼쳐지다가 후반부는 공포 스릴러로 분위기가 급변한다. 오여사는 명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강제로 남편의 정관수술을 진행하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명자는 유서를 쓰고 자살 소동을 벌인다.
이후 부인은 영화 초입의 주택 부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층집에 동식과 명자를 이사시킨다. 이제 이층집은 공포영화의 주 무대가 된다. 이 영화가 마치 1부와 2부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시나리오를 통해서 추정해볼 수 있다. 마치 내 머릿속에 있는 중요한 내용을 다 알려줄 수 없다는 듯 김기영은 63신의 자살 소동까지만 시나리오에 담고 있다.
이삿날 냉장고 속에서 발견된 아기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논리적 이해가 불가능한 환상의 세계로 진입한다. 동식의 딸이 이사 선물로 포장해 보낸 쥐들은 무한 증식하고, 명자가 키우기 시작한 아기는 돌연 사라졌다 죽은 채 냉장고 속에 들어와 있기도 한다.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는 아기, 또 명자의 배 속에 잉태된 쥐들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는 이미지들이 꿈으로 처리되지만 영화 속 현실과 환상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아기 시체는 인형으로 밝혀지지만 형사반장은 시체가 어디 있냐며 오여사를 추궁한다. <충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우면서 김기영의 기존 세계관에서 더 나아간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우리는 납득할 수밖에 없다. 액자 구조 밖의 에필로그도 꼭 확인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