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국, 캐나다를 중심으로 비아시아 영화 선정을 담당하는 박도신 월드 프로그래머는 올해 부산이 선보이는 19편의 영미권 영화를 두고 “왕중왕전”이라 수식했다. 월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에서 아시아 프리미어로 제한선을 낮춘 플래시 포워드 부문을 비롯해 관객과의 접점을 고려한 인기작들이 포진해 있다는 이야기다. 세계 영화제 소식에 발 빠른 부산 관객의 갈증을 채워줄 작품들을 박도신 프로그래머의 목소리로 미리 만나보았다.
-올해 비아시아 영화 선정 기준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플래시포워드 부문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기준을 낮췄다.
=플래시포워드 섹션은 비아시아권 신인감독들의 경쟁장이었다. 월드나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는 곧 신인 발굴을 목적으로 하자는 취지였는데, 이미 여러 영화제를 거치는 비아시아권 영화 중에서 뛰어난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꽤 어려웠다. 선댄스를 비롯해 비아시아권이 신인 감독들이 출품할 수 있는 영화제들이 상당히 많지 않나. 아무래도 감독과 작품의 인지도가 떨어지다 보니 다른 섹션보다 인기가 좀 떨어진 게 사실이었다. 또 프리미어 상영을 하면 감독 초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유망하고 사랑받는 감독들을 부산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아시아 프리미어로만 내리더라도 보다 폭넓은 감독들을 섭외할 수 있다. 올해 플래시포워드는 해외에서 각광받은 작품들의 왕중왕전 같은 자리가 될 것 같다.
-요즘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비아시아권 신인 감독들 중에서도 스타성이 돋보이는 감독들이 많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숀 베이커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에는 프리미어가 걸려 초청하지 못했지만 지금 기준을 적용하면 부산 관객과 숀 베이커 같은 젊은 창작자가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으로 우뚝 선 션 베이커의 신작 <레드 로켓>은 올해 아이콘 섹션에서 상영된다-편집자)
-선정 과정이 즐거웠으리란 예상도 든다. 플래시포워드에서 선정한 작품을 추천해준다면.
=프란 크랜즈의 <메스>. 프란 크랜즈는 9살때부터 조·단역으로 활동한 미국 배우인데, <메스>에서 주연과 감독을 맡았다. 미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총격 사건을 소재로 한다. 총격 사건으로 살해당한 아들의 부모와 가해자의 부모가 세월이 흘러 교회의 주선으로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가해자도 스스로 자살을 한 상황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 화해도 했다가, 다시 갈등하기도 하고, 결국 용서를 하는 등 4명이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데 영화 내내 밀도감이 상당하다. 올해 선댄스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선댄스는 특히 영화제 기간이나 끝날 때즈음에 미국 유튜버들의 리뷰가 많이 나오는데 <메스>가 자주 회자되었다. 또 하나는 <자키>라는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평생 승마 기술 하나만 믿고 살던 사람이 병에 걸려 은퇴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아들이라 소개한 남자가 찾아와 당신처럼 기수가 되고 싶다고 한다. 가슴 뭉클한 휴먼 드라마이고 배우 클리프튼 콜린스 주니어가 선댄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올해 부산에서 상영되는 영어권 영화들의 경향이 있다면.
=지난 몇년 간 여성 감독의 출연과 증가를 꾸준히 읽을 수 있었다. 영화제들이 먼저 여성 쿼터제를 운영하는 등 신인 감독들 중에서 특히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올해는 배우들이 연출에 뛰어드는 사례들이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 <메스>도 그렇고, 월드 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되는 <패싱>도 배우 출신 감독이 만든 수작이다. 영국 배우 레베카 홀의 첫 감독작인데 연출 데뷔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완숙한 시선을 보여준다.
-올해 칸, 베니스 등은 지난해 코로나 상황으로 잠시 대기 중이었던 영화들이 밀려나와 라인업이 화려해진 인상이었다.
=육아휴직으로 한 해 쉬었어서 작년과 완벽하게 비교하긴 어렵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더라. 내 예상으로도 밀려있던 작품들이 나와서 우선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만큼 그렇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각종 OTT 플랫폼에서 콘텐츠 확보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 제작사에서 오히려 이곳 저곳에 섣불리 출품하지 않는 인상을 받았다. 약간 잰다고 해야할까. (웃음) 미국과 달리 캐나다는 쪽은 확실히 작품이 늘었다. 캐나다는 시장이 작음에도 독립영화를 지원책이 잘 마련되어 있고 소규모 독립영화들이 꾸준히 나온다.
-예매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인기작 중 하나가 웨스 앤더슨 감독의 <프렌치 디스패치>다. 어떻게 봤나.
=정말이지 화려한 코미디라고나 할까. 시각적으로 풍성한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웨스 앤더슨 감독이 보여준 특유의 스타일과 연출 방식,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조밀하게 짜여져 있다. 처음 보고 나서, 이건 관객들이 굉장히 좋아할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떻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웨스 앤더슨식의 유머를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의 배우 전종서도 기대된다. 한국 배우 혼자서 미국 영화의 주연을 맡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그래서 처음엔 조연 정도인 줄 알고 영화를 봤는데 알고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원톱 주연이어서 놀랐다.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이 어떤 이유로 전종서를 캐스팅했는지 그 비화가 궁금하다. 아마도 <버닝>의 영향이 컸겠지만. 이 작품은 오픈 시네마 부문에서 상영된다. 장르적으로 야외 상영을 즐기기 좋은 작품일 거라 판단했다. 미국 독립영화에 한국 배우가 원톱 주연으로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이라 많은 분들이 재밌게 보실 것 같다.
-선정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캐나다 영화 <더 패밀리>는 특히 관객 반응이 궁금하다. 다소 늦은 5,6월 무렵에 캐나다의 영화진흥위원회가 보내준 링크를 통해서 영화를 처음 봤다. 첫인상으로 떠오른 건 <더 위치>(2015)였다. <더 위치> 못지 않은 못지 않은 스릴러물이 나왔다는 흥분과 함께 이 감독은 베니스, 토론토 정도는 꼭 가겠다 싶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데도 못 갔더라. (웃음) 캐나다 출품작은 늘어나고 올해 선정편 수는 다소 줄어든 와중에 엄선해서 뽑은 영화인데 아무 영호제도 못간 게 마음에 못내 걸리기도 하고, 내 안목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다. <더 패밀리>에 대한 감상과 반응을 많이 들려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