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영화가 성 평등 가치와 문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나누고 싶다”
2021-08-26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양성평등 가치를 고민한 영화를 소개하는 백델데이 2021 프로그래머 윤단비, 임선애 감독 인터뷰
윤단비, 임선애 감독(왼쪽부터)

지난해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열렸던 행사 ‘벡델데이’(주관 한국영화감독조합)가 올해 ‘벡델데이 2021’으로 돌아왔다. 한국 영화가 보다 평등한 성별 재현을 하도록 돕고, 더욱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도록 응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행사다. ‘Be Next’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올해는 9월 4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동안 을지아트홀과 온라인(네이버TV 한국영화감독조합 채널)에서 양성평등 가치를 고민한 영화 열편을 선정한 '벡델 초이스 10’(<69세>(감독 임선애)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감독 이태겸) <남매의 여름밤>(감독 윤단비)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디바>(감독 조슬예) <빛과 철>(감독 배종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 모교>(감독 이미영) <콜>(감독 이충현) <혼자 사는 사람들>(감독 홍성은))의 상영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올해 벡델데이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남매의 여름밤>을 만든 윤단비 감독과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을 온라인에서 만나 벡델데이 2021을 미리 엿보았다. 윤단비 감독은 “보다 많은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다. 뜨거운 논쟁이 오가는 행사가 되길 바란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임선애 감독 또한 “올해 상반기는 동료 감독과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보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영화인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과 함께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아워 바디>의 한가람 감독은 아쉽게도 개인 일정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 벡델데이 2021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한국영화감독조합 홈페이지(https://dgk.or.kr/#/)를 참조하면 된다.

-프로그래머로 참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윤단비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성폭력방지위원회 소속이라 이전부터 성평등 문화와 가치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성폭력방지위원회가 영화 현장 안팎에서 여성을 성폭력으로부터 최선의 방어 역할에 주력한다면 벡델데이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성 평등 이슈를 영화인과 관객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프로그래머로 참여해 올해 벡델 초이스 10 상영작을 선정하고, 여러 프로그램들을 준비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해 벡델데이에서 내놓은 벡델 테스트 기준 7가지도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산업 환경과 성평등과 관련된 사회적 분위기 등을 반영해 기준을 좀 더 늘리고 싶었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고민해보니 그러한 기준들이 영화를 선정하는데 어떤 제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년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던 것도 그래서다.

임선애 윤단비 감독이 함께 참여하자고 끌어들였다. (웃음) 지난해 열린 1회 벡델데이 행사를 눈여겨보았다. 당시 개봉했던 내 영화 <69세>도 올해 벡델 초이스 10에 선정될 수 있을까 혼자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올해 행사의 프로그래머를 제안받았고, 윤단비, 한가람 감독님도 함께 하신다고 해서 참여하기로 했다. <69세> 또한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라 영화감독으로서 책무 같은 것도 있어서 감독조합의 성폭력방지위원회에도 참여하게 됐다. 프로그래머로서 참여해보니 생각보다 많은 영화인들이 벡델 테스트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올해는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대중에게 이 행사를 알리고 싶었다.

윤단비 프로그래머가 한 명 더 필요했는데 임선애 감독님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임 감독님이 연출한 <69세>가 성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가람 감독님과 함께 올해 행사를 준비하는데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임 감독님께도 ‘제가 성 평등 이슈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행사를 준비하면서 함께 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이 연출한 영화인 <69세>와 <남매의 여름밤> 또한 올해 벡델 초이스 10에 선정됐던데.

임선애 저희가 연출한 영화가 심사 대상이라 본심은 다른 감독님께서 진행하셨다. 예심 때 하나의 기준이 있었는데 독립영화나 다양성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 영화 쪽에서도 최대한 끌어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벡델 테스트 7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상업 영화가 많지 않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요즘 시나리오를 쓸 때 주인공이 아닌 배역에도 이름을 부여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보통은 주인공이 아닌 배역에는 이름을 일일이 달기 어려워 편의상, 관습적으로 직업으로 표기하곤 했었다.

-말씀대로 올해 선정 작품을 보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여고괴담 여섯번째 이야기 : 모교> <콜> <디바> 등 상업영화가 많이 선정된 것 같다.

윤단비 예심은 본심에 비해 다소 수월했다. 기준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모두가 머리를 맞댈만한 가치가 있다면 엄격하게 골라 탈락시키지 않고 본심으로 넘겼다. 상영작 열편을 보니 의외의 결과도 있는 것 같다. 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에서 한 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이라는 기준도 적용된 것 같고, 영화적 완성도나 소재가 부합되지 못한 작품에 대해선 고심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이처럼 제작 환경까지 고려하다 보니 심사가 쉽지 않았던 것 같고, 최종적으로 나온 상영작 열 편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임선애 심사하면서 고민했던 것 중 하나는 벡델 테스트 기준에 부합하더라도 관객 수가 많지 않은 영화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대중이 많이 본 영화는 또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벡델 테스트 7가지 기준

-벡델데이 2021은 단순히 벡델 테스트7에 부합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알리는 게 목표인 행사는 아닌 듯하다. 영화가 성 평등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목적인 것 같다.

