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인트로덕션'의 수많은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
2021-06-30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지지난주에 송경원 기자가 영화에 대한 ‘서문’을 적었고, 지난주 김소희 평론가는 프레임에 불쑥 나타나는 영호의 손에 집중한 비평을 썼다. 두 글과 느슨하게 공명하면서, 결코 통합되지 않는 세 번째 ‘인트로덕션’으로 읽히길 바란다.

현재와의 대결

세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에서 가장 짧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에는 유독 ‘기다림’을 가리키는 대사와 상황이 자주 나온다. 첫 장면에 책상에 앉아 기도하는 영호 아버지(김영호)의 모습을 시작으로, 아버지가 불러서 한의원을 찾은 영호(신석호)는 동행한 여자 친구 주원(박미소)에게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다. 한의원 안에서 영호는 오랜만에 재회한 간호사 누나(예지원)와 진료 중인 아버지에게 번갈아가며 기다리라는 말을 듣는다. 그보다 더 안쪽 진료실에선 먼저 치료를 받던 여자 손님과 이곳에 예기치 않게 방문한 연극배우(기주봉)가 커튼으로 가려진 침대에 누워 영호의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계단을 올라와 다시 책상에 앉으며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인 기도하는 자세를 되풀이한다. 바깥에서 안으로, 문 밖에서 진료실 내부로, 다시 그 안의 작은 침대로 영화는 크기를 좁혀가며 인물들의 위치를 조정하고 붙잡아둔다. 하나의 공간 너머에 작은 공간이 있다. 그 안에 또 하나의 공간이 생겨나고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그렇게 세계의 너비는 폐쇄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 자리를 지키는 인물들에게, 혹은 그들을 지켜보는 영화의 표면에 남겨지는 것은 수동적인 기다림의 시간이다.

<인트로덕션>을 관류하는 반복된 ‘기다림’이라는 사태는 평범한 극영화에서라면 생략하거나 제거되어야 마땅한 대상으로 치부하기 쉽지만, 정작 영화는 그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에 매체의 근본적인 속성을 기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다림이라는 상태를 전제하지 않는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체험은 장면이 전환되는 순간마다, 혹은 처음에서 끝으로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영화의 시간을 지켜보면서 지속되는 관객의 기대와 기다림에 기초한 논리적 운동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트로덕션>에서 홍상수가 설정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예외적인 상태가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원리로 작동한다거나 연출자가 고수하는 고유한 미학적 전술이라고 성급히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 영화에서 강박적으로 구축하는 기다림, 수동성, 유예된 시간이라는 문제는 영상을 움직이게 하는 허구적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또 다른 규범으로 작동한다.

14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1부에서 홍상수는 이야기를 생성시키는 데 필요한 개별적인 상황을 진전시키는 대신, 서로 다른 기다림에 붙들려 있는 여러 개의 상황을 병치한다. 예컨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상황’이 주어졌을 때 관객이 흔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는 둘 중 하나다. 성공적으로 아버지를 만나거나, 모종의 이유로 만남에 실패하거나. 조건에 따라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빗나가는 이 결과는 어느 쪽이든 이야기에 균질한 궤적을 덧입히고 다음 목적지로 움직이는 인물의 선택에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인트로덕션>에서 홍상수가 택한 방법은 이와 같은 내러티브의 일반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열의 구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상황’의 뒤로 ‘아들이 간호사와 재회한 상황’을 마련해두고, 그와 동시에 ‘배우가 아버지를 찾아온 상황’을 겹쳐두는 식이다.

새로 형성되는 화면에 드러나는 목적은 앞서 형성된 상황의 목적과 결부되면서 영화의 방향성에 교란을 일으킨다. 무엇을 더 주의 깊게 주시해야 할까? 어느 상황이 먼저 해소되어야 할까? 아들의 기다림인가, 배우의 기다림인가. 아버지는 계단을 내려와 누구에게 다가갈 것인가. 영화가 제공하는 제한적인 정황 가운데서는 어느 쪽으로도 합당한 추론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중첩된 서로 다른 상황들 사이에서 영화는 어느 하나의 상황을 중심적인 사건으로 구획하거나 위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복수로 분화된 ‘기다림’의 효과로 인해 영화는 어느 한 인물의 기다림이 발생할 때마다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인트로덕션>에서 반복된 기다림이 스크린에 도입하는 게임의 규칙이란 이런 것이다. 기다리는 인물의 모습을 설정해둘 것, 그리고 그 상태를 결코 해결에 이르게 하지 않을 것. 화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은 눈앞에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로 인해 확실하게 끝맺음을 내는 법이 없고 언제나 유예되거나 부득이하게 중단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혹은 커튼에 가려진 침대를 비추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다림’이라는 사태는 카메라의 눈으로도 식별하기 어려운 불확정적인 구역에 남겨진다.

