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인간수업' 때처럼 회피한 것
2021-10-13
글 : 박지훈 (영화평론가)
모두가 피해자를 자처하는 곳

애초부터 넷플릭스는 극장과 대결한 적이 없었다. 심심한 저녁에 넷플릭스를 보는 관객의 기대와 극장을 찾아가는 관객의 기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넷플릭스 드라마의 흥행 요소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그것과 유사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강점은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서사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는 <오징어 게임>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반복되는 기시감과 클리셰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크게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단순한 서사와 눈을 끄는 미장센, 끝내 다음 화를 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 드라마에 팝콘 무비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오징어 게임>의 장르적 단순함을 지적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은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라이어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게임은 주로 근력을 사용하는 데 반해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다중 지능을 이용하여 게임을 해결한다. 이러한 다중 지능 게임은 대부분 승률을 높일 수 있는 해법이 있다. 이 해법을 쓰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팀을 구성해야 하고, 팀원들을 설득하고, 신뢰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해법을 파악해도 이러한 사회적 관계가 없으면 그 해법은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쓸데없어 보이던 인물의 강직함이나 순박함이 신뢰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게임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다중 지능 게임을 통해 캐릭터의 능력과 다양성을 보여주며, 사회의 메커니즘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게임으로서의 묘미가 없는 게임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의 게임들은 지능을 이용하는 요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리고 폭력이 허용됨으로써 게임으로서의 묘미를 찾기 힘들다. 게임들은 단지 인물들의 처절함을 표현할 뿐이다. 처절함이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처절한 인물들은 모두 비슷하게 처절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개성은 게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잠시 중지된 틈에서 발현된다. 말하자면 <오징어 게임>속 게임은 물에 빠진 인간들의 절박한 허우적거림과 유사할 뿐, 사회의 민낯과는 관계가 없다. 게임은 오직 상우(박해수)의 민낯을 고발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고작 한 인간의 악함이라니, 이것은 거대한 낭비다.

사실 <오징어 게임>의 폭력 게임은 폭력과 그에 수반되는 신체의 고통을 볼거리로 제공하기 위한 수단이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드는 것은 <오징어 게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오징어 게임>은 여기에서 나아가 신체를 낱낱이 해부해서 전시한다. 스너프 필름과 유사한 장기 적출 장면은 서사의 전체적 흐름을 깨트릴 뿐이다. 폭력 게임의 또 다른 목표는 일그러진 남성 판타지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폭력 속에서 남성은 자신이 유리한 지위를 가질 수 있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의 선량한 보호자가 될 수 있다. 권력과 선을 모두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정호연)이라는 흥미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서도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는 생명력을 잃는다.

무엇보다 <오징어 게임>은 인물과의 적절한 거리가 없다. 게임에 다시 참가한 참가자들은 그들이 받을 상금이 다른 참가자들의 목숨에 대한 대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 도박에 참여했다. 이 도박에 선과 악은 없다. 모두가 가해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기훈(이정재)과 상우는 본질적인 면에서 다를 바 없는 인물이다. 물론 관객은 선하지 않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인물에 몰입할 수 있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브레이킹 배드>가 그렇다. 이 드라마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월터가 자신이 죽고 남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월터가 마약을 제조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마음속에 자리한 열등감과 분노 때문이며, <브레이킹 배드>는 월터의 작고 뒤틀린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월터를 충분히 이해하고, 월터의 상황에 몰입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월터에게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기훈은 그렇지 않다. 기훈은 어리석지만, 그 어리석음은 기훈에게 거리를 두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기훈의 재참가에 대한 허술한 변명일 뿐이다. 나아가 감독은 기훈을 비판할 수 없도록 해고 노동자와 오버랩하며 복직 투쟁의 트라우마를 만들어준다. 기훈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사회의 탓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훈과 같은 악인을 실제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희생자와 오버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드라마는 마치 기훈을 둘러싼 상황으로 인해 기훈이 어쩔 수 없이 악을 선택한 것처럼 보여준다. 이것은 <브레이킹 배드>가 월터를 다루는 방식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감독의 전작 <남한산성>이 보여주어야 할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차가운 국가주의의 시선을 은폐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여기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란 체스의 말처럼 죽어 나간 병졸들의 평범한 삶이었다. 영화가 인간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국가의 시선으로 전쟁을 관람하게 되는 것이다. <남한산성>과 달리 <오징어 게임>은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악한 주인공을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보게 한다. 악인을 마치 비에 흠뻑 젖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은 뜨거운 감정으로 드라마를 보게 되기에 비판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 <오징어 게임>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나 드라마에 이와 유사한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수업>이 그렇다. 주인공 지수(김동희)는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꿈을 꾸며 살아가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관객은 성매매 알선업자인 지수를 비판하기 어렵다. 지수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인해 관객은 지수의 악보다 지수를 둘러싼 어른들의 악만을 보게 된다.

피해자들이 사는 나라

<인간수업>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인간수업>이 굳이 외면하는 사실은 성매매 여성이 포주에게 돈을 주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점이다. 드라마의 안온한 가상 세계 안에서 성매매를 자유로운 계약으로 그려냄으로써 포주는 악당이 아니라 선량한 보호자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기훈은 끝까지 살인하지 않는 인물인데, 이것은 드라마가 기훈에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도주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기훈에게 자신의 목숨이냐, 살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훈은 타인의 목숨값을 노리는 도박꾼이 아니라 악한 세계 속 연약하고 선량한 피해자로 남게 된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는 곳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확정하려는 시도는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는 효과를 가져온다. 즉, 악한 것은 이 사회이며, 따라서 이 사회의 말에 지나지 않는 내가 저지르는 악덕은 모두 사회의 것이라는 변명을 관객이 믿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악은 자신이 악이 아니라는 확신에 찬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그들은 자신도 피해자라고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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