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서 언급한 원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번역서 <가윈 경과 녹색기사>(이동일 옮김)를 참고했다. 원작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데, 원작을 참고하는 것이 영화 속에 나온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상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결코 살해될 수 없는
아서왕(숀 해리스)과 원탁의 기사들이 모여 크리스마스 향연을 벌이던 날, 낯선 외양의 말 탄 기사가 성문 안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나무 형상의 기사는 다음 크리스마스 무렵 녹색 예배당에서 자신의 일격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일격을 가할 용기 있는 자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 제안을 왕의 조카인 가웨인이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린 나이트>는 러닝타임 대부분을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가웨인(데브 파텔)의 여정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영화의 본질 역시 이 무모한 여정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견 온당해 보인다. 그러나 가웨인의 여정을 추동하는 힘은 어디까지나 미지의 기사(랠프 아이네슨)가 등장하는 순간에 붙들리며, 가웨인의 삶은 녹색 기사가 내기를 걸던 순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에 기반을 둔 영화를 말할 때 원작을 참고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는 않지만, <그린 나이트>의 경우 원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상징과 의미망에 지나치게 힘을 빼지 않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녹색 허리끈의 의미와 성주 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유혹, 성주(조엘 에저턴)와의 키스 같은 것들은 원작에 뿌리를 둔 것으로 굳이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반면 ‘녹색 기사는 왜 자신의 목이 베이는 게임을 제안했을까’라는 물음은 원작에 기반한 영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더라도 던져야 할 근원적인 질문이다. 원작에서 녹색 기사는 초월적인 존재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려진다. 마치 정언명령처럼 원래 그러하기로 되어 있는 전제이므로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녹색 기사의 행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는 녹색 기사의 외양을 통해 예고된다. 녹색 빛의 아우라가 온몸을 휘감은 투구 쓴 초월자의 형상을 한 원작의 묘사와는 달리 영화 속 녹색 기사는 갈색의 나무 형상에 갇힌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를 표현하던 방식을 떠올리면 된다. 데이비드 로어리는 전작 <고스트 스토리>(2017)에서도 유령의 형상을 바닥에 끌릴 정도의 흰 천을 뒤집어쓴 두개의 눈구멍으로 표현한 바 있으니 그다운 표현법이라 하겠다. 온통 갈색인 그가 여전히 ‘녹색’ 기사일 수 있다면 그의 도끼가 놓인 자리에 녹색 이끼가 피었다는 것 정도다. 데이비드 로어리는 녹색 기사의 의미가 무엇보다 ‘자연’에 있음을 그의 외양을 통해 확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유령이 된 C(케이시 애플렉)의 집을 파괴하던 포클레인의 폭력적인 출현을 염두에 둔다면, 문명과 개발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관점의 연속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나무 기사가 ‘자연’을 표현한다면 그가 (가웨인을 통해) 자신의 목을 베는 것은 인간의 산림에 대한 약탈 행위를 반영한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녹색 기사는 일종의 자학적 예술가다. 일격을 받아야 하는 가웨인의 운명은 기사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통이 아니라 식물 되기라는 역지사지의 수행이다. 물론 식물 되기는 인간에게 곧 죽음을 의미한다. 나무는 목이 잘린 뒤에도 여전히 나무로서 생을 이어가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애초에 진정한 교환은 불가능한 게임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해석이 가능한 설정을 동시에 진행한다. 크리스마스 게임은 녹색 기사가 아닌 가웨인의 어머니(사리타 슈드후리)에 의해 촉발된 내기라는 것이다. 녹색 기사의 등장 장면은 아서왕의 이복동생이자, 가웨인의 어머니가 꾸민 계략의 일종처럼 보인다.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아서왕의 이복동생이자 주술사인 가웨인의 어머니가 편지를 봉해 태우는 장면과 녹색 기사의 편지를 연결한다. 편지의 목소리는 여왕(케이트 디키)에 빙의된 형태로 제안의 기원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이 마녀의 간계에 의한 내기였다는 사실이 결말까지 뚜렷한 작용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설정을 납득시킬 근거 역시 희박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설정이 마지막 순간 녹색 기사가 지닌 위엄과 힘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원작에서 서로 다른 인물인 가웨인의 어머니와 모건 르 페이를 동일한 인물로 설정한 것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정을 촉발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웨인의 여정은 그의 기원이라고 할 ‘집’에서 탄생한 것으로 그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녹색 기사가 등장한 건 아서왕이 가웨인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제안했고, 가웨인이 아뢸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밝힌 직후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녹색 기사는 이야기의 곤경이 불러온 구원자처럼 보인다. 영웅 없이 떨어져나온 이야기는 영웅을 필요로 하고, 영웅이 아닌 자는 존재하는 이야기에 어떻게든 자신을 꿰맞춰야 한다. 여정의 성격이 원작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중요한데, 본래 지니지 않았던 물건을 하나하나 습득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가웨인은 도끼도 허리띠도 이미 지닌 채다. 약탈꾼의 습격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기는 상황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결핍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한번도 잃은 적이 없던 것을 잃기 위해서 떠나야 했으며, 되찾기 위해 잃어버려야 했다. 가웨인의 여정은 기사라는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는 게임이거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는 성장담만은 아니다.
