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는 2500년 전, 지옥문을 연 요괴 앞에 부처가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부처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괴의 두눈을 뽑아버렸다. 각각 붉고 검게 빛나며 부처를 피해 달아난 두눈은 결국 사리함에 갇혔다. 그러나 2005년, 한 학자가 인도, 파키스탄 국경 지대에서 사리함을 발견하면서 봉인이 풀릴 위험에 처한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한국. 7일 안에 붉은 눈과 검은 눈이 만나면 지옥이 펼쳐진다는 전설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제8일의 밤>에 당도한다.
김태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제8일의 밤>은 독창적인 세계관 속에 종교적인 색채와 장르적인 재미를 부여한 한국형 오컬트영화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외형을 갖추고 달려가는 이 영화는 귀신을 보는 전직 승려 진수(이성민)와 기괴한 사건의 실마리를 좇는 강력계 형사 호태(박해준)가 벌이는 8일간의 추격전으로 압축되기도 한다. 스칠 듯 해칠 듯 서로를 경계하는 두 사람을 연기한 배우 이성민과 박해준은 실은 연극 무대에 함께 섰던 추억을 가진 오랜 선후배 사이. 오랜만에 한 프레임에 들어온 두 배우에게 <제8일의 밤>에 얽힌 오싹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시나리오 표지에 <금강경>이 적혀 있었다고. 작품의 첫인상이 남달랐겠다.
이성민 유튜브로 양자역학이나 입자물리학 강의를 듣는 취미가 생겼을 무렵에 <제8일의 밤> 시나리오를 받았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본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던 차에 우리가 보는 세계 이외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진수라는 캐릭터를 만난 거다. 당시 성철 스님이 양자역학을 인용하는 내용도 들었는데, 시나리오 표지에 <금강경>이 있기에 영화에 더 관심이 생겼다. 감독님을 처음 만난 날 우주와 빛에 대해 몇 시간을 얘기했다. 새로운 작업이 되겠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
박해준 나는 양자역학 생각은 안 했지만(웃음),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절에 자주 다닌 기억이 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런 부분에 관심은 늘 있었다. 시나리오에 불교에서 말하는 번민과 번뇌, 걱정과 후회가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흥미로웠다. 이걸 어떻게 찍으려는 걸까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오프닝에서부터 산스크리트어 내레이션으로 부처와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태형 감독이 배우들에게 이 영화만의 세계관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궁금하다.
이성민 표면적으로는 검은 눈과 붉은 눈이 만나지 않게 7일 안에 막아야 한다는 플롯이 있지만 그 안에는 인물들의 고(苦)와 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세계관보다도 진수의 고, 호태의 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눈 것 같다. 진수와 청석(남다름)이 어떤 관계인지, 진수와 청석의 부모는 어떤 인연이 있는지, 그로 인해 진수가 청석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해.
박해준 영화에서 형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지 않나. 인물들의 과거나 연결 고리를 잘 몰라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부분들이 있어서 감독님과도 대화를 아꼈다. 진수가 바라보는 세상과 달리 호태가 바라보는 세상은 현실적이기 때문에 호태가 믿지 못하는, 알지 못하는 지점을 표현해줘야 의미가 산다고 봤다. 대신 호태와 후배 형사 동진(김동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인물들의 동력은 정서적인 측면에 기대고 있지만 영화 자체는 오컬트 장르를 표방한다. 평소 오컬트 장르를 즐겨보나.
박해준 사실 호러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무섭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암시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무섭더라도 ‘저건 영화지’ 하면서 딴생각을 한다.
이성민 무슨 배우가 그래? (웃음)
박해준 <링>도 안 무서웠다. 그래서 잘 안 보는 편이다.
