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이 달라지고 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 스튜디오가 만드는 첫 번째 아시안 슈퍼히어로의 단독 주연작이다. 아시안 히어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이름을 제목에 내건 단독 주연작은 없었다. 단지 슈퍼히어로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전체로 시선을 넓혀도 상당히 드문 시도다.
심지어 먼저 개봉한 <블랙 위도우>와 함께 샹치가 MCU의 새로운 시대, 즉 페이즈4 이후 어떤 활약을 펼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그 의미는 꽤나 확장될 것 같다.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기 전의 예측에 불과하다. 과연 마블은 아시안 히어로 영화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공개된 예고편과 원작 코믹스의 정보를 바탕으로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는 어떤 비전을 펼쳐 보일지 예측해봤다. 국내에서 곧 출간될 그래픽노블에 대한 소식도 전한다.
KEYWORD 1. 세계 최강 범죄자의 아들
샹치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의 아버지가 지닌 비밀부터 캐야 한다. 이번 영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마블 코믹스의 오랜 역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아시안 캐릭터는 악당이었다. 1970년대, 마블 코믹스는 쿵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커지자 이를 활용한 캐릭터를 만들고자 했다. 마블은 영국 소설가 색스 로머가 쓴 <푸만추의 비밀>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아시안 악당인 ‘푸만추’의 만화화 판권을 구매한 뒤, 그를 새로운 악당 캐릭터로 등장시키면서 그의 대척점에 선 아들 샹치도 함께 만들었다. 178cm, 79kg의 옹골찬 외형의 샹치는 사실상 이소룡의 비주얼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해 만들었으며 1973년 12월, ‘스페셜 마블 에디션’의 15번째 이슈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등장하는 편에서는 대개 ‘쿵후 마스터’, ‘야만적인 주먹’, ‘죽음의 손’ 같은 부제가 달렸다.
샹치와 그의 아버지는 과거 서양인들의 눈에 포착된 아시아 문화의 흥미로운 요소를 뒤섞어 만든 캐릭터였다. 코믹스 상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연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능범죄자 푸만추의 아들로 태어난 샹치는 푸만추의 은신처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유년 시절을 보낸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저지르는 범죄를 모르고 자랐지만, 아버지는 그가 19살이 되던 해에 암살 지령을 내린다. 아버지의 적이라면 분명 악당일 거라 생각했던 샹치는 진실을 알게 되자 배신감에 사로잡혀 아버지를 살해할 결심을 한다.
또 그는 아버지가 선악 구분을 못하는 샹치의 복제인간 무빙 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후 샹치는 아버지와 무빙 섀도를 모두 물리치고 ‘히어로즈 포 하이어’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 원작의 설정이다. 공개된 예고편상에서의 부자 관계 역시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샹치의 여정이 이번 영화의 주요 테마다. 물론 원작 코믹스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블 스튜디오의 사장 케빈 파이기는 이번 영화가 “자신의 아버지가 세계 최고의 범죄자라는 걸 깨닫게 되는 한 청년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KEYWORD 2. 텐 링즈
원작 코믹스와 영화의 다른 점 중 가장 중요한 각색 포인트가 바로 ‘텐 링즈’라는 조직의 묘사다. 양조위가 연기하는 웬우가 샹치의 아버지인데 그는 텐 링즈라는 비밀 조직의 수장으로 알려져 있다. 케빈 파이기가 직접 밝힌 내용으로, 텐 링즈라는 조직은 <아이언맨3>에 등장했던 테러 조직과 동일하며 웬우야말로 진짜 만다린이라는 사실이 이번 영화에서 드러난다. <아이언맨3>에서 만다린을 자처했던 인물은 트레버 슬래터리(벤 킹즐리)라는 고용된 배우였음은 이미 드러난 사실. MCU에서 텐 링즈는 테러에 준하는 행위를 일삼아왔으며 MCU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를 납치한 조직도 텐 링즈였다는 사실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개봉 전에 밝혀지면서 마블 스튜디오가 이미 그려놓은 거대한 비밀 지도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번 영화에서는 그들의 과거 행적까지도 모두 드러날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히어로와 새로운 악당의 등장. 이것이 페이즈4를 여는 마블의 자세가 아닐까. 이번 영화에서는 샹치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텐 링즈의 본거지로 어떻게 다시 흘러들어가게 되는지, 웬우는 샹치를 왜 다시 불러들이게 되는지 등의 사연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과연 텐 링즈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아버지 웬우의 양팔에 끼워진 10개의 링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 그가 어떻게 이 링을 손에 넣었는지 등도 이번 영화에서 낱낱이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KEYWORD 3. 펜던트에 얽힌 사연
MCU의 많은 히어로 캐릭터는 복잡한 가족사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갖고 산다. 대표적으로 토르와 스타로드를 꼽을 수 있다. 블랙팬서는 물론이고, 토니 스타크의 가족사는 원터솔저인 버키 반즈와도 연관이 있다. 아버지와 대척점에 서게 될 샹치 역시 이들 못지않은 가족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샹치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케이티(아콰피나)와 아버지 웬우 외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예고편에도 등장하는 샹치의 동생인 샤링(장멍)은 샹치와 같은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흔히 이런 아이템은 이야기 전개상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된다. 알려진 줄거리에 따르면 한 무리의 자객단이 나타나 샹치의 펜던트를 훔치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잉난(양자경)은 샹치에게 엄마인 지앙리(팔레 첸)와의 추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것 같고, 그의 거처는 샹치가 현재 발레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미지의 어딘가일 것이다. 아시아 최고의 액션배우이기도 한 양자경과 양조위의 맞대결을 기대하는 관객도 많을 텐데, 그런 장면이 나오기만 한다면 세기의 대결이 될 것 같다.