윤단비 벡델 테스트가 시대 상황과 가치에 따라 계속 업데이트가 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보니 동료 프로그래머들과 다양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모르는 걸 알아갔던 것 같다.

임선애 원래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는 3가지(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2.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3. 남성에 대한 것 이외에 다른 대화를 나눌 것-편집자)였는데, 감독조합이 4가지(4. 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5. 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6. 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7.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를 추가했다. 7가지 기준들을 살펴보면서 균형감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구나 싶었다. 동료 감독들과 함께 심사하면서 첨예하게 논의됐던 내용은 올해 행사가 끝난 뒤 내년에 어떻게 적용할지, 우리가 놓친 건 무엇인지 만나서 더 많은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윤단비 벡델데이가 성 평등 가치와 문화를 둘러싼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보다 어느 정도 앞서가야 하는지, 무엇을 목표로 둬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남성이 주인공이고, 남성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영화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여성에게 좀 더 많은 비중을 둬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같은 생각도 했다.

임선애 이 행사를 통해 한국 영화가 이런 고민도 하고 있구나, 기존의 한국 영화 속 여성이 어떤 위치에 있었구나 같은 생각들을 깨닫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이 이 행사를 통해 기울어져 있던 게 분명하다는 것도 알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앞으로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배우, 스탭과 소통할 때 영화가 성 평등 가치와 문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함께 고민하고, 대중 또한 영화 속 여성을 묘사하는 새로운 시선과 변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도 있다.

-그런 변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는 의미가 있다.

임선애 좀 더 많은 대중과 창작자의 관심을 환기하고, 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벡델 단편 영상 공모전과 에세이 공모전을 진행했다. 많은 창작자와 대중이 보내준 영상과 에세이를 보면서 다양한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성차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와 관련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했다.

-프로그래머로서 이번 벡델 초이스에 선정된 열 편 중에서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가.

<내가 죽던 날>

윤단비 모든 작품이 의미 있고 소중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스타 배우인 김혜수씨가 영화에 공감하고 함께 작업함으로써 저예산 영화에 큰 힘을 실어준 건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나 또한 시나리오를 쓰면서 많은 동기 부여가 됐다. 배우들이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빛과 철>

임선애 예전에 어떤 여배우께서 한 시나리오 작가에 전화해서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의 고민과 현실을 다룬 시나리오가 없냐고 물어본 적 있다고 하더라. 지금보다 여성 서사가 더 없었을 때니까. 그 작가가 저한테 전화해서 ‘언니, 시나리오 쓴 거 좀 줘’라고 요청한 일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작품은 <빛과 철>. 영남(염혜란)과 희주(김시은) 두 주인공을 남자로 바꿔도 될 텐데 왜 여성으로 설정했을까. 배종대 감독님과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는데 영화를 보니 어쩌면 사회 구조적으로 가장 약자가 여성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게 너무 좋았고, 상업 영화에서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던 내면적인 질문들을 더욱 많은 사람이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번 벡델데이에서 선보이는 다른 프로그램도 소개해달라.

윤단비 매 작품 새롭고 놀라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소설가 김초엽 작가님을 모시고 ‘여성 캐릭터 창작과 SF여성 서사’라는 이름의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한다. 김초엽 작가님은 캐릭터를 어떻게 구상하고 만들어내는지, 세계관을 어떤 식으로 창조하는지를 들을 좋은 기회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제작비가 큰 영화를 연출하는 여성 감독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 감독이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를 더 잘 만들기 때문인가. 여성 감독은 무엇이 부족해 투자가 잘 안 되는 걸까.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와 변영주 감독이 명쾌한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을 주제로 대담 ‘벡델 심포지움 속 토론 - 한국 영화의 끊어진 사다리, 이대로 괜찮은가'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임선애 KAIST에서 만든 인터랙티브 미디어랩을 통해 백델 초이스 선정작 열 편뿐만 아니라 2020년 7월 1일부터 2021년 6월 30일까지 개봉한 한국영화 중 박스오피스 21위 안에 든 흥행작 20편(<서복>(2020) 제외)을 대상으로 감정의 다양성, 시간 점유율, 공간 점유율, 나이, 안경, 메이크업, 주변 물체의 종류라는 총 7개의 지표를 통해 남녀 캐릭터 묘사를 분석하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지난해 결과와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 같다. 그리고 심포지엄 ‘한국 영화, 벡델 테스트와 만나다’에서 조혜영 평론가가 한국 영화 속 양성 평등 현실, 여성 감독이 상업 영화 진출이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 밖에도 벡델리안 감독상,작가상, 제작자상, 배우상을 선정한다.

윤단비 참,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OTT에서 공개된 시리즈까지 모든 콘텐츠를 대상으로 ‘최애’ 여성 캐릭터를 선정하는 올해의 캐릭터 상도 발표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