평면의 서사

이러한 규칙이 영화에 가하는 압력은 이야기의 진행을 둔탁하게 가로막는다. 장면과 다른 장면이 결합하면서 일관된 의미를 산출하는, 혹은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조직하면서 균일한 공간적 감각을 구현한다는 일반적인 몽타주의 논리는 이 영화에서 무조건적인 실현을 담보하지 못한다. 오히려 일반적인 관습과는 무관하게, 이 영화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앞선 상황에서 주어진 인물들간의 정보와 정서를 누락하고 비약적으로 배반하기 일쑤다. 영호를 기다리는 주원의 존재감이 지워지고,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영호의 목적이 흐릿해질 즈음, 그 뒤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현관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는 영호와 간호사의 몸짓이다. 다정하지만 생경한 그들의 몸짓과 예전 기억을 되살려내며 다시 한번 간호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영호의 말은 지금껏 지켜본 어떤 장면으로도 설명되지 않지만, 반대로 앞에 제시된 모든 장면이 사라지더라도 성립될 것 같은 터무니없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 장면은 1부의 마지막이다. 그런데 이 종점에 이르기까지 축조된 다른 장면들은 이 장면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서로 다른 ‘기다림’을 산출해내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숏을 표층적으로 배열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트로덕션>은 여러 겹으로 분화하는 세계를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이물감을 간직한 하나의 평면 위에서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장면에, 그리고 그 장면의 옆에 복수화된 세계가 동시적으로 거한다.

홍상수는 장면이 하나씩 덧붙여짐에 따라 이야기의 윤곽이 선명해지고, 숨겨진 의미가 드러나는 영화의 원리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린 것처럼 연쇄적으로 화면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영화의 형태를 성립시키는 데 필수적인 구조인지 되묻는다. 그리하여 <인트로덕션>이 펼쳐내는 파편적인 전개는 ‘영화’라는 복합적인 장치의 요소와 속성을 따져 묻는 내밀한 절차로 변모한다. 입체적인 서사의 조직을 중단시키는 이 영화의 반복된 ‘기다림’이 겨냥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현실의 이미지를 찍는 영화가 영상이라는 움직임의 형태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고정된 서사의 틀이 포획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다. 아무리 이야기의 질서에 저항하고 그것을 해체하려는 시도라 할지라도 서사라는 규범 자체를 파기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홍상수는 그런 의미에서 움직임을 전제로 두는 영상의 서사를 부동 상태로 멈추게 하는 방법을 도입한다(그의 최근작들에서 운동이 제거된 사진적 이미지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방법을 실행한 결과물이 <인트로덕션>의 1부를 채우고 있는 ‘기다림’의 장면들이다. 상술한 대로, 이 장면들은 통합된 전체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며 미완의 서사를 끝없이 지연시키고 영상의 표면에 혼선을 일으킨다. 이는 선형적 서사를 해체하고 거부하는 일차원적인 저항의 작업이 아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서사의 조각들을 같은 크기로 하나의 평면에 배열하는 것이다. 그렇게 균질한 서사로 조직되지 않는 하나의 기다림과 또 다른 하나의 기다림은 미완의 상태로 남겨지고 이야기는 그 어느 것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과격한 게임의 규칙을 빌려, 이 영화의 장면들은 위계적 서사라는 영화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내기에 이른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인트로덕션>을 두고 비평적 분석이 개입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 너무나 투명하고 온전한 작업이라는 식으로 언급하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이다. 이런 반응은 역설적으로 통상적인 미장센 비평이 고수하는 시각이 홍상수의 신작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무기력한 고착 상태에 이르렀음을 밝히는 난감한 고백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프레임에 드러나는 시각적 구성에 찬사를 보내거나, 그 반대급부로 스크린에 비치는 모든 것을 비워버린 듯한 창작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은 <인트로덕션>이 제기하는 문제를 환기하는 데 유효한 관점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이런 견해들과는 반대로 <인트로덕션>은 카메라 렌즈에 붙잡히는 상황의 시각적인 기호들을 모두 정지시킨 뒤, 서사적 기호를 배제하고 픽션의 규칙을 전면에 내세워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모험적인 사례로 호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모험은 영화라는 견고한 질서가 이질적인 작은 교란으로 흔들릴 때 실행된다. 달리 말하면, 이는 영상에 부여된 불가피한 규칙과 영화가 설정한 새로운 규칙이 벌이는 긴장의 폭발이다.

영호는 왜 바다에 몸을 던졌나

<인트로덕션>의 인물들은 잠정적인 미래 시제를 가리키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가 같이 있으면 좋을 거야,” “내가 고쳐줄게. 걱정하지 마.” 하지만 그 말들은 대부분 실패한 결과로 도착한다. 생각해보면 ‘기다림’이라는 감각 또한 미완의 미래를 가리키고 있지만, 금방 부서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트로덕션>은 영화가 스크린에 비치는 ‘현재’라는 시간을 정확히 마주할 수 있는지 도발적으로 성찰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현재를 가리키는 영화라는 틀이 사라져버린 영화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연극배우가 영호에게 큰 소리를 내지르며 일갈하는 장면에서 열악한 소형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에 붙잡힌 포커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흐릿한 형체로 노출한다.

화면의 ‘현재’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는 눈. 슬쩍 제기된 이 문제는 한쪽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주원의 질병과 연관되면서, 이례적으로 직접 촬영감독으로 카메라를 잡은 연출자의 눈을 또한 연결 짓는다. 고다르의 말처럼 인간이야말로 두눈이 먼 존재라면, 시각이 억제된 영화라는 체계는 어떻게 ‘현재’라는 시간과 대면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영호는 난데없이 바닷가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어쩌면 ‘현재’를 지탱하려는 영화의 마지막 몸짓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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