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모가디슈> <싱크홀> <인질>이 보여준 ‘지금, 여기’의 모습
2021-09-08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지루한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모가디슈>가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몇몇 영화를 보면서 이 지루한 여름이 좀처럼 끝나지 않으리라는 걱정이 일었다.

외면하며 생존하기

<싱크홀>

<모가디슈> <싱크홀> <인질>은 각기 다른 장르적 관습 속에서 재난과 감금, 그리고 탈출(또는 구출)의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나는 <사냥의 시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반도> <#살아있다> 등을 통해 2020년 한국영화의 키워드를 ‘생존 투쟁’으로 요약한 적이 있다. 생존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어버린 시대의 풍경을 마주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영위되어야 할 삶의 영역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평범과 보통의 삶조차도 치열한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끔찍한 세계가 도래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빈약해진 삶의 서사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1년 여름에 등장한 영화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인물들을 내세운다. 나는 올해 여름의 영화를 이야기하며 지난해의 논의를 반복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연장선상에서 이들 영화에서 엿본 ‘지금, 여기’의 한 단면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현실의 장벽에 대한 두 가지 태도

<모가디슈>

<모가디슈>는 19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지만 2021년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공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어떻게 경쟁하는 삶에서 공존의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가디슈>는 생존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는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진일보한 작품이다. 이는 <모가디슈>가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내재한 가치를 영화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특별한 성공이나 성취를 보여주기는커녕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데 만족하고 있다. <모가디슈> 역시 죽도록 고생하다 살아서 귀환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모가디슈>는 생존이 누군가와 삶을 공유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생존에 내재한 삶의 가치.

그렇다고 <모가디슈>가 생존의 가치를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는 것은 아니다. 류승완 감독은 여전히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내세우지만, 그 실현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적인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모가디슈>는 남북 관계라는 현실적 한계 안에서 휴머니즘적 가치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나는 <백두산>에 대한 비평에서 남북간의 우정의 서사가 재난 상황에서만 가능함을 지적한 바 있다. 남북이 힘을 모아 재난을 극복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현실적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영화는 그 적대성을 지우기 위해 희생의 서사로 우회하곤 했다. 물론 숭고한 희생자의 역할을 맡는 것은 주로 북한쪽 인물이었다. 재난의 종료 이후에도 이 우정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은 그렇게 삭제된다.

반면에 <모가디슈>는 이러한 서사적 한계를 외면하지 않는다. 남북 대사관 직원들은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를 모르는 척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서로를 외면하며 걷는다. <모가디슈>는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외면했던 질문을 서사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생존에서 휴머니즘적인 공존의 삶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장벽이 부각된다. 그렇게 <모가디슈>는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누락해왔던 질문을 되살려낸다.

<모가디슈>의 이러한 가치는 올여름 함께 개봉한 <싱크홀>과 비교하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싱크홀>에는 단 한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싱크홀에 갇힌 인물도,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모인 구조대원도 모두 한마음 한뜻이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재난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재난영화에서 생존자 집단은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고, 그래서 그 집단의 대립과 갈등은 곧잘 시대적 알레고리로 언급되곤 한다. <부산행>에서 좀비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승객들은 각각의 입장과 가치관에 입각해 행동하면서 그 시대의 지도를 그린다. 하지만 갈등과 대립이 없는 <싱크홀>의 생존자 집단은 너무 매끈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싱크홀>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부동산 문제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 영화라는 점이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가 싱크홀에 처박히고 신축 아파트에 살게 될 직원은 무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싱크홀>은 부동산이 계급적 상승과 하강을, 더 나아가면 생존의 문제로까지 여겨진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싱크홀>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이슈는 딱 여기까지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의 핵심을 이루는 이슈를 거론하면서도 이처럼 갈등 없는 집단을 그려낸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수 있겠지만, 이로 인해 신축 빌라가 땅 아래로 추락하는 사건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알레고리로 확대되지 못한 채 우연한 재난으로 축소된다.

<싱크홀>의 이러한 영화적 태도는 구조대원의 역할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싱크홀>은 반복적으로 땅 아래와 위를 오가지만,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의 상당 부분을 걷어내도 이야기가 성립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소방대원의 역할은 싱크홀에 갇힌 인물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 사회가 애쓰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싱크홀>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징후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이러한 제스처의 사회적 함의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건의 실질적 해결이 아니라 그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제스처, 또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이를 실질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제스처, 그리고 이러한 제스처에 만족하는 영화적 태도. 이 제스처의 시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냉소주의적 주체는 그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태를 얼마나 악화시킬 수 있는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하던 과거의 주체와 다르다. 과거의 주체가 구조적인 순진함을 함축하고 있었다면, 냉소주의적 주체의 순진함은 단지 제스처일 뿐이다. <싱크홀>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싱크홀>의 구조대원의 모습은 사회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이를 위한 제스처를 펼쳐 보이는 데 급급한 ‘지금, 여기’의 모습과 참으로 닮았다.

