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D.P.'가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과 끝내 드러내지 못한 것
2021-09-17
글 : 송경원
안전한 거리에서

<D.P.>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군 내부에 고착화된 부조리를 성공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D.P.>의 장점은 명확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군 내부폭력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통해 공감과 호응을 일으킨다는 것. 여기에 버디물과 형사물을 섞어놓은 D.P.요원 안준호(정해인)과 한호열(구교환)의 활약상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다양한 군인 캐릭터, 군대 내 참으로 다채롭게 서식 중인 빌런들을 통해 끊임없는 잔재미를 선사하는 것도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다. 한편 일부에서 제기되는 아쉬움들은 대부분 동전의 앞뒷면마냥 장점과 연결된다. 우선 군대 내 폭력을 전시하듯 반복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D.P.>에는 폭력적인 상황 그 자체를 전시,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깔려 있다.

이렇게 재미있어도 괜찮은가

여러 반응 중 유독 뇌리에 꽂힌 건 최지은 작가의 한 문장이었다. “<D.P.>는 재미있는 드라마다. (중략)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괜찮은지 계속 물어야 한다.”(<씨네21> 1322호, “넷플릭스 <D.P.>, ‘진짜 사나이’들의 그늘”) <D.P.>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이 시리즈가 극적인 몰입을 순조롭게 이끌어낸 매끈한 장르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이것이 제대로 된 고증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천착하는 순간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어쩌면 그건 객관적인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 차라리 경험에 기반했다고 주장하는 이 구체적이고 공감 가는 상상이 우리에게 극적인 재미 외의 어떤 진실들을 환기시키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어째서 이 불편한 소재가 재미있게 다가오는가. 혹은 여기서 재미를 느껴도 괜찮은가. <D.P.>는 새롭지 않다. 무언가 대단한 걸 폭로한 것도 아니다. 풀어놓는 군 내부의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에피소드는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미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 등 군대 내 부조리를 고발하는 창작물은 이미 숱하게 접해왔다. <D.P.>의 장점이자 한계는 이런 군내 부조리에 얽힌 에피소드를 빡빡 긁어모아 총집합한 에피소드라는 사실이다. 놀이동산에서 일해봤다고 군견병으로 배치하는 조직에서 합리적인 시스템을 기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D.P.>는 조석봉 일병(조현철)의 폭주를 통해 얼핏 몇십년간 수통 하나도 제대로 못 바꾸는 한국군의 시스템적인 모순을 고발하는 듯한 뉘앙스를 남긴다. ‘뭐라도 해야 한다’던 조석봉의 선택이 왜 결국 극단적인 복수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D.P.>는 여기에 당위를 제공하기 위해 수면 중인 후임병에게 방독면을 씌우고 물고문을 한다거나 야간 근무 중인 후임병에게 자위를 강요하는 장면, 후임병의 속옷을 벗기고 라이터로 체모를 태우는 장면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한다. 이만큼 당했으니,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 이 정도면 개인의 폭주가 납득된다는 전개.

하지만 이런 세밀한 에피소드는 아무리 긁어모아봤자 표면적인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도리어 자극적인 장면들의 전시로 인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비이성적인 사태를 유발하는 군 내부의 부조리가 은폐되는 효과도 있다. 이 정도 수위의 폭력을 직접 접한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소위 ‘~하더라’라는 식으로 유사한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 무수히 떠돌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인 채 일상을 보낸다. 방관자라고까지 하진 않겠다. 한국 사회에 사는 한 우리 모두 이 사태의 연루자이자 구성원이다. 그러나 구성원마다 폭력적인 사태로부터 놓인 거리가 다르다. 정도에 따라서 그저 무시무시해서 더 재미있는, 그게 말이 되냐고 반문할 법한 괴담 같은 너스레로 넘길 여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내부의 폭력과 모순이 어느 순간 당연한 것으로 내재화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와 같다. 이야기로부터의(혹은 이야기를 통한) 안전한 거리. 하물며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는 이러한 폭력의 내재화가 훨씬 은밀하게 진행되기 마련임에도 <D.P.>는 이를 너무 손쉽게 개인적 에피소드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다.

