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열망이 드러내는 것
2021-07-21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김기영의 악녀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20여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벽화 속의 말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부한 욕망의 기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시각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쉽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이하 <죽어도 좋은 경험>) 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원형(archetype)이라 할 수 있는 <하녀> (1960)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 물질의 화신인 남성 캐릭터의 세계로 그로테스크한 혼동의 여주인공이 침입하는 서사를 지녔다. 이른바 ‘악녀’와의 조우다. 하지만 <하녀>의 주인공이 ‘자본주의’라는 거대 유령과 싸웠던 것과 달리 이번 주인공은 처음부터 악이었거나 혹은 악의 영역으로 서서히 침범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와 다투고 있다.

연출자 김기영의 단호한 목소리

김기영의 남성주인공은 아무리 권위 있는 자라 해도 결코 정신의 영역까지 장악하지 못한다. 도리어 악몽의 무대를 휘어잡는 것은 여성쪽으로, 그녀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받드는 행태를 보이며 영화의 중심축이 된다. 이때 남성과 여성, 둘의 만남은 역동적이다. 그들이 만나자마자 고전극의 체계는 무너지며, 모두가 알고 있는 낡아빠진 법칙이 추락한다. <화녀>(1970)가 동일한 구성을 취하고 있고, 이번 영화 <죽어도 좋은 경험>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로테스크한 서사를 형성할 때 추상의 뉘앙스를 높이지만 김기영은 다르다. 그는 경계를 모호하게 흐리거나 심연을 파고들지 않는다.

요컨대 대부분의 심리적 미스터리와 정반대의 방식을 취한다. 생각해보면 김기영의 영화에서 충동은 미묘하고 낯선 영역이라고 설명된 적이 없다. 순간적 충동조차 그는 뜬금없이 단호한 직설적인 태도를 보인다. 유리에 비치면서 물방울이 튀는, 유령 같은 그림자의 상황에서도 정확하고 그의 시나리오는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병리학적이거나 물리적인 영역으로, 사건을 단호하게 이동시켜버린다. 때문에 비밀스러운 죽음은 그의 영화에 없다. 연출적으로 정확한 프레임과 단합된 이미지만이 도드라져 드러날 따름이다. <하녀>의 결말 역시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언뜻 고전적인 교란으로 보이는 외관 사이로 구조적인 관점이 침입한다. 모든 것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단호한 연출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영화가 심리적인 영역에 있다고 믿는다. 순전히 여주인공 덕택이다. 음습한 여인들이 차례로 등장해서, 혼란의 상징을 그려낸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맡을 법한 스테레오타입의 사례에 이 여성들은 남몰래 스며든다. 그리하여 비극을 종용한다. 적어도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극의 하강 속도는 그토록 가파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역할은 한마디로 ‘조작’이다. 인위적 행위를 통해 그녀들은 극의 전개를 휘어잡는다. <죽어도 좋은 경험>에는 총 세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중 두명이 처음부터 ‘악녀’의 위치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빛나는 관능미를 지녔으며, 약속이나 한 듯 스스로를 위해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타인이 가진 평화의 상태를 깨트리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길자(조주미)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낸다. 세명의 자식을 데리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소유되지 않은 한명의 남성에게 집중한다. 때문에 히스테리가 발생한다. 스스로의 불만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녀는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목표로 잡는다. 의도적인 거짓말을 종용하면서까지 파괴에 집중한다. 본인이 불행해지더라도 상관없다. 김기영의 악녀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고난의 상태에 스스로를 밀어넣으면서, 다만 그녀는 되묻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을 향해 당신의 안락함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회의하게 만든다.

길자에 이어 영화는 타인의 무지를 꾸짖는 ‘진짜 악녀’를 소개한다. 그녀의 이름은 여정(윤여정)이다. 여정은 우연히 명자(이탐미)라는 중산층 주부와 만나 이 인물에 개입한다. 사실 여정을 만나기 이전까지 명자는 평범한 아내였다. 자식이 없어서 고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막연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여정을 통해서 그녀는 변화한다. 남편의 외도 사실과 거짓말을 깨닫는다. 여정은 앞장서서 길자를 사라지게 만드는데, 이 때문에 명자는 원치 않은 행위에 동참하게 된다. 여정의 남편을 육체적으로 유혹하는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기이하고 불편한 여성의 연합, 기존의 악녀가 영입한 새로운 여성 악마의 등장은 도리어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 새로운 불안이 잉태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당연한 수순으로 여긴다. 안락함의 완전한 여지는 사라진다. 오직 폭력의 침입으로부터 시작된, 불안의 본질만이 드러날 뿐이다. 흡사 뱀에게 유혹당한 여인을 바라보는 것 같다. 만일 길자가 ‘뱀’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실낙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여정’이 될 것이다. 무지의 상태에서 평온했던 낙원의 태양은 그녀가 5년 전에 자식을 잃으면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낙원의 입구는 봉합되었으며, 다만 미궁에 빠진 인간이 점점 광기를 더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부제에 붙은 ‘천사’라는 명칭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더이상 옳고 그름을 논하는 도덕성의 잣대는 이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김기영에게 있어 현실의 무지는 다만 미천한 행동일 따름이다. 선의의 발로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세계에 종속된 모든 인간은 그가 보기에 절멸된 천사가 아니라 진짜 불행한 영혼처럼 여겨진다.

궁극의 여성 아이콘, 이브, 윤여정

영화 속 대사는 다소 직설적이다. 이 영화는 “여성의 무서운 숙명이다”라고 명자의 상태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배우 윤여정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궁극의 아이콘이다. 그녀는 새침하고 편안한 조연으로 살아가길 원치 않는 이브이며, 또한 부르주아적 세계에서 지배자가 되지 못한 천사의 운명을 항변하는 인물이다. 나쁜 숙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설정하고 움직인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이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사건에 개입하고자 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열망이야말로 <죽어도 좋은 경험>의 진짜 의도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환상을 투영하기 위해 김기영은 ‘서울’을 하데스의 공간으로 삼았다. 그렇게 ‘올림픽대교’는 지옥의 입구가 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성대하고 거추장스러운 건축물은 그리스도의 후광을 숨기게 만드는, 리얼리즘의 도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생각한다. 벽화 속 말(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폭력과 연관된 인간의 광기, 자연에서 해방된 인류의 도발, 어쩌면 ‘발전’ 혹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이 악마를 추앙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35mm필름이 기록하는 그림 속 말의 발자국은 이에 반대하고 방향을 달린다. 만일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는 누군가의 현실이 끔찍한 것이라면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태초의 평온일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기 전의 낙원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영화의 도발적인 섹스 신에 진짜 욕망은 없다. 오직 그녀의 행위는 파멸의 목적을 위해 행해진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움직임의 영역으로 투명의 침대가 발광한다. 시작의 끝을 알고도 움직인다. 이토록 서늘한 광기라니. 김기영의 영화는 세상의 미친 본질을 꿰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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