눈을 가린다는 것

<인질>

자신이 다루는 이슈를 ‘척하는 제스처’로 접근하는 이러한 태도는 단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자신이 택한 소재나 영화적 상황에 접근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인질>은 배우 황정민을 영화 속 캐릭터로 활용한다. 그런데 영화 속 그 캐릭터가 꼭 황정민이어야 했을까? 배우 황정민이 <인질>의 주인공이어야 하는 것은 서사적 필요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캐스팅의 결과처럼 보인다. <인질>의 주인공은 최민식, 하정우, 송강호가 연기해도 크게 상관이 없다. 물론 황정민이 출연한 영화를 곧잘 인용하지만, 그것이 극에 다층적 의미를 얼마나 만들어내는지 의심스럽다. <인질>에는 영화와 현실, 실제 배우와 캐릭터간의 경계를 확정할 수 없을 때 오는 혼란이 없다. <인질>은 ‘배우 황정민’과 ‘캐릭터 황정민’이 너무나 매끄럽게 통합되어 있다.

이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코미디의 왕>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등과 비교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코미디의 왕>의 제리 루이스는 당대 최고의 코미디 배우인 자신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또한 그와 반대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카메라 뒤편의 그는 진지하면서도 너무나 지쳐 보인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제리 루이스의 모습인지 혼란스럽다.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오가는 혼란이 이러한 영화의 매력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다. 카트린 드뇌브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노배우 파비안느를 연기할 때 우리는 영화 속 노배우의 모습에서 카트린 드뇌브의 잔상을 찾고 싶어진다. 우리는 카트린 드뇌브가 영화에서 배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가상의 이미지 너머의 어떤 진실을 엿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상과 현실, 허구와 진실을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를 오가며 느끼는 혼란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의 다층적 의미가 새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질>은 캐릭터 황정민과 배우 황정민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캐릭터 황정민이 배우 황정민을 흡수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배우 황정민이 캐릭터 황정민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혼란에 빠질 이유도 없다. <인질>은 자신이 둘 사이를 오간다는 ‘제스처’만 보여줄 뿐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이상한 장면은 황정민이 박성웅과 통화하는 일련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캐릭터 황정민은 배우 황정민으로 확장된다. 황정민은 서도철과 최철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한다. 박성웅이 매니저에게 이를 전달했을 때, 매니저는 그것이 황정민이 연기했던 경찰 배역의 이름이라는 것과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더이상 서사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저 황정민을 주제로 한 일차원적인 퀴즈 게임일 뿐이다. 물론 관객을 대상으로 한 게임으로, 자신이 배우 황정민과 캐릭터 황정민을 오간다는 제스처를 보여주면 그만이다.

이러한 제스처와 관련해서, 우리는 <모가디슈>를 기억해야 한다. <모가디슈>는 <싱크홀>과 <인질>의 제스처를 실제로 보여준다. 눈을 가리는 두번의 행동을 통해서. 평론가 김철홍은 <모가디슈>를 두고 ‘시선의 전쟁터’라고 지적한다(<씨네21> 1318호,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의 엔딩에 대하여’). 남북 대사관 직원들은 이 전쟁터에서 자신들만의 생존법칙을 발견한다. <모가디슈>에는 북한 대사관 직원이 아이의 눈을 손으로 가리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그 첫 번째 장면은 림용수(허준호)가 북한 대사관 직원과 가족을 이끌고 한국 대사관에 들어왔을 때이다.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엄마가 가린다.

두 번째 장면은 영화 엔딩 무렵 등장한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약속한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서로를 외면한 채 나란히 걷는다. 이때 다시 한번 엄마는 아이의 눈을 가린다. 그렇게 <모가디슈>는 눈을 가리는 제스처를 통해, 차라리 보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생존의 한 법칙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는 20년 전의 사건에 대한 류승완의 역사적 상상이지만, 그 법칙은 지금, 여기에도 가장 유용한 생존의 법칙이다. 실제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그것이 사회적 현실이건, 영화적 세계이건 간에)에 눈을 가린 채, 그것을 보고 있는 양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생존법칙의 세계. 어쩌면 류승완이 역설적으로 역설한, 1991년을 통해 바라본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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