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리뷰] '피닉스' 전후 베를린을 무대로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직조한 우화
2021-07-16
글 : 김소미

지난해 극장가에 <트랜짓>과 <운디네>로 비상하게 착륙했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2014년작이 올해 국내 극장가에서 새로 개봉한다. <피닉스>는 온 얼굴에 붕대를 감고 피투성이가 된 채 독일 국경으로 입국하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아우슈비츠에서 얼굴에 총상을 맞고 생존한 유대인 가수 넬리(니나 호스)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성형수술을 받는다. 친구 레네(니나 쿤첸도르프)의 소식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었고 피아니스트인 남편 조니(로널드 제르펠트)는 아내가 수용소로 끌려간 직후 이혼을 신청하고 사라진 상태다. 끈질기게 남편을 찾아 헤매던 넬리는 결국 나이트클럽 ‘피닉스’에서 조니와 재회하는데,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비통함을 온전히 느낄 새도 없이, 조니는 ‘넬리와 닮은 넬리’에게 아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주문한다. 유산을 노리는 남편 앞에서 넬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연기하기로 결심한다.

<피닉스>는 두축의 느슨한 불안과 미스터리로 굴러간다. 첫 번째로 거짓 연극은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작동할 것인가, 적층된 오인은 이들을 어떤 결말로 이끌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두 번째는 홀로코스트 이전에 비유대인인 남편이 아내를 고발해 혼자 살아남으려 했는지에 대한 정황적 의심이다. 조니가 시키는 대로 외양을 다듬고 수용소에서의 스토리까지 재창조한 끝에, 넬리는 홀로코스트 이전의 자기 자신과 거의 유사한 상태까지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를 배신했던 조니의 혐의는 점점 짙어가지만, <피닉스>는 끝내 남편 곁에 머무는 인물의 속내를 낱낱이 설파하지 않고 심연을 지켜낸다. 넬리는 때로 남편이 몰두하는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질투마저 느낀다.

꽤나 극적인 전제를 품은 <피닉스>는 전후 베를린을 무대로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직조한 한편의 우화다. 그러므로 들여다볼 것은 멜로드라마적 정념이 다분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넬리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사랑에의 믿음, 혹은 집착의 형태일 것이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넬리를 기차역에서 맞아들이는 가짜 퍼포먼스를 계획한 조니는 넬리에게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히려 하는데, 넬리는 그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조니를 납득시키려다 말고 둘 사이의 서늘한 간극을 뒤늦게 깨닫는다.

붕괴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서 돌아온 사람. <피닉스>는 이 둘의 대화를 로맨스의 자리에서 도덕의 문제로까지 옮겨놓는다. 넬리의 얼굴이 신체의 같은 자리에서 그러나 전혀 다른 형상으로 ‘재건’되었듯, 전후 베를린에서 사람들은 전과 다른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앙겔라 샤넬레크(<아이 워즈 앳 홈, 벗>), 토마스 아슬란(<휴가>)과 함께 베를린 학파라 불리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를린장벽 붕괴를 근거지 삼아 독일인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감에 천착하는 작가다. 평범한 이들의 미시적 일상사를 리얼리즘과 장르적 터치를 뒤섞어 다루는데, <피닉스>에서는 멜로드라마의 뼈대 위로 누아르적 심상을 더했다.

페촐트 감독이 빛과 어둠의 간극 사이에 인물들을 놓아두는 방식도 주목할 요소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주인공은 주로 밤거리를 배회하거나 어둑한 지하실에 머문다. 얼굴 잃은 여자를 휘감았던 축축한 어둠은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밝은 빛으로 전환되고, 영화는 그제야 비로소 강렬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사랑한 오인의 모티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음울한 그림자를 품은 채로 독일영화의 새 지대를 개척 중인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전성기를 예고했던 작품. 평자들을 흥분하게 할 만한 영화이지만, 주제나 미학에 관한 어떠한 정보 없이 보아도 순전한 감흥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

CHECK POINT

니나 호스

파울라 베어 이전에 니나 호스가 있었다. <바바라>(2012)에 이어 <피닉스>에서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과 협업한 니나 호스는 바싹 마른 내면을 과거의 기억으로 회복해보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넬리를 연기했다. 넬리가 조니 앞에서 포로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을 남일처럼 이야기하는 어떤 장면은 인물의 이중적 위치를 복잡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니나 호스의 연기로 휘황하다.

역사 3부작

서독의 연인에게 가기 위해 동독 탈출을 시도하는 여성의 이야기 <바바라>,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 풍경과 오늘날의 난민 문제를 겹쳐둔 <트랜짓> 사이에 위치한 <피닉스>는 아우슈비츠에서 심각한 육체의 손상을 입은 여자가 전후 베를린에서 새 삶의 양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처연하게 담아내고 있다. 사랑과 정체성의 문제를 역사적 미로 위에 펼쳐내는 페촐트 영화의 묘한 아름다움은 세편 모두 선명하다.

어쩌면 최고의 엔딩

<피닉스>는 페촐트의 영화 중 강력한 엔딩으로 기억될 만하다. 독일 음악가 쿠르트 바일이 미국 재즈 신에 남긴 명곡 <Speak Low>를 오래 흥얼거리게 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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