두개골의 웃음
여정에는 죽음, 아니 주검이 놓여 있다. 그의 여정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선명해서 더 지적할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는 죽음의 표현으로 그가 마주하게 되는 두개골이다. 가웨인이 약탈꾼들에 의해 손발이 묶인 채 나무 귀퉁이에 옆으로 누운 채 홀로 남겨졌을 때,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360도 패닝숏이 등장한다. 카메라가 제자리에 돌아왔을 때 가웨인은 묶인 상태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백골이 된다. 이 패닝숏은 가웨인과 녹색 기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을에서 상연되던 작은 인형극의 구성과 통하는 지점이 있다. 계절의 변화가 그려진 360도로 회전하는 배경판은 패닝의 2D적 변환이다. 녹색 기사가 가웨인에 의해 목이 잘린 뒤 회전판이 돌면, 다음에는 가웨인이 녹색 기사에 의해 목이 잘린다.
인형극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영화는 마치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지우듯 패닝숏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원래의 모습을 회복한 가웨인이 어떻게든 포박한 줄을 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웨인의 시점을 보여주는 숏을 바탕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가웨인의 머릿속 비전이라 단언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영화가 안내하는 최종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위니프레드(에린 켈리먼)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직 두개골이다.
위니프레드는 가웨인이 여정에서 만난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물속에 빠졌으니 머리를 찾아달라고 말한다. 이에 가웨인은 물에 몸을 던져 땅속에 박힌 위니프레드의 두개골을 건져 올린다. 그 순간 위니프레드는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난다. 두개골을 손에 쥔 가웨인이 위니프레드를 찾아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의 손 안에서 두개골은 위니프레드의 잘린 머리의 형상으로 변한다. 잘린 채 바닥에 뒹구는 머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을 한다. 가웨인은 침대에 놓인 머리 없는 시신 위에 두개골을 놓아둔다. 그렇게 잘린 몸은 자신의 머리를 찾는다.
두개골이 위니프레드의 말하는 얼굴로 둔갑하는 장면은 녹색 기사의 머리가 잘리던 순간으로 다시 우리를 데려간다. 녹색 기사가 처음 등장하던 장면에서 그는 서신을 건넸을 뿐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가웨인이 용기 있게 나선 것을 보고도 말없이 도끼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목을 베라는 듯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가웨인에 의해 목이 베이고 나서야 녹색 기사는 비로소 말한다. 목이 잘린 몸통이 바닥에 나뒹굴던 자신의 머리를 건져 올리자 눈을 뜬 머리가 가웨인에게 약속을 주지시키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진다. 이전까지 말을 하지 않던 기사가 목이 잘린 뒤에야 말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녹색 기사의 상징성에 주목해보면, 그는 단지 자연을 은유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잃어버린 내몰린 자들의 상황을 은유하는 데가 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까지 내몰렸을 때,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이들의 외침 말이다. 그가 죽은 뒤에는 그를 기억하는 자들이 그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말하는 머리라는 마술적인 이미지는, 때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잘린 머리에 의해 촉발된 여정의 다른 이름은 잘린 머리가 자신의 몸을 찾는 (혹은 그 반대인) 모험이다. 위니프레드에게 있어 복원은 (비록 환영일지라도)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골을 찾아 백골이 된 현재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인족은 위니프레드와 상반된 지점에서 두개골을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다. 거인족은 영화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이미지인데,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기보다 오직 여정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시각적인 체험을 위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CG에 의해 탄생한 것이 분명해 보이며, 그렇기에 CG 그 자체를 생각하게 만든다. 가웨인과 동행하는 여우를 묘사하는 데도 CG가 사용되긴 했으나, 여우는 가웨인의 망토와 맞춘 듯한 털의 빛깔을 보호색 삼아 실사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반면 거인족은 영화 속 세계를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안갯속에 휩싸인 듯 흐릿한 형체로 표현된 이들은 미래의 인간이며, CG 기술이 발달한 이후의 시간성을 형상화한다. 가웨인과 거인족의 마주침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불가능한 만남처럼 보인다. 하나의 그래픽 이미지인 거인족의 머리 안에는 결코 단단한 두개골이 자리하고 있진 않을 것 같다. 이들에게 머리가 잘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의 머리는 잘린 채로 부패하지도 않으며 간단하게 잘라냈다가 흔적 없이 붙일 수 있다. 나무 기사의 복원된 머리가 의미하는 것은 식물의 생명력과 복원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현혹하는 이미지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야기 되기의 여정은 곧 식물 되기의 여정이며 한편으로 이미지 되기의 여정인 것이다.
