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마와 심기일전 끝에 터져 나오는 스포츠 스타들의 포효에 잠시 감탄해도 좋은 여름이다. 운동하는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몰두와 쾌감의 기운이 우리의 일상에도 묻어난다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코로나19와 폭염이 바깥은 위험한 여름이라고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준비했다. 넷플릭스 신작과 다시 보면 좋을 구작, 한국영화 기대작 등 실내에서 영화로나마 하계 올림픽 종목의 매력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영화 4편을 소개한다.
운동하는 소녀를 막을 순 없다, <스케이터 걸>
두 명의 13살 소녀가 올해 스케이트 보딩 금·은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도쿄올림픽에서 처음 공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케이트 보드는 경기장에 펼쳐진 계단, 난간 등의 구조물 위를 누비는 '길거리' 정신 가득한 스포츠다. 헬멧 외에는 이렇다 할 보호 장비도 없이 경기장에 나선 선수들에게서 단단히 쌓인 내공만큼이나 돋보이는 것은 자유로움이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등장한 이들은 보드의 스피드에 몸을 실은 뒤 가볍게 날아오른다. 맨몸으로 땅에 추락해도 자기만의 낙법으로 다시 꿋꿋이 일어나는 폼생폼사 기질도 고유한 스포츠 정신의 일부다. 얼마 전 여자 스트리트 결선에서 13세 일본 선수 니시야 모미지, 또 다른 13세 브라질 선수 레알 하이사가 보여준 자유분방한 몸짓을 보며 마음이 동한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케이터 걸>(2021)이다.
인도 라자스탄 지역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소녀 프레르나(레이철 산치타 굽타)가 여행자 제시카(에이미 마게라)를 통해 스케이트 보드의 세계에 입문한다. 마땅한 놀 거리가 없는 동네에서 바퀴 달린 나무판자에 남동생을 태워주는 것이 구현 가능한 스케이트 보딩의 전부였던 프레르나의 삶에 자기만의 스포츠가 생긴 것이다. 교복과 교과서가 없어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10대 소녀는 그렇게 뜻밖의 계기로 자유를 꿈꾼다.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현실의 그림자가 프레르나를 재촉하지만, 전국 스케이트보드 선수권 대회에 참가를 희망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훨씬 더 모험적인 기회들이 허락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보드 타는 10대 스토리가 가진 청량한 기운과 인도에서 여성이 처하는 불평등과 억압에 관한 사회문제를 적절히 결합한 드라마다.
물속의 위로,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누군가는 물속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 속에서 작은 안식을 얻길 원한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의 남자들도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수영장으로 간다. 이들은 박태환 선수에 이어 한국 수영의 미래임을 입증한 황선우 선수가 도쿄올림픽에서 시원하게 물살을 가를 때 받던 환호와는 한참 거리가 먼 남자들이다. 오랜 백수 생활과 우울, 그리고 무기력에 시달리던 주인공 베르트랑(마티유 아말릭)은 어느 날 딸이 다니는 수영장에서 남자 수중 발레단 모집 전단을 보게 된다. 파산 직전인 수영장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장님 마퀴스(브누아 포엘부르드), 쉼 없이 신곡을 내는 발매왕이지만 성적은 늘 초라한 로커 시몽(장 위그 앙글라드), 젠체하길 좋아하지만 내면은 외로운 로랑(기욤 카네) 등이 합류하면서 뜻밖에도 작은 수중발레팀이 꾸려진다. 그렇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포스터와 제목만 보면 레인을 따라 뻗어 나가는 수영선수의 에너제틱한 스토리를 떠올리게 되지만, 실상은 발레하는 남자들에 가깝다. 하계올림픽 종목으로 치면 아티스틱 스위밍(싱크로나이즈 스위밍) 쪽인 셈.
