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팜 스프링스'와 영화의 반복에 관한 짧은 단상
2021-10-06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거듭되는 반복 없이 영상의 자극이 존재할 수 있을까. 타임루프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결합한, 별다른 부연설명이나 비평이 필요 없어 보이는 <팜 스프링스>를 통해 반복의 미세한 파열에서 나오는 고유한 힘을 느꼈다.

반복이 파열을 일으킬 때

영화는 장면마다 하나의 오케이컷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므로, 아무리 근사하고 매력적인 순간이 담긴 테이크라 하더라도 연출자가 설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버려지기 마련이다. 나는 매 순간 오케이와 엔지를 구분하는 직관의 근거가 무엇을 토대로 결정되는지 여전히 궁금하지만(그래서 가끔 오케이컷으로 이루어진 통상적인 ‘완성본’과 누락된 장면들로 구성한 ‘해적판’을 비교해보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강박에서 느슨하게 벗어나 한 장면에 서로 다른 선택과 비전의 가능성을 그려내는 작업에도 쉽게 매혹을 느끼곤 한다.

이를테면 알랭 레네의 <스모킹/노 스모킹>에서 두 연인은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피우지 않는 선택에 따라 무작위로 변형되는 상황을 통과해나간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우연한 기회>는 주인공 남자가 플랫폼에서 기차에 탑승하거나 탑승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에 맞춰 다르게 변모하는 세번의 삶을 따라간다. 우연적이지만 불가피한 한순간의 선택은 그들의 삶을 전혀 다른 형태로 이끌고 영화의 궤적을 다시 구성한다. 레네나 키에슬로프스키의 방식보다는 훨씬 미세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네개의 상영본에 상이한 숏의 길이와 화면구성으로 차이를 도입시킨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과 같은 사례 역시 거론할 수 있을 테다.

이 소수의 작품들은 한번 화면이 열리고 나면 직선적인 방향으로 운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절대적인 규율을 멈춰 세워 제한적으로나마 영상에 미시적인 자유를 일으킨다. 한번뿐인 삶의 한계적 체계를 넘어선 다른 선택과 두 번째 삶의 가능성. 물론 영화의 영토를 더 넓게 관측한다면 이는 대단히 예외적인 논의는 아니다. 간단한 예로 영화사 최초의 기록으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세 가지 버전으로 나뉘어 있다. 어느 버전에서는 자전거를 탄 남자들이 여럿 나오고, 다른 버전에서는 여러 마리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또 다른 버전에서는 큼지막한 마차가 문 뒤편에서 나온다. 이중에서 더욱 널리 알려진 버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 장면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잠재성을 기반으로, 같은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이어 붙여 필름의 물적 조건과 지배적인 기호들의 작동원리를 탐색하는 실험영화의 작업이 있다. <부부> <그냥 해!>와 같은 마틴 아놀드의 푸티지, 또는 피터 체르카스키의 필름 작업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1초에 24번 겹쳐지는 이미지의 반복은 영화를 추동하는 원리이자 조건으로 전면화된다. 거듭되는 반복의 체험이 없다면 영상의 자극은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두개 이상의 오케이컷이 공존하는 영화의 역량은 바로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에, 또한 그 기원적 물질 조건에서부터 잠재하고 있었다.

‘그래’와 ‘아니’라는 두개의 대답

하지만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영화사의 잠재적 기억, 매체를 가리키는 구조적 탐구 자체라기보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극영화의 한 부분에서조차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영화의 돌출된 반복 강박이 파열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바로 그런 미시적인 파열의 순간에 대해 짧게 말해보려 한다. 맥스 바르바코우의 데뷔작 <팜 스프링스> 초반부에는 이러한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특이한 장면이 나오는데, 실은 특이하다고 말하는 건 괜한 과장일 테고 범용한 대화에 지나지 않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불만족스럽게 섹스를 중단하고 사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질책하는 여자 친구 미스티(메러디스 해그너)에게 주인공 나일스(앤디 샘버그)는 두번의 대답을 한다. 그래, 당신이 아니라 내가 문제야. 아니, 내가 아니라 당신이 문제야.

곧바로 이어 붙는 연속된 두번의 대답은 순간적으로 혼동을 일으킨다. 이건 말장난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미스티의 반응은 다분히 예사롭다. 나일스가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 동안의 타임루프에 갇혀 거의 모든 행동의 지침을 시도해보았고, 이 심드렁한 대답은 그가 깨어난 또 다른 아침을 지시하는 기호라는 걸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일스는 끝없이 ‘그래’와 ‘아니’를 오가는 수긍과 거절을 수행해왔고 이젠 그 한계점에 다다라 있다. 연속된 장면으로 지켜본 두개의 대답은 어쩌면 독립적 시간에 주어진 별개의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와 ‘아니’는 다른 의미의 표현이지만 나일스에게 어떤 차이도 각인시키지 않는다. 남겨진 것은 예측 가능한 반복된 신호들이 전부다. 여자 친구가 누구와 바람을 피울지, 결혼식장에서 사람들이 어떤 동작으로 춤을 추는지, 심지어는 시간에 맞춰 흔들리는 지진의 타이밍까지 그는 전부 파악하고 있다. 적당히 낙관적인 성격의 나일스는 이 견딜 만한 무기력 속에 던져져 있다.