KEYWORD 4. 그레이트 프로텍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아시안 히어로를 내세우고 특히 중국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와 공간을 창조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로 전설적인 존재 ‘용’이다. 원작 코믹스에도 용은 종종 등장했다.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이미 만들어진 바 있는 <아이언 피스트>의 주인공 아이언 피스트(핀 존스)에게 힘을 불어넣은 존재가 ‘샤오라오’라는 용이었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용이 샤오라오와 연관성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개봉 전에 출시된 레고 제품의 설명에서 용의 이름이 그레이트 프로텍터라 불리는 ‘핀 팽 품’임이 밝혀졌다(뒤이어 소개할 그래픽노블에도 등장한다).
핀 팽 품은 텐 링즈의 본거지, 혹은 샹치의 엄마 지앙리와 잉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크리처로 텐 링즈가 지닌 마법과도 같은 능력, 샹치가 깨닫게 될 자신의 기원과 관련을 맺으며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데스틴 다니엘 크레톤 감독을 비롯해 각본가 데이브 콜러햄(<모탈 컴뱃> <원더우먼 1984>), 수챈 미술감독(<콜로설> <나를 찾아줘>, 해리 윤 편집감독(<미나리> <디트로이트>) 등 여러 아시아계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인 만큼 할리우드가 종종 실패해왔던 아시아 문화 묘사에 대한 우려는 잠시 거둬도 좋을 것 같다.
KEYWORD 5. 사이드킥
슈퍼히어로영화의 매력이라면 악당 캐릭터의 존재감을 들 수 있는데 마스크 뒤에 얼굴을 감춘 데스 딜러와 한쪽 팔이 기계 칼로 변하는 레이저 피스트(플로리안 문테아누) 등이 이번 영화에서 활약한다. 예고편 말미에 깜짝 등장한 어보미네이션(<인크레더블 헐크>에서 헐크와 함께 슈퍼 혈청을 맞고 강화인간이 된 캐릭터로 팀 로스가 연기했다.-편집자)과 웡(베네딕트 웡)의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샹치가 맞이할 새로운 여정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캐릭터 같다. 이를테면 샹치는 닥터 스트레인지나 브루스 배너 박사 같은 캐릭터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예측하는 것도 이번 영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샹치에 관해 더 궁금하다면?
<샹치: 사형제들> (시공사 펴냄, 8월 26일 출간 예정)
진 룬 양이 쓰고 다이크 루언, 필립 탄, 세바스티안 쳉이 그린 그래픽노블 <샹치: 사형제들>은 오랜 코믹스의 역사에서 샹치가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짚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샹치의 여정이 영화와 동일하지는 않다. 책에서는 사악한 고대 비밀 집단의 지도자 젱 주가 죽자 세상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의 아들인 샹치가 후계자로 정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생사도 알 수 없었던 가족들과 재회하는데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악당인 식이다.
<용쟁호투>가 개봉했던 1973년 무렵부터 코믹스상에서도 인기를 얻기 시작한 무명의 캐릭터인 샹치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국내에 곧 출간할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마블 스튜디오가 샹치를 영화화하려는 목적은 어쩌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우주처럼 MCU 안에 ‘쿵후’의 세계를 제대로 펼쳐 보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