남성의 세계에서는 마이너로 취급받는 스포츠에 뛰어든 남자들은 수영장에서 현실의 실패를 딛고 각자의 심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도 모색한다. 이 유쾌한 코미디를 보고 있으면 자유형이든 싱크로나이즈든 일단 수영장 물속에 몸을 던지고 싶어진다. 숨을 참고 팔다리를 열심히 휘젓거나 부력에 몸을 가만히 내맡기거나, 어느 쪽이어도 그저 좋겠다. <세라비, 이것이 인생!>(2017)을 만든 질 를르슈 감독이 좌절한 남자들, 아니 물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로.
배두나와 하지원의 극강 케미, <코리아>
한국 여자탁구의 막내 신유빈 선수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방호복을 입고 출국하는 모습이 한 번,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마시멜로 구워 먹자고 부모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두 번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5살 때 이미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했고, 만 14세에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신유빈은 이기든 지든 경기가 “재밌었다”고 자주 말하는 선수다. 올해 도쿄올림픽에서 신유빈이 만들어낸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단연 룩셈부르크의 베테랑 니샤렌과의 호쾌한 역전승. “더 많은 사람들이 탁구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신동 신유빈의 바람은 “계속 도전하고 즐기는 것도 잊지 말자“고 멋진 소감을 남긴 니샤렌의 미소와 함께 탁구코트 앞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신유빈의 쾌거가 산뜻하게 반짝이는 스토리라면, 영화 <코리아>가 담아낸 것은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1991년에 남북 단일팀이 구성된 질곡의 역사다. 1991년, 한국의 현정화 선수와 북한의 리분희 선수가 만나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함께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두 선수는 당시 여자단체전 9연패를 노리던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거머쥐는 쾌거를 안았다. 전설적인 탁구 여제를 연기한 <코리아>의 주연 배우들은 당시의 활약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현정화 선수와 대한민국 탁구 국가대표팀에게 6개월 가량 밀착 코치를 받았다. <코리아>는 만남과 석별의 정, 분단의 드라마에 방점을 찍어 스포츠 영화로서의 묘미는 약한 편이지만, 배두나(리분희), 그리고 하지원(현정화)의 세심하게 조율된 앙상블만큼은 흠잡을 데 없다. <미나리>의 스타, 한예리의 개성 넘치는 신인 시절을 보는 묘미도 <코리아>를 지금 다시 보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드디어 배구 영화가 나온다, <1승>
한국 여자 배구를 다룬 영화가 지금껏 없었다는 게 의아할 정도다. <동주>의 각본을 쓰고, <러시안 소설> <배우는 배우다> 등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의 신작 <1승>은 그 목마름이 더 커지기 전에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떻게든 1승을 해야 하는 여자 배구단 핑크스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아마추어 배구 감독 김우진(송강호)가 뛰어드는 이야기로, 신연식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스포츠영화 서사와 중계방송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배구 시합 장면을 선보일 것”이라고 포부를 전했다. 배구는 스포츠 영화에서도 드문 소재이고 그동안은 코미디의 서브 장르로 소화된 경우가 많다. 까다로운 기술 습득이 요구되는 것과 달리 경기의 이미지만큼은 단순하고 명료해서 장면 연출도 쉽지 않다. “그동안 배구영화가 나오지 않은 이유가 다 있구나 싶었다”는 신연식 감독은 “이제는 배구 시합의 역동감과 스펙터클을 기술저긍로 구현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작품 준비를 시작했다. (<씨네21> 1289호 특집, 2021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김성훈 기자)
해체 직전의 여자배구단 핑크스톰에 구세주로 등장한 배구 코치 송강호 외에도 장윤주, 이민지 등이 출연하며 박정민은 재벌2세 출신의 구단주를 연기한다. 국가 대표 배구 선수들이 직접 나서 자문을 도왔으며 촬영 전부터 전문적으로 기술을 익힌 배우들 중 일부는 이미 수준급 실력을 자랑한다는 후문도 들려온다. TV 중계 화면이 포착하지 못했던 절호의 순간을, <1승>은 극대화할 수 있을까. 배구계를 넘어 지금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 스타인 김연경 선수 특유의 강스파이크가 <1승>에선 어떤 배우의 몫일지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