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천만 배우’ 황정민의 대표작들과 그 유명한 ‘밥상’ 수상 소감 영상이 스크린에 등장한다. 이곳은 그의 신작 <냉혈한>의 제작발표회 현장이다.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뒤풀이까지 마친 정민(황정민)은 매니저의 에스코트를 물린 채 홀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동네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세명의 청년을 마주친다. 정민은 다짜고짜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문제는 그들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한 납치사건의 범인들이라는 것이다.
리더 기완(김재범)의 주도로 숲속 외딴집에 정민을 비롯한 인질을 가둔 그들은 정민에게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다. 정민은 아직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진짜인지 아니면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의 ‘몰래 카메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그런 그에게 한 인질범이 얼굴에 펀치를 날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거 진짜야.”
<인질>은 황정민이 ‘진짜’ 황정민을 연기한다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발적인 설정이 눈에 띄는 영화다. 유명 배우가 납치됐다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는 이로 인해 개성을 얻는다. 영화 중간중간 현실의 관객이 모두 알고 있는 유명 영화의 제목들과 유행어가 등장할 때 느끼는 묘한 쾌감이 있으며, 더하여 <신세계>에서 황정민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했던 배우 박성웅의 특별 출연 또한 소소한 재미 포인트다.
장르영화로서도 <인질>은 나름의 만족감을 제공한다. 우선 각 캐릭터들간 수싸움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사회 부적응자로 묘사되는 인질범의 리더는, 유명인을 인질 삼아 몸값 장사를 한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을 충분히 실현시킬 만큼 지능적이며, 이를 추격하는 경찰 또한 범인에 밀리지 않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현장에 묶여 있는 정민 역시 유효한 반격을 날린다. 황정민 배우는 인터뷰에서 “실제 황정민이었다면 조금 더 싸움을 잘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영화에서 액션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지능적인 면모다. 정민은 자신의 장기인 연기를 통해 범인들을 방심하게 한 다음 탈출을 시도하는, 말하자면 ‘황정민이 황정민하는’ 방식으로 극의 ‘공수 밸런스’를 맞춘다.
신인 필감성 감독이 특히 공을 들인 부분은 황정민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의 구성이다. 필 감독은 리얼리티를 더하기 위해 영화에 많이 출연하지 않은 새로운 얼굴 위주로 캐스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낯설지만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탄생했으며, 그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 또한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다. 인질범 리더 기완 역을 맡은 김재범 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조직의 일원 동훈 역을 맡은 류경수 배우와 샛별 역을 맡은 이호정 배우 또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최근 개봉한 <어른들은 몰라요>에서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던 이유미 배우는, 이번 영화에선 반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반소연 역을 맡았다.
그러나 <인질>은 한계도 명확하다. 분명 탄탄한 주조연들의 연기와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액션이 94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말하자면 <인질>이라는 ‘밥상’엔 먹을 것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배우가 본인을 연기한다는 ‘메인 요리’를 제외하고 나면 그리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배우 황정민의 유명한 대사들, ‘부라더’나 ‘드루와’ 같은 것들은 영화에 그저 등장만 할 뿐, <인질>의 고유한 세계와 잘 버무려지지 않는 느낌이다. 현실의 황정민이 아니었어도 성립할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것은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이겠지만, 그럼에도 한 배우가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큼은 귀한 경험이다.
CHECK POINT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
연기에 난이도를 매기기는 어렵겠지만, 연기자가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 가상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보다 쉽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황정민 배우는 황정민을 연기한 소감으로 “차라리 가상인물이었다면 감정을 만들어냈을 텐데 실제 황정민이니까 이 감정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단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는 말을 남겼다.
<인질>의 조연들
1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인질>에 합류한 조연들의 이름이 생소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이미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김재범은 18년차 베테랑 연극배우이며, 류경수는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활약한 바 있다. 모델 출신 이호정은 2017년 <씨네21>이 주목했던 라이징 스타 중 한명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영화들
배우가 자기 자신을 연기한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인표>와 <여배우는 오늘도>에서는 차인표와 문소리가 각자 자신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상상의 영역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여배우들>에서는 무려 6명의 배우가 동시에 스스로를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