이성민 오컬트영화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사바하>처럼 미스터리 스릴러 스타일이면 괜찮지만 <주온>은 귀를 틀어막고 봤다. 아내가 집에서 IPTV로 공포영화를 볼 때면 방에 들어간다. (웃음) 그런데 <제8일의 밤>을 준비하면서는 감독님에게 이 영화가 반드시 징그럽거나 무서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진수가 느끼는 세계가 시각적으로 잘 표현되길 바랐다.
-악귀를 퇴치하는 전직 종교인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강력계 형사의 만남은 오컬트 장르에서 매우 익숙한 구도다. <제8일의 밤>은 그 익숙한 구도에 한국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이성민 배우는 직접 스님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고 들었다.
이성민 스님을 만나 영화 속 진수가 하는 일을 실제로 하는 분이 있는지 물었다. 스님 중에도 구마를 하는 분이 있다고 하더라. 퇴마보다는 구명이나 천도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귀신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거지. 그렇게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며 상상을 더했다. 진수의 등 뒤에는 천도를 원하는 귀신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진수가 방에 앉아 있을 때 등에 손을 얹는 귀신을 포함해 영화에서 진수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실은 귀신인 경우가 많다. 진수가 무당 집을 찾아가다 만난 아저씨, 공사장에서 진수 뒤에서 떠드는 사람들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찍었다. 감독님이 그 지점을 관객이 눈치챌 수 있게 연출하지는 않았다. 의도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만들었으니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수많은 귀신을 스치는 동안 진수는 청석과 함께한다. 두 사람 사이에 코미디부터 슬픈 드라마까지 있다. 남다름 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였다.
이성민 다름은 드라마 <기억>에서 내 아들 역할로 먼저 만났었다. 그때 다름이 배우로서 고민하던 것들을 들어준 기억이 있다. 다름이 워낙 점잖고 진중하다. 모범생 느낌도 있고. <제8일의 밤>을 찍을 때는 청석으로 좀더 순수하고 순박한 모습이었으면 했다. 관객에게 귀엽고 예쁘게 보였으면 했다. 그래서 다름에게 장난을 많이 쳤다. 밥 먹을 때도 부르고, 골프 연습장에도 불러서 공 한번 쳐보라고 시키면서 어울렸다. (웃음) 그러면서 다름에게서 점점 청석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하더라. 청석이 가게에서 계산하는 장면이었나, 한번은 다름이 표정이 너무 좋아서 내가 엔지를 내기도 했다. 연기자로서 다름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더 멋진 20대 배우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가능성을 봤다.
-남다름 배우와의 호흡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캐스팅 소식이 알려졌을 때는 <미생> 영업3팀의 오 차장과 천 과장이 스님과 형사로 재회했다는 점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이성민 배우와 박해준 배우는 극단 차이무에서부터 인연을 쌓았는데, 함께 캐스팅됐을 때 어땠나.
박해준 같이 공연도 했고, 드라마도 했는데 <미생>을 찍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다시 작품으로 만나고 싶더라. 선배님이 전국 방방곡곡 맛집도 잘 아시니까 옆에 있다 보면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좀 있었고. (웃음)
이성민 어떤 작품이든 주연을 맡으면 조연 캐스팅이 기대된다. ‘이 배우가 같이한다고?’ 하며 놀란 경험이 더러 있다. 누구든 너무 고맙다. 해준이가 <제8일의 밤>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그랬다. 호태가 쉽지 않은 역할이다. 자칫하면 이런 장르에 나오는 전형적인 형사 역할일 수 있다. 근데 해준이가 그 안에 깊이를 만들어주고, 흔치 않은 결로 인물을 풀어나갔다. 그게 영화를 좀더 안정적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 연극할 때는 볼품없는 차림으로 만나서 컵이나 차고 그랬는데(웃음), 해준이가 점점 유명한 배우가 되기 시작한 뒤 <미생> 때 만났는데 신기하더라. 그때보다 이번에 만났을 때 훨씬 편했다. <미생> 때 불편했다는 게 아니라 이제야 우리 둘 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달까.
박해준 근데 생각보다 촬영이 겹치는 날짜가 없더라.