환상을 지속하기 위하여
영화에서 가웨인의 머리는 여러 번 잘린다. 이것이 가웨인의 환상이라면 그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자학적인 상상을 계속하면서 실제 그의 머리가 잘릴 순간에 대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웨인의 초상화 역시 머리가 잘리는 순간을 위한 예비 행위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가웨인의 초상화가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녹색 기사를 만나러 여정을 떠나기 이전이고, 다음은 여정 도중 만난 성주의 부인이 그에게 자신이 직접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제안하면서다. 특히 후자의 초상화는 상하가 반전된 거꾸로 맺힌 상으로 등장하는데, 초기 사진인 옵스큐라 방식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가웨인의 머리 부분만이 또렷이 반사되는 장면은 이 여정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관련해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가 있다. 거인족과 만난 직후 산길을 걷는 가웨인과 여우의 뒷모습을 따르던 카메라가 이들을 앞지르더니 상하로 180도로 회전해, 뒤집힌 광경을 보여준다. 이 시퀀스가 마무리될 즈음 번쩍하는 섬광이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플래시를 터뜨려 허공에 사진을 찍은 것처럼 느껴진다. 미래의 인간처럼 보이는 거인족을 마주한 직후이니 이것이 다른 시간대에서 온 행위라는 전제하에 사진을 찍는 행위라는 가설을 밀어붙여본다면 과연 사진에 담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미지 되기의 여정으로 <그린 나이트>를 읽는 행위는 그림으로서의 영화, 즉 애니메이션, 그래픽으로서의 영화에 관한 생각에 필연적으로 가닿는다.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면서 영화를 애니메이션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린 나이트>는 어쩌면 로어리가 <피터와 드래곤>(2016) 이후에도 줄곧 실사와 CGI를 결합하는 방식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그가 현재 후반작업 중인 영화는 디즈니의 실사영화 <피터팬과 웬디>다).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피터와 드래곤>은 용을 제외하고 실제 배우들이 연기했다. <죠스> <E.T.> 같은 스필버그의 70, 80년대 영화와 유사하나, 스필버그의 영화들에서 크리처의 사실성이 강조되었던 것과 달리, <피터와 드래곤>은 ‘용’이 그래픽 이미지라는 사실은 숨길 수도 없고, 영화도 이를 감추지 않는다.
대신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실사의 충돌을 한계가 아닌 강점으로 가져간다. 거대한 녹색 용 엘리엇이 그가 기거하는 숲에서 보호색을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지 않게 숨기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실제 존재성을 은유한다. 엘리엇은 실사의 세계에 날아든 불청객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지만, 그와 함께 자란 피터에게 엘리엇의 존재는 ‘리얼’하다. 그림이 ‘상상’과 ‘진짜’라는 양자택일의 대립 속에 묶이지 않음을 캐릭터의 생명력을 통해 보여준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로어리는 유령이 된 인간을 표현하는 데 있어 CG를 통해 인체를 투명하게 바꾸거나 후광을 만드는 대신 실제 배우에게 흰 보자기를 씌워버린다. <피터와 드래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했던 것과는 반대로 <고스트 스토리>에서 배우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모른 척해야만 한다. 관객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배우들에게는 보이지 않음을 믿어야 한다.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경계에 도전한다.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실사와 이미지의 세계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혼합된다. 왕관을 쓴 가웨인의 목이 분리되어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디까지가 배우 데브 파텔이었고, 어디서부터 배우의 모습을 한 이미지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의자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불타는 오프닝 시퀀스 역시 어디까지가 배우이고, 어디까지가 배우를 본뜬 더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거꾸로 회전한 숏과 반짝이는 섬광을 자신이 탄생시킨 세계의 뼈대를 감지하기 위한 영화의 엑스레이 촬영이었다고 가정해보자. CG로 점철된 판타지 세계 이미지를 투과하면 그 속에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뼈와 살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실재의 자리에 놓일 만한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만 베어지는 머리의 이미지는 레토릭이 된 영화의 죽음과 그 이후에도 지속하는 욕망의 흔적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