<팜 스프링스>는 비평이 기웃거릴 필요가 없는 영화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하루 동안의 시간이 반복되는 루프에 갇힌 나일스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를 끌어들이게 되고 물론 두 사람에게는 온갖 소동과 작은 비밀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 동안의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타임루프물과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배합한 이 유려한 코미디는 별다른 부연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장르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빌려온 전개는 속도감이 넘치고, 예기치 못한 두 남녀의 충돌과 결합은 진부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 활력으로 가득하다. 캐릭터, 장면, 대사, 주제, 이미지…. <팜 스프링스>에는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거론하기 쉬운 요소들 대부분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다. 손쉽게 단점을 들먹일 수도 있을 것이다. 뻔한 스테레오타입의 이야기, 들쭉날쭉한 인물들의 감정선,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문제해결 방식…. 하지만 찬사든 비판이든 마찬가지다. 이토록 가벼운 영화 앞에서 평론은 할 말을 잃고 논평은 대개 무의미해진다.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대하는 두 사람의 차이에 있다. 나일스는 반복으로만 지속되는 세계의 원리에 완벽히 적응해 있다. 그는 끝없는 루프의 반복 속에서 막 결혼한 신혼부부를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과 잠자리를 나눴고, 상상할 수 있는 무수한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데이터베이스의 세계, 누구와도 섹스할 수 있는 내밀함이 파괴된 세계.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면 정해진 페이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있을 뿐 결과가 정해진 순환의 지대가 펼쳐져 있다.

레네와 키에슬로프스키가 반복과 변주에서 영화의 다른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반복으로부터 발생하는 고유한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무기력의 편에 서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나일스의 인식과는 반대로 세라는 이곳에 침입하면서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궤적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평온한 반복의 세계에 머물지 못하고 그곳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이는 당연히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에서 결코 연인이 될 것 같지 않은 남녀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의 변주일 테지만, <팜 스프링스>에서는 그 차이에 두 세계의 속성이 걸쳐져 있다. 이 영화에서 사랑을 선택한다는 건 절반의 세계를 포기해야 하는 과도한 결단을 수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켜야 하는 어떤 것

영화의 후반부, 겹쳐진 절반의 세계를 경계에 두고 나일스와 세라는 마지막으로 대립한다. 세라가 양자역학의 원리를 매개로 루프에서 탈출하는 방법(몸에 폭탄을 두르고 동굴을 통과하는 것이란다)을 제안하자, 나일스가 받아친다. 굳이 이 닫힌 세계를 탈출해야만 할까?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현실로 되돌아가서도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한 차이를 내재하고 나일스에게 두 가지 대답이 요구된다. ‘그래’ 혹은 ‘아니’.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통속적인 로맨틱 코미디는 독창적인 결론이나 남들과 다른 전개를 보여주기 위해 안달을 내는 따분한 취향의 영화가 아니다.

자조적인 유머와 함께 폭탄을 두른 채로, 물론 두 사람이 동굴에 들어선다. 기묘하게 쏟아져나오는 빛을 뒤로하고 폭발을 기다리며 나일스와 세라는 키스를 나눈다. 이 최종적인 행동으로부터 영화 전체가 결정된다. 영화는 키스와 같은 것이 된다. 차원을 통과하는 우리의 몸이 찢기고 조각나는 사태를 감수하면서도, 그 불안과 위반을 동반하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어떤 것. 그 선택을 표상하는 연인의 이미지로 동굴의 빛을 배경으로 키스하는 두 사람의 옆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똑바로 시간이 흐르는 현실에 도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막의 풍경에는 여전히 공룡들이 보이고, 이 터무니없는 세계는 칵테일과 마약에 취한 미치광이들이 보는 세상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선택이 남는다. 여러 개의 오케이를 거듭할 수 있는 세계에서 탈출해 단 하나의 컷이 성립되는 장소로 도착한 두 사람의 선택이. 역설적으로 그들은 무의미한 반복을 끝내면서 영화에 깃든 반복의 역량을 회복한다. 잔상처럼 남겨진 세계의 기록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 선택이 구현된 뒤에, 나일스는 적절한 매너와 예의를 갖춘 타인의 모습으로 결혼식장에서 다가오는 로이의 부름에 답한다. 예측 가능한 세계의 반복은 끝났다. 낯선 타인으로 그들은 다시 마주칠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끝없는 지루함에 붙들린 오늘날의 영화적 상태를 지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하루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일스와 세라는 온갖 스펙터클을 동원한다. 자동차 사고와 비행기 폭발, 술집에서 벌어지는 뮤지컬과 결혼식장 한가운데서 펼치는 연극적 무대. 그들의 놀이는 무의미한 일상의 시간에 모험을 덧씌우는 과정으로, 이는 고스란히 관객의 시간을 탕진하는 대중영화의 과업을 실천한다. <팜 스프링스>는 그렇게 새로울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영화에 주어진 ‘반복’의 이중적 측면을 환기한다. 엔딩 크레딧을 포함한 영화의 상영시간은 정확히 1시간30분. 30분이 지나는 시점은 유쾌하고, 다음 30분에 감정을 흔들다가 마지막 30분에 안도케 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의 파노라마를 그려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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