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
2021-08-11
글 : 김성찬 (영화평론가)
심화하는 자폐의 세계
<로우>

단 두 번째 장편영화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일을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6년 첫 번째 장편 <로우>로 관객에게 자기 이름만큼은 확연히 각인시켰을 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의 얘기다. 현재까지 언론을 통해 얼마간 알려진 수상작 <티탄>에 관한 정보는 어린 시절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가 괴기한 욕망에 따른 기행을 벌이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는 뱅상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는 것 정도다.

이 짤막한 정보만으로도 <티탄>에서는 뒤쿠르노의 전작과 같이 신체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변형, 훼손, 성 집착, 피칠갑의 향연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주인공이 자동차와 성적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며 휘발유로 수유한다는 SF 장르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함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판단되면서도, 전작 <로우>를 성장통에 관한 우화로 본 시선을 호기롭게 무력화는 데서 오는 통쾌함도 느낀다.

성장이 아닌 확장

약 10년에 걸쳐 이어진 감독의 행보를 성장의 개념으로 보는 건 무리일 것이다. 이건 비단 영화 바깥의 시선뿐 아니라 영화 내에도 적용될 사안이다. 뒤쿠르노 영화의 경향은 성장보다 점증이나 확장에 가깝다. 2011년에 나온 뒤쿠르노의 21분짜리 단편 <주니어>와 <로우> 둘을 놓고 볼 때 <주니어>는 <로우>를 잉태한 형국이거나 프리퀄로 볼 여지가 있다. <주니어>에서 또래 남성들의 모습과 구별하기 힘들었던 쥐스턴이 고통스러운 신체 변형을 거치고서 평소 흠모하던 언니처럼 성숙한 여성의 모습에 가까워진다는 이야기가, <로우>에서 쥐스턴이 이미 식인 습성을 깨우친 언니 알레시아의 뒤를 따르게 된다는 서사와 포개진다는 점에서 그렇고, 아주 가까이서 신체의 변화를 주시하거나 변화에 따른 고통을 전시하는 모티브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주니어>가 작은 반지름을 지닌 영화라면 <로우>는 거기서 반지름의 길이를 늘려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주니어>에서 신체 변형이 2차 성징을 은유한다고 짐짓 인정한다 하더라도 같은 설정이 <로우>에서 즉각 성장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감독은 더 커진 판에서 기존에 더하여 성관계, 식인, 살해와 같은 표현의 제재들을 맘껏 풀어놓는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

확장은 영화 내외부에서 실제 배우와 극중 인물이 얽히고설켜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타당한 판단이다. <주니어>의 주인공 배우 가랑스 마릴리에는 <로우>에서도 주인공을 맡았고 <티탄>에도 등장하는데, 세 영화 모두에서 극중 이름은 쥐스턴이다. 또 <로우>에서 쥐스턴 언니의 이름 알레시아는 <티탄>의 주인공 이름이 되기도 하는데, 쥐스턴의 게이 친구의 이름인 아드리앙은 <티탄>에서 알레시아가 남성으로 가장할 때 쓰는 이름이기도 하다. 감독이 동일한 배우를 재차 등장시키고 등장인물의 이름을 섞어서 재활용하는 일을 게으르거나 작명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본다면 우습다. 그는 애초 주어진 배우와, 사드 후작의 소설 속 인물인 쥐스턴에서 따온 것을 포함한 인물의 이름들과, 그 사이의 맥락들을 도구 삼아 신체와 성, 피칠갑 폭력의 테마를 자기 식대로 확장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여기서 명백히 쿠엔틴 타란티노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향을 받은 신체 학대, 훼손, 변형, 또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과 역설적 환희를 관음하는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는 건 유의미하지 않은 데다 진부하다. 그에게는 이러한 요소를 어떻게 배열하거나 쌓아서 전시할지가 더 긴요한 문제이며, 이로써 영화라는 놀이터의 영역을 얼마나 더 확장시킬 수 있을지 골몰한다고 여기는 것이 더 나은 접근일 테다. 그의 영화에서 혐오와 거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이 많음에도 감각적인 음악을 바탕으로 시종 경쾌한 리듬감이 유실되지 않는 점을 볼 때 감독이 호러와 스릴러의 요소들을 대하는 태도가 흥분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성, 조력자 혹은 조련사

<로우>

이 흥분은 뒤쿠르노의 영화가 내면에 침착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주인공의 주관적 시점으로 완벽히 통제돼 있다. 외부를 배제한다기보다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는 대체로 주인공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방향을 바꿔 주인공의 얼굴만을 잡아낸다. 주인공의 관점 없이 주변인이나 제3자를 따로 떼어놓고 할애하는 장면은 좀처럼 없으며, 그러한 장면에서도 다른 인물들은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서만, 아니면 어떻게든 주인공과 관계된 상태에서만 카메라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영화 바깥에서 볼 때 <주니어> <로우> <티탄>의 포스터가 모두 주인공의 얼굴을 가깝게 포착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자기애라기보다 자폐에 해당한다. 내면의 활동이 활발한 사람은 굳이 외부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또 뒤쿠르노의 경우 내면의 활동은 유독 신체에 구속돼 있다. 다만 이처럼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세계에서 주인공 곁에 동행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확장의 길목에는 남성인 조력자가 있다. <주니어>에서 쥐스턴의 가장 친한 친구인 카림은 쥐스턴의 변화를 환영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로우>에서 쥐스턴의 수의과대학 동기 아드리앙은 쥐스턴 곁에서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은 쥐스턴을 억누르기도 한다. 특히 쥐스턴의 첫 성적 대상이 되는 아드리앙과 쥐스턴의 동행은 쥐스턴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투영돼 있다고 할 만한데, 아드리앙이 알레시아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면 쥐스턴의 식인 습성을 조절하는 훌륭한 조련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뒤쿠르노의 영화 속 남성의 위치는 모호하다.

<로우>에는 쥐스턴과 알레시아가 서로를 물어뜯어가며 싸우는 대목이 있다. 이때 주변 친구들은 긴 끈으로 그들의 목을 낚아채 갈라놓는다. 떨어져 발버둥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목줄에 묶인 개의 형상이다. 즉 짐승에 다름 아닌데, 그들을 자제시키기 위해선 달래거나 강압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이 임무를 <주니어>에서 카림이, <로우>에서 아드리앙이 맡는다. 다양한 해석 중 페미니즘 관점으로 한정해 말해보자면, 뒤쿠르노 영화에서 여성이 주체성을 확립해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그간의 여성 억압에서 해방하는 전복적 양태가 되며, 여기서 남성의 역할은 조력자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들을 짐승과 등치시킨다면 남성에 의한 단련과 조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한계로 간주될 우려도 있다. 이와 같은 남성 지위의 불확정적인 면은 굳이 젠더 이슈가 아닌 다른 틀로 보더라도 동일한 것 같다. 요컨대 남성은 뒤쿠르노의 영화가 내면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자기만족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명확히 재정의해야 할 대상으로 남겨져 형상화돼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폐쇄된 내면의 세계를 무참한 광경으로 수놓는 뒤쿠르노는 한명의 남성 조력자 또는 조련사와의 동행을 원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뒤쿠르노 영화의 전경이다.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감독이 마련한 핏빛의 자폐적 세계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또 이번에는 <티탄>이라는 더욱 심화한 자폐적 공간에서 분명 예기치 못한 광경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티탄>에서 감독이 이제껏 동행해왔던 남성을 어떻게 다룰지 목격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직 단정하기 섣부른 뒤쿠르노 세계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하는 데 긴요한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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