넷플릭스라는 장르, 스튜디오가 되어가는 OTT

‘장르적’이라는 수식어는 쉽게 남용되며 꽤 오해받고 있다. 장르는 패턴이자 꾸며진 무대에 대한 약속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이야기로 인지하겠다는 상호합의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데 종종 실화가 장르라는 통로를 택할 때 예상 밖의 균열이 발생한다. 가령 <도가니>의 경우 공포영화의 클리셰들을 적극 활용하여 특정 인물을 악마화해버린다. 관객의 공분을 사기엔 효과적인 장치지만 반대로 그 효과가 지나쳐 시야를 앗아가버리기도 한다. 아동 학대가 발생하게 되는 시스템적인 문제를 지우고 손쉽게 사태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버리는 것이다. 장르에는 영화를 보고 분노에 동참하는 관객마저 이러한 망각의 연루자로 만드는 힘이 있다.

다행히도 <D.P.>는 모든 사태를 이처럼 단순한 선악의 구도로 잡진 않는다. 차라리 어떻게 해서 그런 폭력이 되물림되는지를 한번은 생각해보자는 쪽에 가깝다. <D.P.>의 전체적인 구성은 탈영병을 추적하는 방식이지만 캐릭터의 서사는 그와 그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을 따라간다. 원작 만화에서 상병이었던 안준호가 드라마에선 이등병 시절로 되돌아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들 각자의 역사를 되짚어 폭력이 어떻게 잉태되는지, 반대로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성과 선의를 유지해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다만 이걸 폭력이 내재화하는 과정에 대한 고찰로 보기엔 <D.P.>가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에 충실하다. 누군가는 <D.P.>를 보고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돋을 지경이라고 하지만 이 시리즈는 대체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도 재밌게 볼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친숙한 캐릭터와 상황의 나열이다. 예컨대 부대 내 괴롭힘의 대상을 오타쿠로 설정하는 것이나 오타쿠가 오타쿠임을 드러내는 방식은 실로 평면적이다. 매우 불편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장르물 특유의 흡인력과 캐릭터들의 유머 코드가 작동하여 이를 중화시킨다. 군 내부 부조리라는 본질은 껍데기에 씌어진 이 달콤한 요소들로 인해 종종 지워지기도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달콤한 껍데기야말로 넷플릭스 시리즈 <D.P.>의 본체일지도 모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이 쌓여감에 따라 패턴이 슬슬 보이는 것 같다. 이제 OTT 플랫폼들은 각자 20세기 초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플랫폼마다 자신들의 상황에 맞춰 특징적인 전략을 짜내고 있는데, 그게 고착화되면 장르다. 제일 앞자리에 선 넷플릭스의 경우 단연 눈에 띄는 요소는 캐릭터와 배우의 활용이다. 에피소드 구성은 필연적으로 매화 매력적인 요소들을 하나씩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D.P.>는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의 발굴, 신선한 마스크를 기둥 삼은 캐릭터 중심의 서사를 동력 삼아 재미난 캐릭터들을 선보인다. 그렇다. 꾀병으로 들어간 군병원에서 자대복귀당할 때 담배 피운 병사들을 다 끌고 들어가는 한호열 상병이나 진급을 위해 박범구 중사(김성균)와 힘겨루기 하는 임지섭 대위(손석구)는 재미있는 캐릭터다.

이들 캐릭터가 지닌 부피의 상당 부분은 배우가 가진 본래의 힘에서 빌려온다. 한호열 상병이 “한마디만 더 하면 아가리 찢는다”는 황장수 병장에게 뻗대며 “한마디”라고 외칠 때 실소하지 않을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능글맞은 대처는 실은 배우 구교환의 것이고, <D.P.>가 군 내부 부조리를 캐릭터로 포장하는 방식이다. 왜 이런 방식을 택했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재미있으니까. 대다수가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포장하는 것. 잔혹하지만 그게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장르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D.P.>는 장르적이다. 바야흐로 OTT 플랫폼이 21세기의 스튜디오로 자리잡아가는 걸까.

<D.P.>는 군 내부 부조리의 문제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상당한 반향이 있고, 이를 공감의 도구로 활용 중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기대 효과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과녁은 어디까지나 군대를 모르는 사람도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익숙하고 전형적인 패턴에 조준되어 있다. 여기에 대고 왜 이런 사실적인 소재를 ‘재미있게’ 만들었을까라고 묻는 건, 까놓고 말해 소모적인 질문이다. ‘윤리적, 성찰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건 작품의 몫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괜찮은지 계속 물을 수 있다. 다행히도 그건 관객에게 허락된 몫이다. 내재화된 폭력에 먹히지 않고 선의를 유지하는 미래의 안준호 상병처럼, 우리를 잠식해오는 부조리에 저항하는 수단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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