-진수와 호태가 영화 시작 후 45분이 지나서야 만난다. 두 사람의 동선이 언제쯤 겹칠까 기다리면서 봤다.
이성민 둘 다 여유가 생겨서 좀더 편한 마음으로 촬영을 즐기고 싶었는데 추억을 많이 못 만든 것 같기도 하고.
박해준 그래도 스탭들과 같이 볼링대회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를 생각하면 꿈만 같다. 코로나19 이전이라서 회식도 하고 그랬는데.
이성민 아무튼 같이 어리바리한 시절을 보낸 배우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건 항상 좋다. 이번에 되게 짧게 만났는데 다음에 더 오래 만날 수 있는 역할로 다시 봤으면 싶고. 특히 해준이가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박해준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들이 <제8일의 밤>에 있다. 악랄한 역할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같은 대사도 하고. (웃음)
-호태에게서 본 박해준 배우의 본질에 가까운 모습이 무엇인가.
이성민 호태는 해준보다 더 어둡고 시니컬하지만 순박함이 통한다. 해준이가 부산에서 온 광역시 친구인데, 마치 산골짝에서 살다온 것 같은 순박함이 있다. 박해준이라는 배우가 실제로 어떤지는 대중이 아직 잘 모를 거다.
박해준 이 나이에 무슨 순박함입니까? (웃음) 대본상으로 호태 캐릭터는 우리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많이 봐온 열혈 형사가 맞다. 그런 모습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지만 순간순간 더 인간적인 모습, 집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긴 했다. 이런 점이 이전 캐릭터들보다 좀더 내 모습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비 내리는 6일째 낮에 만나 결전의 8일째 밤까지, 진수와 호태가 붙는 액션 신이 유독 많다.
이성민 액션이라기보다 몸싸움이었다! 달리다 자빠지고 구르는 게 다라서 따로 준비한 건 없는데, 해준이가 생각보다 발이 좀 느렸다. 내가 힘껏 도망가면 잡지를 못하더라.
박해준 선배님이 나보다 나이가 있으니까 걱정했는데,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웃음) 너무 빠르고 유연하셔서 운동을 따로 하나 싶었다.
이성민 안 해! 옛날에 연극할 때도 보면 해준이가 몸을 잘 쓰는 배우는 아니었다. 우리는 컵차기라는 걸 했다. 제기 차듯 컵을 발로 차서 안 떨어뜨리는 게임인데, 해준이가 제일 못 차는 멤버 중 하나였다.
박해준 아니다! 중간은 갔었다! 절대 하위권은 아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기억이 다른 걸로 알겠다. (웃음) 두 인물이 영화에서 맞붙기까지 부각되는 건 그들의 고독함이다. 진수와 호태 모두 짙게 그을린 낯빛을 하고 초췌해진 얼굴로 이를 드러낸다. 김태형 감독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지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성민 이야기는 인류의 미래가 어둠의 세계를 향해가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우주의 중심이 나이듯 결국 영화는 한명 한명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지옥을 깨쳐나가는 이야기다. 영화에서 진수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뒤에 있는 귀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신을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그게 진수의 지옥이다. 진수만큼은 아니지만 호태에게도 후배 형사에게 갖는 지옥 같은 마음이 있다. 그런 고통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이 영화, 이 소재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운 여름 집에서 볼륨을 높이고 본다면 특이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해준 그런 면에서 어떤 관객은 우리 영화를 보고 진짜 해탈하듯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숨어 있는 잔재미들도 넷플릭스로 여러 번 보고 공유하며 관객끼리 수다 떨 수 있었으면 한다.
이성민 이 영화가 말하는 번민과 번뇌는 모두 자기 안에 있으니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빨리 깨우치시길. (웃음)
박해준 사실 문제를 알아도 행동하기 쉽지 않다. 계속 어떤 일이 생기고….
이성민 그래서 사람인 거야! 그래서 수도사들이 대단한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